|
<하나비>와 <소나티네>가 ‘죽음’을 통해 반대 개념인 ‘삶’의 초상을 그려냈다면, <키즈리턴>과 <기쿠로지의 여름>은 삶의 연속성과 ‘의지’를 은유 했다.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이들 작품만 보더라도 그의 영화가 남발하는 죽음은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토이치>은 ‘인생이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올인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라는 것을 장님의 날이 선한 칼날 위에서 곡예 하듯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다케시의 유명한 작품 몇 개로 그의 영화 스타일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이자 객기다. ‘감독’ 기타노 다케시를 논하기 이전 코미디언/배우/MC로서의 ‘비트 다케시’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면 영화로 모든 것을 말해야겠지만 다케시는 감독 이전에 배우다. 때문에 배우로서의 다케시 즉 ‘비트 다케시’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그의 영화를 본다면, 다케시 영화의 정서를 온전히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동시에 반쪽자리 다케시에 열광하는 우를 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코미디언의 엉뚱함이 묻어난 <모두 하고 있습니까?>와 슬픔을 알기에 ‘광대’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다케시의 실체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지침서 같은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은 다케시의 필모그래피 초,중기에 제작된 영화에 해당한다. <모두하고 있습니까?>(1995년)는 ‘언뜻’ 보면 저질 3류 코미디이고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년)는 최루성 멜로에 눈물만 거둬 낸 슬픈 러브스토리이다.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두 영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다케시에 대한 ‘정의’를 ‘의문형’으로 바뀔 것이다
당신이 상상하던 모든 것, <모두하고 있습니까?>
|
<모두하고 있습니까?>의 엉뚱함은 극이 진행될수록 증폭되어 종반에 이르면 괴이한 분위기까지 감돈다. 카섹스든 비행섹스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쏟아 붇는 아사오. 그가 만들어 낸 사건의 연쇄반응은 의외로 삶의 부조리에 대한 다케시의 해학을 엿보게 해준다. 여자를 꼬시려면 비싼 오픈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아사오의 단순한 생각은 우리가 욕망하는 무언가의 상징이자 확대이미지이다. 또한 야쿠자의 세계를 경험하는 아사오를 통해 ‘타락’과 ‘순수’의 경계를 자기 맘대로 넘나드는 우리의 비열함을 조롱한다. 단순히 ‘카섹스’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결말이 걱정될 즈음 난데없이 투명인간을 연구하는 괴짜박사(다케시 분)가 등장하여 상황을 정리한다. <플라이>, <고스터 바스터즈>를 패러디하여 공상과학영화로 돌변한 이 영화의 결말은 엉뚱하고 난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괴짜박사의 실수로 파리인간이 된 아사오는 엄청나게 쌓인 인분(=똥) 더미에서 그걸(역시나 동의어는 'dung')로 배를 채우다 큰 파리채에 맞아 죽는다.
부패한 욕망들 사이에서 섹스에 관한 욕망을 불태우는 아사오는 차라리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카섹스~”를 외치는 아사오의 모습에서 다케시 영화 특유의 ‘비장미’가 엿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타노 다케시가 <모두하고 있습니까?>를 통해 “욕망하는가? 그럼 당신은 살아있다”를 얘기하려 했다면 가장 적절한 엔딩 신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집착에 관한 질퍽한 농담 한 마디이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냉소를 머금게 하는 파리인간의 죽음은 여기서도 여전히 비장하다.
TIP) 카메오로 출연한 오오스기 렌은 일본의 대표적 준주연급 배우다. 그의 평범한 외모는 의외로 하드보일드 영화와 야쿠자 영화에 그럴싸하게 잘 어울린다. 하얀 백지처럼 자신의 표정과 모습을 변화무쌍하게 변신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일본 영화계의 ‘방향타’라는 찬사를 받는 그는 장르와 예술의 경계를 영화 속에 적절히 녹여내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이다. 얼마 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한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제브라맨>에도 출연했다. 대표작으로는 <하나비>와 최양일 감독의 작품 <개 달리다>등이 있으며, 연극무대와 TV 드라마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랑의 언어에 관한 다케시의 찬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
어느 날 청소부인 시게루는 망가진 서핑보드를 줍는다. 그걸 수리해 바다로 향하는 시게루의 표정에서 버려진 보드를 줍던 때의 망설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상반되는 시게루의 표정을 정성스레 카메라에 담아둠으로써, 말하지 못하는 시게루의 삶과 사랑에 대한 젊은 에너지를 관객에게 설명한다. 시게루에게 소중한 것은 생생한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시킬 수 있는 서핑과 해변가에 앉아 그의 옷을 게워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친구뿐이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서핑을 타는 남자와 그걸 지켜보는 여자친구의 말없는 시선으로 시작해 끝이 나는 담백한 영화다.
그러나 살아있는 듯한 바다의 파도가 죽음의 이미지와 겹칠 때, 여름날의 시게루와 여자친구의 추억은 더 이상 그들만의 기억으로 스크린에 머물지 않는다. 울림이 깊은 정서적 파장은 “가슴이 아프다” 같은 식상한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삶의 의지가 꺾인 채 파도 위에 홀로 남아 유린당하는 서핑보드가 내재한 전복성은 열정, 사랑, 강렬한 젊음의 생기를 단 한 순간에 무채색의 의미로 되돌려 놓는다. 카메라의 렌즈를 활짝 열어 넘치듯 담아 낸 햇살과 푸른 바다의 청량한 색감은 결코 그 여름날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음을, 잔혹하리만큼 강렬한 추억의 파편으로 남게 한다.
여름 속의 바다, 바다의 손짓 파도, 파도 위에 시게루...
감독은 이 모두를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담아냄으로써 시게루가 결코 그 장소, 그 순간을 벗어 날 수 없는 운명의 소유자임을 역설한다. 추억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남자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고스란히 담아두어야만 하는 여자. 평온을 위장했던 여름 바닷가의 모습은 시간을 가두는 장소였다. 그러나 푸른 파도가 ‘죽음’의 동의어여도 바다를 향해 떠내려가는 시게루의 서핑보드는 삶과 사랑에 관한 강렬한 열정을 내포한다. 때문에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사랑과 젊음에 대한 다케시만의 찬가다. 아울러 무심하게 묘사된 죽음 즉, 분절된 시간 속에서도 삶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만은 살아있음을 얘기한다.
말을 못하는 연인은 기타노 다케시의 또 다른 이름 ‘비트 다케시’의 분신 같다. 슬픔을 느껴도 항상 웃고 있는 ‘광대’처럼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슬픔을 한 장의 사진 속에 담아 감추며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이건 슬픔을 웃음으로 포장하는 광대 비트 다케시만이 건드릴 수 있는 정서적 표현능력이다. 결코 ‘감독’ 다케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비트 다케시와 기타노 다케시의 완벽한 합일점을 찾은 영화가 ‘멜로’ 장르라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광대는 슬퍼야 웃음을 팔 수 있기에........
TIP)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닷가>는 다케시가 예정에도 없다가 만든 작품이다. 어느 일본 모 감독이 서핑영화를 만든다는 소리에 다케시는 야유를 퍼부었고 화가 난 모 감독은 “그럼 네가 만들어봐.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겠어”하면 응수했다고 한다. 이 소리에 발끈해 만든 작품이 바로 이 영화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치기 어린 감독들 싸움 덕분에 다케시팬인 우리만 신났지 모~...^^;;
위에서 얘기한 두 작품을 통해 현재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스타일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파리 목숨처럼 다루는 비열한 ‘자만심’과 무심하게 죽음을 던져놓는 ‘비정함’은 모두 ‘비트 다케시’를 통해 완성된 ‘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축복 받은 재능이다.
다케시 영화에 툭하면 터져 나오는 ‘불가항력적’인 죽음의 세레모니는 광대의 표정처럼 ‘삶의 의지’에 관한 지독한 역설이 된다. 처진 어깨에 팔자 걸음인 그의 영화를 우리가 기다리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