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아이콘, 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었다. 파리 시내 어느 공원에서 자그만 축제가 벌어진 날 밤, 나는 붉은 티셔츠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사내의 얼굴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팔고 있는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그게 ‘체 게바라’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체 게바라에 무지했고 한국은 혁명이라고 일컬을 만한 역사가 빈곤했다. 짧디 짧은 배낭여행 후, 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조그만 책이 나왔다. 나는 그 현상이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나는 조그만 문고판 책을 통해 그를 너무나 늦게 알아볼 수 있었다.
체 게바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베레모를 쓰고 시거를 문 모습일 것이다. 아마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혁명가일 것이다. 중국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젊은 날의 체가 남미를 두루 훑고 다닌 것도 아마 ‘대장정’을 위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작은 딸을 작은 마오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니 말이다. 그가 죽은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히 사그러들 줄 모른다. 김남주는 몰라도, 더욱이 프란츠 파농은 더더욱 모르지만 유독 한국에서 ‘체’의 인기는 정말 끈질기다. 파농에 관한 영화는 내가 알기에는 한편도 없지만 게바라에 대한 영화는 정말 차고 넘친다. 미발견 다큐멘터리들이 상영되고 그에 관한 극영화까지 이렇게 개봉을 하니 말이다.
뒤늦은 도착 혹은 아직도 이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영웅에 관한 과도한 신화화의 외피를 혁명가의 미숙했던 젊은 시절을 통해 벗겨내고자 하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의 계략>같은, 진정 게바라가 바랐을 법한 관객에 대한 의식적인 혁명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기에는 너무 감상적이다. 노스탤지어가 넘친다는 말이다. 혁명은 결코 향수어린 추억의 다른 이름이 아닌 것이다. 체와 카스트로가 59년 쿠바를 해방시켰을 때, 49년 중국 공산화와 더불어 세계는 정말 엄청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고 베트남 전쟁의 발발과 함께 진보적 운동이 60년대 말 70년대 초 세계를 지배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낭만적 회고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 알베르토가 푸세(알베르토가 체에 붙인 애칭)가 탄 화물비행기를 탄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기나긴 회한에 잠긴 그의 모습을 늙어버린 실제의 모습과 병치해서 보여준다. 그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정체성을 가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현재의 우리와 영웅 체 게바라의 모습이다.
체 게바라를 잊어야 할 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젊은 날의 체 게바라가 남미 대륙을 일주하는 여정으로 채워져 있지만 나에게 그것은 다만 한 때의 노스탤지어로만 남았을 뿐이다. 물론 보는 이들에 따라 새로운 혁명정신으로 일상을 무장시킬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좀 위험한 관람방식이다. <영웅본색>을 보고나서 성냥개비를 무는 것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나서 ‘혁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체’를 잊어야 할 때이다. 아니 우리에겐 전태일이, 박노해가, 김남주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게바라가 부각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죽어가고 사라져 간 후 체게바라가 너무나도 뒤늦게 당도했다. 어쩌면 칸 영화제 출품작이라는 이름과 감독의 명망 아래 약간의 관객몰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나간 혁명에 대해 추억하는 것일 뿐이다. 뭐,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진짜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게 체 게바라는 이제 상업화된 아이콘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의 혁명정신은 영화와 티셔츠가 아닌 민중의 삶 속에서의 실천 속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던 ‘체 게바라’, 비록 너무나 늦게 도착한 감이 없진 않으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자 애쓴다면 그의 삶을 반추해보도록 권한다. 혁명적 의식이 꼭 혁명적 영화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