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우린, 아이라 레빈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다.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꼭 아이라 레빈의 경우 만은 아닐게다. 사실 한국사람이 미국 펄프픽션 작가에 대해 잘 알아야 될 이유도 없다. 가뜩이나 학창시절부터 세계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자라난 한국의 성인에게 미국 펄프픽션까지 관심을 기울여야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다만 펄프픽션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펄프픽션을 원전으로 한 영화는 무척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많은 한국 관객이 그런 영화에는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LA컨피덴셜][조지클루니의 표적]같은 영화를 거쳐 미국 싸구려 범죄소설을 알아 버렸고, 기괴한 취향의 [파이트클럽]같은 영화를 거쳐 펄프픽션에 맛을 들이고 말았다. 아,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연상해도 좋겠다. 타란티노야 말로 미국 펄프픽션을 온몸으로 체득해 영화로 옮긴 남자니까.
다음 순서는? 이미 익숙해진 것, 확인해 보자는 것이지
밝고 유머러스한 영화지만 어딘지 소름끼치는 이야기, [스텝포드 와이프]는 완벽한 스텝포드 마을을 통해 기괴한 상상을 펼친다. 모두가 금발에 아름다운 스텝포드 마을의 아내들이 죄다 인조인간이라는 상상이 [스텝포드 와이프]의 큰 얼개다. 여기엔 물론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갔다가 인조인간으로 대체되기에 이른 조안나(니콜 키드먼)가 있다.
어쩐지, 지나치게 완벽하고 요란하게 왁자지껄한 마을이 범상치 않더라니. 유머와 기발한 착상이 결합하여 조금은 서늘한 이야기로 전개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는 1972년에 출판된 아이라 레빈의 동명소설에 기반한다. 주인공과 이야기 얼개를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스텝포드 와이프]는 공포와 유머를 절묘하게 섞을 줄 알았던 아이라 레빈의 재능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은 레빈 소설의 특징이 잘 드러난 [스텝포드 와이프]는 SF소설의 인조인간을 음모에 접목 시켜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미 3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라 연출 자체는 구닥다리지만 원작의 기발한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살린 영화는 훨씬 흥미진진하다. 조안나 역의 캐서린 로스는 지금 관객에게도 [내일을 향해 쏴라]같은 영화로 익숙한 배우. 물론 30년도 더 된 [스텝포드 와이프]의 최초 영화판은 2004년 한국에서 구하기 매우 어려운 영화다.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번외편 TV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복수Revenge of Stepford Wives](1980)나 [스텝포드 아이들The Stepford Children](1987)은 물론이고.
아이라 레빈이 인조인간같은 SF적 소재에 일가견이 있음은 [스텝포드 와이프]보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에서 잘 드러난다. 복제가 처음 이슈로 떠오를때 발표한 이 소설은 극적구성의 치밀함과 박진감에서 레빈의 최고 소설 중 하나다.
처음 이야기는 나치 전범 사냥꾼인 사이먼 위젠탈이 나치 시절 생물학 권위자였던 멩겔레 박사의 음모를 제보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북미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65세 남자 94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것. 이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나이의 남자아이들 양자로 들이고 있었고, 위젠탈은 결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생긴 사실을 밝혀내고 경악한다. 모두가 14세 소년들, 과거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도 히틀러가 14세 되던 해 죽었다.
아직 복제기술이 체계도 잡히기 전 발표한 이 소설은 복제방법의 세밀함이 최근의 영화보다도 뛰어나다. 복제를 다룬 최근의 작품 어떤 것도 [브라질에서 온 소년]의 성과를 따라잡지 못했다. 최소한 이 소설은 인간을 복제한다고 처음부터 모든 능력이 똑같거나 복제한 직후부터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잠재력을 가진 쌍둥이일 뿐. 주제의식과 전개도 대단해서 소설을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들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소설이 번역 출간되어있다. 망해버린 고려원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에 출판되었다.
레빈 소설의 백미답게 소설이 발표되고 2년후 1978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설의 기본 얼개를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는 소설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흥미진진한 수작인데, [혹성탈출]의 명장 프랭클린 샤프너가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레고리 펙을 기용해 만든 작품이다. 국내의 경우 구하기는 힘들지만 이미 DVD로도 발매되어있고 공중파를 통해서도 방영된 바 있다.
영화화된 레빈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로즈마리의 아기]겠다. 공포영화팬 사이에서 고전으로 유명한 이 소설은 영화의 경우 DVD샾이나 약간 큰 규모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 역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번역 수준도 썩 괜찮다. 영화의 경우는 최근에 DVD가 새로 발매되었으니 화질이나 음향에서 만족할 수 있을 듯. 미국의 경우 레빈이 1997년에 [로즈마리의 아들Son of Rosemary]라는 속편도 출판했다.
신혼부부로 운좋게 좋은 아파트를 싸게 구한 로즈마리 부부가 겪게 되는 악몽이 [로즈마리의 아기] 기본 줄거리다. 로즈마리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불길한 악몽을 자꾸 꾸게되며 완벽하게만 보였던 아파트 이웃과 심지어 남편까지도 점점 불안하게 느껴진다. 데미 무어 주연의 [세븐사인]같은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이 오컬트 고전은 영화가 소설과 난형난제인 보기 드문 예다. 소설의 핵심을 미끈하게 각색하여 느긋하게 연출한 감독은 [물속의 칼][피아니스트]로 이름 높은 로만 폴란스키. 점점 불안해만 지는 로즈마리를 연기한 미아 패로도 훌륭하고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존 카사베츠를 남편역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라 레빈의 장편 데뷔작인 [죽음 전의 키스]는 두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처음 영화화 되었던 거드 오스왈드 감독의 1956년판의 경우 한국에서 볼 수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제임스 디어던이 감독한 1991년판은 중소규모 이상의 비디오 대여점을 잘 뒤지면 찾을 수 있다. 두 편 모두 스릴러로써 재미는 평범한 수준.
야망이 넘치는 청년의 음모를 다룬 [죽음 전의 키스]의 플롯은 [태양은 가득히]의 도시 버젼 같다. 성이 바뀌고 플롯도 좀 더 복잡해졌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비슷하다. 비슷한 스릴러가 많아진 최근에 비교해도 [죽음 전의 키스]는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친다. 남성 관객이라면 1991년판에서 관능적인 숀 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개봉하는 [스텝포드 와이프]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아이라 레빈 원작 영화는 샤론 스톤이 주연한 [슬리버]겠다. 영화의 마케팅 전략 덕분에 원작소설도 함께 번역이 되어 나와있는데, 원작도 레빈의 다른 작품에 비해 범작이지만 영화는 더 심한 감이 있다. 조 에스터하즈의 각색도 불성실했지만 무엇보다도 [원초적 본능]의 성공 이후 샤론 스톤의 관능미에 총력을 기울여 만든 영화의 한계가 지나치게 많은 허술함을 만들어냈다. 오히려 영화 [슬리버]의 경우, 샤론 스톤이나 플롯보다도 넘버원 히트곡 [Can't help falling in Love]을 삽입곡으로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을 듯.
헐리웃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스티븐 킹만큼이나 아이라 레빈도 영화로 많이 만들어 지는 소설가다. 오히려 작가로서 스펙트럼과 강렬함은 더 빼어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문득 신작 [스텝포드 와이프]에서 레빈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전 영화를 곰곰히 되짚어보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레빈의 이름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