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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덤- 잘 생겨서 죄송한 배우 정.우.성
스타덤 | 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 서대원 기자 이메일

스타를 향한 대중의 분방한 욕망과 환상의 지형도 안에는 수많은 다름의 시선들이 위치 지어져 있거나 이동 중에 있다.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이 복잡다단함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배우를 바라보는 가장 편의적이고 중요한 시선 하나를 꼽자면, 아마도 표출화된 이미지, 외모일 것이다. 이 같은 파시즘적 견해에 가장 잘 포착되는 배우가 다름 아닌 ‘정우성’이다.

그러니까 질펀한 술자리에서 남녀가 갈려 꽃미남이네! 아니네!, 죽이네! 재수없네! 하며 번번이 배우의 외모를 안주 삼아 일삼는 악랄한 이빨의 논쟁을 잠재우며 공히, 남녀가 하나로 포개져 부단 없이 찬사의 멘트를 날리는 복 받은 인물이 정우성이라는 말이다.

● 남녀를 안 가리고 웬만하면 자지러지게 만드는 그 이미지의 정체

어느 덧 11개의 필모그라피를 가슴에 품은 정우성은 설익은 첫걸음으로부터 꽤 멀리 그만의 좌표를 그리며 계속 진화해왔다. 국어책 낭독의 신공으로 본의 아니게 과묵한 캐릭터로 일관하며 뭘 해도 어설펐던 94년 데뷔작 <구미호>와 정신이 죽어가는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는 절망스런 현실 앞에서 숨죽여 오열하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현재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김성수 감독의 <비트>를 통해 산업적 측면에 방점을 둔, 덜컥거리긴 하지만,‘스타’라는 청룡열차의 궤도에 오르게 된 그는, ‘배우’라는 본질적 가치 역시 김감독의 <태양은 없다>로 일정부분 부여받았다. 그 이후 드넓은 대륙과 자그마한 지방 소도시를 횡단하며 <무사>와 <똥개>를 통과해왔다.

결국 정우성은 이런 생산적인 행보를 거쳐 최근의 순애보적 멜로물까지 모든 필모그라피를 아우르며 관통하는‘반항적이면서 외로운 이미지’라는, 그만의 전형적인 아우라를 획득하며 한국영화계의 의미심장한 상징적 존재로 안착했다. 물론 이와 같이 청춘스타의 아키타입이라 불리는 반열까지 그를 이끈 결정적인 에너지는, ‘일상미’와는 멀리 비껴난 세상과 일탈된 그의 외형적 이미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완벽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이지 않으며, 반항적이지만 여자에게는 지고지순하고, 사랑보다는 의리.우정에 더 가치를 두는 그의 모습은,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의 충돌 속에서도 어느 한 겹의 이미지도 상실하지 않는 마법사의 환타지 그 자체이다. 바로 이것이 대중이 욕망하는 페르소나와 정우성 자신이 내뿜는 페르소나가 일치해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의 존재를 거침없이 수직상승하게 만든 난공불락의 동력추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인네든 사내든 접대성 미소가 아닌 평상시 자태만 보고도 웬만해서는 아니 자지러질 수 없는 것이다.

● 당신도 알고 정우성도 알고 있는 그 가공할 만한 외모의 ‘덫’

허나, 주술적인 그의 후광의 이면에는, 그를 지켜보는 여러 사람들과 결정적으로 그 자신을 옭죄는 숨 막히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가공할 만한 그의 외양이 숙명적으로 내재한 일종의 ‘덫’이다.

한석규 설경구 송강호와 같은 배우들이 누리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으로 그가 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신의 이미지를 지워나갈 수 있는 운신의 여백이 실종된 채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역’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아픔 아닌 아픔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90년대 후반부터 홍상수 허진호 감독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한, 일상적이고 사실적 연기에 대한 영화적 수용의 대세가 스스로의 덫에 걸린 정우성 자신을 짓누르는 외부적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똥개>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대해서는 여전히 말들이 많다. 이는 전언했듯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또한 그의 휘황찬란한 얼굴이 공포든 에로든 사회물이든 오만가지 소재와 죄다 부합된다면 이거 역시 영화배우스럽지 마스크로 배우의 꿈을 불사르고 있는 어린 새싹과 다양한 표정의 배우를 보고 싶어 하는 대중에게도 적잖이 민폐다.

그러니까 괜시리 내외적으로 압박해오는 강박증에 못 이겨 과거의 캐릭터를 청산하고 되도 않는 엄한 배역에 굳이 그가 도전할 필요는 없다. 억울한 표정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설경구, 갑빠 가득한 얼굴 만들기의 대가 최민수, 마르고 닿도록 세파에 찌든 소시민의 초상 최민식,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고뇌어린 인텔리의 냄새를 풍기는 한석규 등 정우성 역시 자신의 이미지가 가장 잘 표현되고 드러날 수 있는 배역에 밀도 높은 깊이감을 불어넣는 것이 현재로선 중요하다.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판은 아무리 잘 해도 늘상 나오는 말이니 그닥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아니, 사실 뭐 적반하장으로 따져도 된다. 김치도 숙성이 돼야 제 맛이 나거늘, 아직 준비가 채 안 됐는데 왜 자꾸 다른 거 하라고 닦달 하냐고.

그러면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자신을 비우며, 때로는 작은 영화 등 작업 시스템이 다른 환경에서 일하며, 이제껏 취하지 못(안)했던 또 다른 느낌과 표정을 그 안에 담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발산하는 분위기와 에너지를 확실히 대중에게 각인시킨 후 스스로 구축한 그 이미지와 경계선을 끊임없이 허물고 탈주하는 브래드 피트와 아사노 타다노부가 걷고 있는 노선이 어쩌면 정우성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탈을 꿈꾸며 지속적으로 밖으로 나아가려는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견지함과 동시에 소통을 모색하며 어딘가에 정착하려는, 기존의 이미지에서는 쉬이 볼 수 없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난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때문에 그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 잘 생겨서 죄송한 배우 정우성에게 절실한 것

한때, 못 생겨서 죄송하다’는 유행어가 판을 친 적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어딜 내놔도 쪽팔릴 수밖에 없는 남루한 외모를 지닌 필자의 피해의식일지언정 외모지상주의가 된 이 놈의 한국사회에서는 ‘잘 생겨서 죄송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뭐 그렇다고 뭐 부채 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살인적 미모를 타고난 게 최소한 현실에서는 축복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태생적 재능을 배우 정우성은 대중과 함께 누리고 있다. 스크린에 현현한 그의 모습에 관객은, 자신을 투영하며 욕망을 키우고 삶에 대한 절망과 좌절을 쓰다듬고 껴안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과시적인 허영이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일상에 찌든 소년 소녀와 서민에겐 이것이 나름의 생산적은 역할을 하긴 하지만 정우성이나 우리나 여기에 안주해 만족하진 못한다. 한순간 소비된 후 휘발되는 캐릭터가 아니라 좀 더 우리의 청춘과 일상을 성찰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진정성 그득한 사람 냄새나는 그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전했듯 화들짝스런 이미지 변신에 서둘러 주력하기보다 지금까지 구축한 자아와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는 배역을 선택해 밀도 높은 깊이감을 불어넣는 것이 배우 정우성에겐 무엇보다 절실하다.

*본 기사는 씨네진에도 게재됐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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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33
정우성 연기 못한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가?   
2005-02-06 01:57
ann33
솔직히 잘생겼어도 귀티나는 건 아니죠.   
2005-02-06 01:56
moomsh
나도 수염이나 기르고 싶다..ㅋㅋ   
2005-02-05 17:43
moomsh
잘생기고 멋지죠...눈물연기도 괜찮구..^^   
2005-02-05 17:43
khjhero
그래서 싫어...ㅡㅡ;   
2005-02-03 16:39
khjhero
정우성 멋지긴 하죠...ㅡㅡ;   
2005-02-03 16:39
real3mong
무사.. 진짜 재밌었는데..   
2005-02-0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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