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한 선생님에 관한 회고다. 이제는 중년을 넘어서고 있는 그의 제자 둘이 추억을 불러오는 식으로 이야기는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는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된 어린 모항쥬와 친구 페피노가 거기 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사 학교. 말이 학교지 그야말로 문제아들만 골라서 모아놓은 것 같다. 부임하는 선생이 학생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곳이니 오죽하랴. 그런 학교에 아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을 대머리 선생 마티유가 부임하게 된다.
아이들이 거칠어 선생 역시 거칠게 맞서야 한다는 교장은 그야말로 강압과 권위의 표상이다. 아이들을 독방에 가두는 등 몇 가지 행동만으로 그가 얼마나 강압적인 캐릭터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 교장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 아이들이니 이놈들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학교에 순하디 순한 마티유가 부임했으니 분명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딱이다. 아이들은 마티유가 마치 자기들의 밥인 양 놀려대기에 여념이 없다. 칠판에 대머리 선생을 놀리는 그림을 그리다 마티유에게 발각된다. 하지만 마티유는 그동안 다른 선생들이 보여 왔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아이들을 대한다.
금방 매질이나 독방으로 끌려가는 게 그동안의 전례였다면 마티유는 화내기 보다는 덩달아 자신의 얼굴 그림 옆에 아이의 얼굴을 그려 놓는다. 학교에 만연돼 있는 고정관념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마티유. 마티유는 교장이나 다른 여타 선생들처럼 아이들을 자기들의 입맛대로 길들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아이들과 융화될 것인가가 목표다. 그래서 그가 발견해낸 게 바로 노래다.
마티유는 실패한 작곡가로 다시는 작곡 같은 거 안하게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이 학교에 부임했다. 하지만 서툴게 노래하는 아이들에게서 작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의 다짐 따위는 중요치 않다며 바꿔버린다. 이리하여 아이들 합창단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교장은 그런 아이들을 믿지 않는다. 아이들은 늘 말썽만 피우는 피곤한 대상일 뿐이다. 마티유와 함께 노래를 하던 아이들은 점차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고 아이들이 부드럽게 변해가자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도 변해간다. 마치 마티유에 의해 학교 전체가 마법에 걸린 듯 평범한 학교의 모습을 갖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정교사처럼 마티유는 음악을 통해 학교 전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아이들의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건 바로 마티유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러 넣어줌으로써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틔워준 것이다. 마티유의 모습 속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비롯해 그동안 영화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참된 스승들의 모습이 겹쳐져 있다. 하지만 고된 노력 끝에 아이들의 노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뻔한 모습을 담고 있진 않다. 그냥 아이들은 쑥쑥 노래실력이 향상된다. 마치 거칠 것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그렇게 영화는 넉넉하게 진행된다.
충분히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최고조의 절정을 이끌어 낼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두리둥실 흘러간다. 그럼에도 재미와 흥미, 긴장이 느껴진다. 인상적인 드라마틱한 장면에 집착했다면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선생이라는 공식에 딱 들어맞는 그저 그런 영화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피해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만 안겨줬지만 그걸 발판으로 아이들은 꿈을 실현하는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아이들을 가능케 한 한 선생의 이야기다.
첫눈에 반한 모항쥬의 엄마가 모처럼 마티유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듯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순수한 영혼의 울림으로 작은 희망을 불어넣는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