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빈집>에 들어서다
<빈집>(2004)에 이르기까지 김기덕은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고갯길을 많이도 넘었다. <파란대문>을 마쳤을 때쯤이었을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월간지에 난 인터뷰 기사를 보고 나는 정체가 불분명한 미확인 비행물체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더랬다.
일년에 한편씩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공언이 곧 식언으로 바뀔 거라는 주관적인 선입견 때문이었다. 3-4년에 걸쳐 한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결국 엎어지고 마는 영화도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혹여 그렇게 만든다고 해도 작품성을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화수분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96년 이후 9년 동안 11편의 영화를 내놓은 가공할 만한 제작속도를 즐기는 감독에게 세간의 평가야 비판과 옹호가 칼날처럼 대척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두개의 국제영화제에서 한 해에 감독상을 거머쥔 오만에 찬 감독의 눈에서는 그저 자기 영화세계에 대한 확신이 점점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듯 보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자신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넘치는 듯한 자신감 뒤엔 항상 그 만큼의 열패감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비평가들에 의해 표현의 생경함, 잔혹한 이미지의 공격성 등으로 폄하되곤 했다. 탈근대의 비탈에 서 있는 가장 극단적인 주변부의 초상, 아마 그것이 그의 변함없는 악어, 김기덕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평가의 배경에는 <섬>에서처럼 관객의 의표를 찌르듯, 폐부 혹은 음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낚시 바늘의 강렬함만큼이나 여전히 그가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빈집>에서 보이는 서툴러 보이는 하나의 실험은 ‘유령게임’이며 그 투박함은 그래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이것은 쉽게 상징적 코드로 승화되어 버리기 보다는 여전히 다시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그런 에너지를 수반하는 것이다. 그는 세련된 수법의 리얼리즘에 속하는 코드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온몸을 하얗게 칠한 퍼포먼스(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부터 창녀에 대한 강박적인 메타포(파란대문, 나쁜남자, 사마리아, 섬), 분단상황에 대한 비극(수취인 불명, 해안선)에 이르기까지 분명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낯선 이미지들이 지배한다. 하지만 결코 익숙한 해석과정을 거쳐 전체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아귀가 딱 들어맞지는 않는 뒤틀림들이 있다. 아마도 그는 거친 이미지들이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불꽃놀이 보듯 즐기는 사람인 듯 싶다. 우리는 결코 그를 쉽게 읽히는 상징계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익숙한 코드로 대번에 해독되는 암호문처럼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인이 따로 없는 집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김기덕은 그 이름표 붙은 소유의 불가침은 간단하게 부정된다. 그는 소유의 절대적 권리는 부정하지만 가끔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창녀의 행위는 희생제의로 승화시키려 한다. 그 극단이 바로 교환되는 창녀일 것이다. 이 부정의 야심 찬 시도는 그러나 예기치 않은 냉소와 비난을 불러왔고 <나쁜 남자>에서 하층민의 쇳소리 나는 분노의 폭발은 여성에게 강자로 군림하려는 모습으로 해석되곤 했다. 비록 안으로 삭히고 속으로 내뱉는 폭발로 내파될지라도 말이다.
그의 영화세계가 가지는 균열지점은 바로 이러한 모순에 집중되어 있으며 일군의 관객들에게 진실을 보여주지만 나머지 반쪽에게는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그 비극은 그러나 가장 정확한 정치적 재현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가 받은 트로피들에는 마땅히 정치적 재현의 균열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그 한국적 상황의 국제화가 바로 그의 현실에 대한 재현의 공로이다.
그런 그가 이제 좀 더 영화적인 메타포의 인식론적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그는 <빈집>에서 영화적 환상의 실재를 담아내기 위한 풍부한 장치들에 과감히 매달리고 있다. <빈집>의 ‘유령연습’은 180도를 넘어서는 시각적 맹점들을 사고하고자 하는 모던한 영화 만들기의 전형이다. 보이지 않아야 할 환상이 실재하는 영화적 표현의 특수성(부재의 현존)은 시각적 메카니즘이 지닌 한계 상황에 대한 돌파구이자 새로운 영토에 대한 미학적 야심의 일단을 드러낸 여정의 일부일 것이다. 거기에도 여전히 성적 차이에 대한 민감한 이성애적 구도는 폭력 남편에 대비되는 이상적 구원자로서의 환상적 대상이 개입한다. 다정다감하지만 말이 없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인 환상적 대상은 환상의 저편에 있는 실재이다.
언제나 현실/이상의 이분법 아니면 양면성의 극히 얇은 스펙트럼이 상상처럼 무균질한 형태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스펙트럼의 확장이다. 현실에 대한 차가운 긍정보다는 언제나 뜨거운 열정과 광기에 찬 무대가 펼쳐졌던 것에 비하면 이러한 환상의 적극적인 도입은 보다 다채로운 현실인식을 드러내며 서로 다른 듯 보이는 균열지점들을 하나로 포개어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빈집>에서 포개지는 이승연의 이미지 또한 그가 적극적으로 포개려하는 균열의 뜨거운 접점의 일부이다. ‘위안부 누드’라는 이벤트에 의해 추락한 여배우의 이미지는 영화적 쾌락의 대상으로서 구원되고 구원되면서 현실적으로 소비되며 동시에 이 둘은 겹쳐진다. 이것은 전형적인 현실과 환상의 경계허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이 서로를 자양분 삼아 취하는 패러디는 가장 강력한 포스트모던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 그가 현실에서 떨어져 있었던 적도 없었지만 이번만큼 강력하게 현실에 귀환했다는 증거를 남겼던 적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 되고자 하며 결코 종합하여 환원되어 버리는 재구성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헤아리기 힘든 이종교배의 이미지는 이제 가려져 있던 환상의 전면화를 통해 합일로 향하는 듯 보인다. 마지막 장면, 선화가 남편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낯설음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침입자와 입맞추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도상적으로는 조화로울지 모르지만 의미화되기에는 겹겹의 균열을 내재한 포즈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환상과 현실간의 서투른 융합이다.
포스트 모던은 김기덕에게 이런 균열의 정서, 배반의 양가감정들을 위한 훌륭한 미학적 도구가 되어줄 것이며 동시에 잠시 동안의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 줄 것이다. 환상은 누구나에게 그만큼의 할당된 쾌락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 <빈집>은 여전히 매우 불균질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