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인공 소피는 갑자기 스스로가 늙어 버린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편하다고. 세월을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 정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에 적응 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 빛을 발할 때 우리는 ‘연륜’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는 배우로 더 잘 알려졌던 사람이다. 보지는 못했더라도 누구나 <황야의 무법자> 정도의 제목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티해리> 시리즈를 묵과할 수 없으리라.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에는 커다란 시가를 입에 물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덥수룩한 수염에 시니컬한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허무함이 담겨져 있었다. 70여 편에 육박하는 출연작들 가운데 단연코 가장 많은 장르가 서부 액션 영화다. 그는 총잡이였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남성 아이콘이었다.
앞서 얘기했지만, 세월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어둠속의 벨이 울릴 때>로 메가폰을 잡았을 때 그의 도전은 치기 어린 것이었다.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를 선택했다는 것과 그 소재의 독특함은 젊은 혈기가 가져온 외도 같은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배우 외에도 새로운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출발을 보였던 그의 감독 생활은 그러나 기존에 그가 버리지 못했던 서부 총잡이의 이미지를 계속 갉아 먹으며 제자리를 멤도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런 그가 변화하는 것 역시 세월의 영향이었다. 더 이상 액션을 할 나이가, 체력이 따라주지 않게 되자 그는 인생과 삶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더 이상 카우보이가 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그의 그런 의지가 뼈 속 깊이 전해져 오는 작품이다.
퇴물 카우보이가 되어 인생 뒤안길의 쓸쓸함을 담담하고 느린 걸음으로 <용서 받지 못한 자>에 풀어 놓는다.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그의 카우보이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품이자, 서부영화에 대한 안녕을 고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쓸쓸하게 그려졌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 완벽히 환골탈태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퍼펙트 월드>는 흥행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비루한 한 남자의 인생을 통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시들어가던 케빈 코스트너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던 작품이다. 베스트 셀러를 원작으로 하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지나치게 슬로우 템포로 진행되는 러브 스토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황혼의 로맨스를 지독히 달콤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앱솔루트 파워>와 <미드나잇 가든>에서는 정치와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선보였으며,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블러드 워크>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모든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감정선의 섬세함에 있다. <퍼펙트 월드>는 반어적인 제목과는 달리 너무도 슬픈 두 남자의 대결구도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의 관계와 그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혹은 사건)를 따라 움직인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젊음의 열정이 사라져버린, 사랑과 현실에서 방황하는 노년의 알싸함을 특유의 디테일 함으로 포장하고 있다. <앱솔루트 파워>, <미드나잇 가든>, <스페이스 카우보이>등이 그저 그런 액션영화나 스릴러가 되지 않았던 것은 감독의 연출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의 연출력이 배우들에게 미친 결과는 더욱 크고 거대했다. <용서 받지 못한자>는 진 해크만을 새롭게 부각시켰고, <퍼펙트 월드>는 케빈 코스트너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메릴 스트립을 그리고 <미스틱 리버>는 할리우드 최고의 악동 숀 펜에게 남우 주연상의 영광을 안겨 주기도 했다. 배우의 강점을 잡아내는 능력은 배우에서 감독으로 발전한 그의 배경과 필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에비에이터>를 쓸쓸하게 만들어 버린(올해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이기는 하지만, 주요 부문은 하나도 수상하지 못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륜’이 제대로 베어나는 영화다.
2005년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거대한 규모로 덤비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들에게 조언을 던지는 또 한명의 남자의 미묘한 감정과 인생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황망하고 가슴 절절히 다가와 영화를 보고 자리를 일어설 수 없을 정도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슬픔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감독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견 했음이 분명하다. 세월의 풍파로 단련된 그의 연출 솜씨는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관객들을 울지도 못할 정도로 가슴 아프게 한다.
이제, 배우라는 수식어보다 감독이라는 칭호가 더욱 잘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다운 매체인지를 보여주는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천편일률적으로 오로지 돈을 위해 달리는 할리우드의 속성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야 말로 모래알 속의 보석과 같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 할 수 있겠다. 환상이 아닌 현실을 이야기 하는… 이제 보석을 발견했으니, 그 보석을 감상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이 남자,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