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많이 붉으십니다.
어제 VIP 시사회 끝나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래요. 아우, 오늘 일어나는데 죽겠더라고요. 낮에는 음주인터뷰를 한 기분입니다. 아, 걱정 말아요. 지금은 다 깼어요.(웃음)
즐겨 드시는 술이 있으신가요?
저는 ‘온리(only)’ 소주예요!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소맥이요? 큰 일 납니다. 마셨다간 다음 날 일을 못해요. 이젠 건강 생각해서 술은 좀 줄이긴 해야 하는데, 참. <신세계>에서 신우(송지효)가 강과장(최민식)에서 “이젠 담배 좀 끊으세요!”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진짜 저에게 하는 말 같아요. 송지효랑 박훈정 감독이 매일 그랬거든요. “선배님 담배 좀 줄이시고요, 술도 좀 줄이시고요, 건강도 이젠 생각 하셔야죠.”(웃음)
<올드보이>(2003), <악마를 보았다>(2010) 등에서 폭력의 주체이자 객체셨는데, <신세계>에서의 강과장은 직접적으로 폭력에 가담하는 씬이 없더군요. 폭력수위가 센 영화인데도 말이죠. 허전하지 않으시던가요?
허전하긴요. 폭력행세 안 하려고 강과장을 한 건데.(웃음) 고생하는 동료들 보면서 ‘아우, 쌤통이다!’ 이랬습니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박훈정 감독이 그랬어요. “형, 정청(황정민) 할래? 강과장 할래?” 그래서 “당연히 강과장이지!”했죠. 제가 또 칼을 들어봐요. 아직도 <악마를 보았다>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 놈은 맨 날 ‘썰기만’ 하네!” 이럴 거 아닙니까. 강과장은 점잖잖아요. 모사를 꾸미기는 하지만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캐릭터가 강하긴 무척 강했죠.(웃음)
강했죠. 그런데 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스타일 연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그랬을 때 아무래도 조직폭력배 정청보다는 경찰 강과장이 맞죠. 강과장이 전략을 짜고 모사를 꾸미는데 있어 뭔가 베테랑 냄새도 나고요. 정민이가 정청을 더 잘 하리라, 생각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잘 했고요. 왜, 예전 <달콤한 인생>(2005)때 보여준 백사장 캐릭터 좋았잖아요? 그 캐릭터랑 비슷한 면이 있죠.
이정재 씨가 연기한 이자성은 범죄조직에 잠입한 비밀경찰입니다. 깡패와 경찰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자성에게서, 건달도 아닌 그렇다고 일반인도 아닌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의 ‘반달’ 최익현이 떠오르더군요. 연기하면서 자성에게 연민이 느껴지지 않던가요?
자성이 더 힘들죠. 최익현은 할 ‘꺼리’가 많잖아요. 부딪치는 사람도 많고 에피소드도 다양해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면 됐어요. 그런데 자성은 드라마 속에서 한정적이에요. 자주 부딪히는 사람이라곤, 정청과 강과장, 딱 둘뿐이죠. 이 둘 사이에 애매모호하게 끼어 있는, 빨리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시달리는, 그런 것들에서 오는 인간적인 갈등과 고뇌를 대사가 아닌 표정으로 담아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잘 하리라 믿었습니다. <태양은 없다>(1988)의 이정재와 <신세계>의 이정재는 확연히 달라요. 그리고 이런 영화에는 그런 스타일리쉬한 배우가 포스터 가운데 딱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정청과 강과장 같은 ‘쌈마이’들이 옆에서 재롱잔치를 해도 삼각구도가 잘 맞죠. 이정재를 보면 화보잖아요, 화보!(웃음)
(이 답변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강과장은 목표에 중독돼 버린 사람입니다. 자기의 아끼는 제자와 부하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일을 추진하잖아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걔네들을 구해줘야죠. 살려놓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잖아요. 이게 무슨 국가의 존망이 달린 사업도 아니고, 일개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일인데, 거기에 자기 부하들을 그렇게 희생시키면서까지 한다는 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거죠. 선을 구현한다는 의식은 온데간데없고, 그런 애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것만 몸에 밴 사람입니다. 사람이 벌레를 때려죽이는 것과 비슷해요. 벌레가 보이면 거의 습관처럼 죽이잖아요.
박훈정 감독이 집필한 <악마를 보았다> 시나리오를 김지운 감독에게 먼저 제안한 게 당신인 걸로 알고 있어요. <신세계>도 투자가 안 돼서 난항을 겪었는데, 끝까지 기다려준 걸로 알고 있고요. 박훈정 감독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 건가요?
좋아요. 이 사람이 영화를 대하는 생각이 좋습니다. 시나리오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분명하고요. 그런 모든 것들이 괜찮았어요. 그리고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흥행에 참패한 박훈정 감독의 데뷔작) <혈투>(2010) 얘기 하시는 거죠?(웃음)
네. 시원하게 말아 잡쉈잖아요.(웃음) 그런데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물론 손실을 본 분들에게는 맞아 죽을 말입니다만.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창작이 위축되고, 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낙인찍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기회를 줘야죠. 그렇다고 제게 돈이 많아서 자본을 끌어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함께 작품을 하는 거죠. 물론 맹목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작가로서의 영민함이나, 소위 말하는 ‘싸가지’가 없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보이니까 믿는 거죠. 그리고 한번 시원하게 데여봤으니, 이젠 알 거 아니에요. 실패하고 나서도 모르면 문제인건데, 그 과정을 통해서 배운 게 있으니, 그럼 된 겁니다.
박훈정이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면에 매료된 건가요, 재능에 매료된 건가요?
재능이죠. ‘곤조(根性)’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 줄도 못 고쳐. 고치면 끝이야. 당신하고는 안 해!” 이런 프라이드가 대단해요. 그게 좋아요. 그런 친구들이 드물거든요, 요즘. 투자사가 수정하라고 하면 바로 고치는, 현실적응이 너무 빠른 친구들이 많아요. 재수 없어요, 솔직히. 이해는 되지만 젊은 작가들이 그게 뭡니까. ‘곤조’가 있어야 해요. ‘나는 아티스트’라는 마인드가 있어야 자기 색을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설사 과잉으로 표출되더라도,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잖아요. 그 정신! 그 의식! 자기가 쓴 글 한 줄에 목숨 거는 그런 놈들이 많이 나와야 해요. 감독이든 배우든 작가든 간에, 그런 애들이 뭘 해도 하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이 친구가 아집만 있었다면 쳐다보지 않았겠죠. 다행히 열려있어요. 그래서 더 좋은 거예요. 그런 친구에겐 기회를 줘야죠. 아마 이번 <신세계>를 하면서 많은 걸 배웠을 겁니다. 사람들과 작업을 하면서 더 발전해 가는 거고요. 그래서 자꾸 주변 동료들과 뭉개져 어울리고 놀아야 해요. 툭 와서 내 것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어우러지는 게 중요해요. 배우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보기엔 자성이 역할을 이정재가 했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랬을 때 ‘나도 배우인데?’하면서 망설일 필요가 뭐 있어요. 영화는 총력전이잖아요, 총력전. 거기에 무슨 자존심이 내세워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존심. 허세예요. 그건 쓸데없는 감정소모예요. 작품이 좋으면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먼저 정재에게 전화해서 프로포즈를 했죠. “형하고 같이 작품 해 보자, 오케이?”, “오케이!”
이정재 씨가 완성된 영화를 보고, 그때의 전화를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밥 사야죠. 술도 사고. 하하하. 그런데 그것도 자기 그릇입니다. 백 날 프로포즈해도 머리가 나쁘면 못 해요. 기회가 옆에 와도 모르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좋은 배우는 작품을 보는 눈도 갖춰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런데 거기에도 이런 게 있어요. 그것이 기획적인 눈이야, 단지 호불호냐. 저는 호불호가 더 중요해요. 기획적으로 따졌다면 <악마를 보았다>에 출연했겠어요? 제가 4년, 횟수로는 5년 놀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복귀작으로 사람 죽이는 영화를 선택하는 게, 이치적으로 맞느냐 이거예요. 대중들에게 부드럽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데 저는 그런 머리가 없어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는, 그냥 너무 좋았던 거예요. 죄책감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 악마에게 점염돼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남자. 그걸 관객들과 몸서리치게 함께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복귀작으로 선택한 거예요. 진짜 좋으니까 만난 거죠.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내가 좋으니까 사귀는 거지, 안 좋으면 안 사귀잖아요.
항상 호불호로만 작품을 선택하셨을까요? 외람된 말씀인데, 기획적인 마인드로 선택한 적은 없었을까요?
왜 없었겠어요. 저도 사람인데. 하지만 크진 않았어요.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예로 들면, 이걸 기획적으로 잘 선택했느냐 아니냐,는 정신 차리고 나서 따져보는 거죠. ‘가만있어 봐.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연애는 이미 시작됐고. 나는 이미 빠져 있고. 어쩌겠어요. 그땐 믿으며 가는 거죠. ‘완성도가 좋으면 오히려 더 강하게 어필할 수 있겠지’ 라고 믿으며 가는 거죠.
호불호가 중요하다가 하셨는데, 돌이켜보면 잔혹한 영화들에 ‘호’가 작용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것들 때문일 거예요. 제가 착한 영화들, 그러니까 ‘나, 이렇게 착해요’하는 영화들, “너네, 안 울어? 울어 봐!”하는 영화들을 별로 안 좋아해요. 낯간지러워서요.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슬픈 살인마를 봤어요. 잔혹하게 살인한 후에 화단을 가꾼다든지, 눈사람을 만드는 악마의 모습이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거든요. 합리화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살인마가 결코 화성인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실제로도 그렇잖아요. 요즘 터지는 대형 사건들을 보면, 범인이 다 옆집 아저씨고 옆집 삼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평범해 보이는 사람에게 내재돼 있는 악마성. 그런 것들에 제가 끌리는 것 같아요. 단지 수단이나 폭력에 집착하는 게 아닌, 그 이면의 정서에 끌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럼요! 그건 사람이 아니므니다!(일동 폭소) ‘갸루족’이 되는 거죠, ‘갸루족!’ 으하하하.
이자성의 심정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성의 입장에서, 자신이 속여야 하는 정청은 본인을 믿어주고, 자신이 믿고 있는 강과장은 도리어 본인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황. 그걸 보면서 이 영화가 욕망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약간 돌려서 하면, 많은 사람들이 최민식이라는 배우를 믿고 따르는 걸로 압니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에 부합하려 신경 쓰시나요?
그런데 저는 사람에게 큰 기대를 안 합니다. 선배들 말씀, 틀린 게 하나 없어요. 내가 주는 게 편하지, 뭘 받으려고 기대하면 그게 상처고 그게 스트레스에요. 물론 말하는 것처럼 쉽지는 않죠. 저도 은연중에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나만 괴로우니까.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이 작업도 결국 인간관계에서 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작품은 ‘쌈마이’로 만들어놓고, 인간적인 걸 내세워 술만 퍼 마시는 거?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것만큼 무식하고 가식적인 건 없어요. “우리, 다음번에는 꼭~?” 천만에요! 작품이 망해 봐요. 얼마나 썰렁해요. 술도 함께 안마시게 돼요. 거기에서 무슨 인간적인 걸 찾아요. 그건 가식이지.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거기에서 서로가 성취도를 공유하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오래 가죠.
술도 괜히 더 마시게 되고요.(웃음)
그렇죠. 설사 ‘싸가지’가 없어도 말이죠. 우리는 취미생활로 연기 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인간적인 걸로 뭉개고 들어가는 건 아마추어죠.
이경규 씨와 언젠가 영화를 함께 할 거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건 정말, 언젠가 할 겁니다. 그럼요. 그런 걸 빈말로 하면 안 되죠. 더군다나 선배한테. 제가 그 형님을,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았잖아요? 영화에 대한 생각이 그 형님도 참 좋아요. 그리고 영화를 너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역시 그런 건 있어요. 작품이 좋아야 해요. 의리 때문에? 선배니까? 그럼 같이 망하는 겁니다. 형님과도 술 마시면서 얘기 했어요. “형, 대신 나는 작품이 좋아야 해, 내가 마음에 들어야 해.” 그랬더니 “알았어. 그럼 내가 시나리오를 몇 개 써 볼게. 네가 마음에 들면 골라. 마음에 안 들면 할 수 없는 거고.”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같이 논의하면서 만들 거예요.
최민식-황정민-이정재. 많은 사람들이 최상의 조합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건 모르죠. 지금의 조합도 좋긴 하나, 멤버들을 다르게 바꿔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겁니다. 그럼 또 다른 ‘신세계’가 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와 있는 프로페셔널 한 배우들이라면 각자 자기 색을 낼 테니까요. 가령 강과장을 백윤식이 했다면, 정청을 설경구나 송강호가 했다면, 자성을 정우성이 했다면. 또 누가 있을까요?
에이, 그 친구들은 너무 야리야리하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이에 맞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재에게 자성을 권유했을 때 제가 그랬어요. “너, 올해 몇 살이냐?” 마흔이래. 그럼 됐다 싶었어요. 그 정도는 돼야 사내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갑자기 마흔 이전의 남자 최민식 인생이 궁금해지네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저는 행복한 놈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니까. 제 나이가 올해로 51이에요. 적은 나이는 아니죠. 51년을 살면서 다른 일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직장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사업이라는 걸 해 본 적도 없어요. 학교 다닐 때 알바 했던 거? 그거 야, 뭐. 그냥 이거예요. 오로지 연기만 했어요. 이게 제 유일한 생계수단이고요. 앞으로도 그럴 테죠.
메소드 연기가 각광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전반적으로 힘을 빼는 연기들을 하는 것 같아요. 당신 역시 <신세계>에서 이전보다는 힘을 누르는 모습인데요.
나이가 들어서 힘을 빼는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곡에 따라 연주할 뿐이죠. 예를 들어서 발라드다! 발라드인데, 격정적으로 춤을 출 수는 없잖아요. 록인데 발라드처럼 ‘맥아리’없이 부를 수 없고요. 곡에 어울리는 악기와 연주법이 다 있는 거죠. 오케스트라로 하느냐 피아노로 하느냐 현악 4중주로 하느냐를 초이스 하듯이, 연기패턴도 마찬가지예요. <올드보이> 같은 경우는 록에 가까운 영화였기 때문에 그에 맞는 뜨거운 연기를 했던 겁니다. 제가 <올드보이>나 <악마를 보았다> 처럼 센 것들을 많이 해서 강렬한 연기를 하는 배우로 보시는데, <꽃피는 봄이 오면> 같은 잔잔한 드라마도 있었잖아요.
한동안 충무로에는 다른 배우들이 쉽게 넘지 못하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한석규라는 높은 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 두각을 드러내는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위협보다는 연기대결을 펼칠 후배들이 많아진 걸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좋죠. 당연히 좋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럼 어쩌겠어요. 다 쓰러뜨려요? 같이 먹고 살아야지.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은 아니죠. 배우 층이 두터운 건 정말 행복한 겁니다. 외국을 봐요. 하다못해 길 가는 단역들도 연기를 잘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도 오디션을 봐서 뽑아요. 그럼 영화 전체적인 퀄리티가 높아지죠. 그리고 좋은 동료들이 옆에 있으면 긍정적인 자극이 됩니다. ‘내가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려야겠다’ 싶어지죠. 그건 굉장한 시너지예요. 작품의 퀄리티가 달라지니까요. 이런 경쟁은 아주 건강하다고 봅니다. ‘쟤는 저 차를 타고 다니니까, 나는 이 차를 타야지’ 하는 그런 쓸데없는 경쟁보다 얼마나 좋나요.
내 것만 보면 안 돼요. 그러면 어긋나게 돼 있어요. ‘어떻게든 내가 존재감을 보여야지?’ 하는 건 정말 위험한 발상이고, 아마추어적인 생각이에요. 배우도 연출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영화가 담고 있는 색깔, 냄새, 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 모든 걸 큰 틀에서 봐야 해요. 그러면서 내가 이런 것들과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느냐를 살피는 거죠. 그런데 사실, 이건 기본적인 거예요. 작품분석은 배우들의 기본이에요. 연출가에 버금가는 해석을 지니고 있어야 연출가와 무슨 얘기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기본인데, 그 기본이 안 갖춰진 후배들을 보면 아쉽겠네요.
그런데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흔히 아이돌 가수 출신들에게 ‘발연기’라고 그러잖아요? 그건, 그들 주변에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걔네들이 나쁜 게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스템의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기획사에서 “애를 이번 드라마에 꽂아야 해. 이걸 하면 떠!”라고 한다? 아니, 기본적인 소양이 안 돼 있고 연기 패턴도 모르는데, 뜨긴 어디로 떠요. 연기를 가르치면서 뜨게 해야지. 속된말로 가르쳐주면서 팔아먹어야지, 투자는 안 하고 팔아만 먹으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은 얼마나 혼란이 되겠어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경쟁에 내몰렸는데. 활로를 못 찾는데. 자신에게 쏟아지는 ‘발연기’라는 ‘악플’을 보면서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받겠어요. 그래서 그들을 욕할 게 아니라 어른들을 욕해야죠. 그런 면에서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예요. 정말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웠으니까요.
SBS <힐링캠프>에 함께 나오셨던 은사님?
네. 동국대학교 안민수 선생님. 마치 육군사관학교 같았어요. 아주 엄격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많이 혼났던 게 뭐냐면, “술 퍼 마시고 다니지 말아라!”였어요. “무용이나 운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그토록 아끼는데, 하물며 피아니스트들은 자기 손가락이 다칠까봐 보험까지 드는데, 왜 배우 네놈들은 연습한다고 술 처먹고, 비 온다고 술 처먹고, 눈 온다고 술 처먹느냐. 왜 너희들 몸을 혹사시키느냐. 너희의 몸이 악기이고 표현의 도구인데 왜 이리 막 사느냐” 하는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연습시간에 지각하거나, 술 냄새가 나면 진짜 무섭게 혼났죠.
어떤 선생님은 “배우가 연기를 하려면 술 한 잔은, 할 줄 알아야지” 하면서 권한다고 하던데요.(웃음)
창작하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우리 안 선생님은 절대! 절제된 이성과 자기 절제를 굉장히 강조하셨죠.
당신이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어떨까요?
저는 양면을 살~짝 섞어서.(좌중 폭소) 우리가 또 나무 팍팍하게 살면 그렇잖아요. 으하하하.
운명 같아요.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운명이라 느꼈습니다. 왠지 내가 그 분을 풀어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풀어드려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음. 이건 저만의 해석인데, 그분을 내 몸을 통해 보여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예요. 그분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살아온 인생들을 말이죠. 그걸 제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순신이기에 그런 생각인 든 걸까요? 다른 위인이었다면 달랐을까요?
글쎄요. 이순신하면 우리나라 대표 히어로잖아요. 그런데 <난중일기>를 읽으면 생각이 달라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슈퍼맨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나약한, 우리와 진배없이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는 인간이에요. 그런 인물이 외로움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 그게 이번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겁니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닿고 싶은 ‘신세계’가 있다면, 어떤 세계일까요?
무엇보다도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좋은 작품이라는 건 기준이 객관적일 수 없죠. 만인이 좋아한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인 것도 결코 아니고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 제가 미쳐서 빠져들 수 있는 작품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제겐 ‘신세계’예요. 그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