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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지 않는 역사에 일침을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
2009년 3월 20일 금요일 | 하성태 이메일


개봉을 앞두고 <워낭 소리> 덕 좀 보냐는 얘기 많이 듣겠어요.
그럼요. 이 판을 모르는 분들이 너도 그렇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죠(웃음). 근데 저 뿐만 아니라 독립영화 감독이 다 그럴 거예요. 항상 하던 대로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최근에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저는 예전에도 꾸준히 해 왔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않아요.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일단 재미있고요.

베를린영화제도 다녀오셨죠? 원래 성향이 정치적인 영화제라 무척이나 반겼을 것 같은데.
베를린이요? 그래서 아마 제 영화를 초청한 거 같아요.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니, 좌우익이 됐건 인종 간의 문제가 됐건 갈등이나 반목이 있는 나라가 <할매꽃>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베를린은 호의적인 반응이었어요. 근데 약간 손님 받아주는 느낌 있잖아요? 박수쳐 주면서 ‘감사합니다.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그런 느낌. 이스라엘이나 두바이도 갔었는데 그 쪽 사람들은 질문 자체가 진지했어요. 특히 이스라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친미주의자들 말고 이스라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이스라엘 아모스 지타이 감독을 인터뷰 했을때도, 한국이 분단국가라 이스라엘 상황을 잘 이해할 거란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레이션 목소리가 아주 좋으세요. 영화 볼 때도 느꼈지만.
하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먹고 살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잖아요? 그건 돈 벌기 위해서 빨리 끝내야 하는 짧은 작업이거든요. 설명이 잘 안되는 건 나레이션으로 해치워야 해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근데 <송환> 보셨죠? 그거에 비하면 제 나레이션은…. <송환>은 여러 번 봤지만 정말 대단한 나레이션인 거 같아요.

그에 버금가는 좋은 나레이션이던데요(웃음). 본격적으로 <할매꽃> 얘기를 해 볼게요. 제작노트를 보니 2001년 11월에 작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그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둔 건 가요?
그렇진 않아요. 그때 돌아가신 것뿐이고, 제가 그 분 일기장을 발견한 건 2003년이에요. 그때 제가 결혼을 했는데, 집에서 물건 정리를 하다가 일기 박스를 발견했어요. 원래 엄청 많았는데 어머니가 다 태우고 하나만 유품으로 남겨뒀데요. 무섭기만 했던 작은 외할아버지였는데 우연히 그걸 보고 놀랐죠. 황당하면서도 이게 뭘까 궁금했었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고, 점점 더 알게 되면서 작업을 해 봐야지 생각한 거죠.

그럼 구체적으로 준비한 건 언제에요? 가족 인터뷰부터 바로 시작한 건가요?
2003년도에 사전 조사 겸 찍은 화면도 있지만 화질이나 소리가 좋지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찍은 건 2005년이고요. 원제는 <밤손님>이었어요. 부제가 <중고등학생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 빨치산 교과서>고.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총 맞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큰 오빠 얘기를 집중적으로 찍었어요. 그리고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것들도.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기획 전체를 다 바꿨죠. 외할머니를 중심에 두고 나머지를 곁가지로 풀어보자고. 물론 <밤손님>도 외할머니 위치는 크지만 지금처럼 정중앙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았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 그들도 인간이었고, 국가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젊은 친구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를 보면 어머니가 굉장히 많이 응원해 주신 것처럼 보여요. 그래도 가족들이 만류하진 않았는지 궁금해요.
외가 쪽에 민주적인 분들이 많으세요. 어떤 분들은 그게 ‘빨치산의 피’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요. 그 분들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가 있어요, 가풍처럼(웃음). 그래서 대부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어요. 1세대들이 걱정하는 건 그런 거죠. ‘우리는 피해 볼 거 다 봐서 상관없는데, 니들이 걱정이다, 정권 바뀌면 너희 새끼들은 어떻게 할 거냐. 평생 이 이야기가 따라 붙어 굴레를 씌울 거다.’ 그런데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도 카메라 들이대면 다 얘기해 주세요. 특히 할머니 세대는 영화로 기록하는 것 자체가 속 얘기를 풀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안타깝기도 했고요. 얘기하면서 마음을 풀고 우는 모습에서 이런 경험들이 없었구나 싶었죠.

아무래도 당시는 촬영 당시는 노무현 정권이다 보니(웃음). 당시 분위기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거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잖아요.
그 분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역사의식은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다시 사람들 잡아가고, 용산 참사도 일어났잖아요.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은 진짜 맞아요. 전 우리 할머니가 용산에 있었고, 우리 할머니가 미네르바와 똑같다고 생각해요.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정말 되풀이 되고 있는 거죠.

참 무서워요. 저도 대학 새내기 때 10여 년 뒤에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러게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반성하지 않은 역사. 전두환도 마찬가지고 박정희도 마찬가지고요.

상대, 중대, 그리고 하대 마을의 반목은 취재하며 알게 된 건가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풍동 마을은 영화 속에서처럼 반발도 있었을 거 같고. 그게 또 대비되는 효과도 있었겠지 만요.
전라남도 영암에 그 쪽 지역 구술사가 정리 된 것이 있더라고요. 영화를 찍고 나서 나중에 알았는데, 그 쪽에 상대, 중대, 하대란 마을 이름들이 많아요. 대부분 상, 중대가 좌익을 하고, 하대가 우익을 했는데, 또 그와 반대인 마을도 있고요. 대부분 다 하대가 이름을 바꿨더라고요. 어감도 그렇지만 자손들 때문에 그 느낌을 바꾼 거죠. 깜찍 놀랐어요. 아직까지 그런 계급, 이념 갈등 때문에 복수에 의한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더라고요. 그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큰 장벽이 있는 거죠. 사실 지금 화면들은 제가 멋모르고 찍은 거예요.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면 제대로 찍지 못했을 것 같아요.

상대, 중대 어른들은 어땠나요?
사실 상, 중대 분들은 조금 위선적이라고 느꼈어요. 길가다가 인사도 하고 품앗이도 하고 그러는데, 또 뒤에서는 안 좋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하대 마을이 더 쉽게 접근을 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 좀 해 주세요, 하면 손자뻘이니까 무슨 얘기를 못하겠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 이게 그 분들한테는 절대 화해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더라고요. 그래도 삶의 혜안 같은 것들이 다 있으니 충분히 극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영화에서 화해를 이야기했지만, 촬영하면서도 1세대가 화해할 수 있는 길은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궁금한 건 차라리 다음 세대 이야기였어요.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들은 치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이념도 이념이지만 계급 문제가 덧 씌어져서 더 그런 것 아닐까요?
정말 깊어요. 전라도나 시골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또 전부 피해자일 뿐인데 자기들 몫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요. 또 누구하나 사과하지 않고, 또 화해할 할 수 있는 장도 마련되지 않으니 안타깝죠.

반면 재미있던 점은 어머니나 이모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할머님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래도 서운한 부분도 있었을 거 같은데(웃음).
거짓말 같이 이모들이나 삼촌들이 생각하는 모습은 다 존경이에요, 존경. 삶 자체를 존경하는 거죠. 근데 우리 첫째 딸인 어머니는 할머니가 너무 대책 없이 퍼주는 걸 좋아하셔서 살림을 못했대요.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왜 남들만 왜 퍼주나 싶어 너무 화가 났던 거죠.

아무래도 장녀니까.
동생들을 챙겨야 되는 입장이니까요. 할머니는 진짜 그렇게 사셨어요.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데, 전 할머니가 뭘 드시는 보습을 본 적이 없어요. 항상 자식들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손자들만 먹이시고. 제가 보기에는 천사였어요(웃음). 성격도 자기 지조가 있고 대쪽같으세요. 그 안에 온화함과 선함이 느껴졌어요. 자기 한은 안으로만 삭이시고. 안타까웠지만 제가 영화를 끝까지 할 수 있게 한 힘은 그 할머니가 자식들 몰래 새벽에 막 뛰어다니시는 모습이었어요. 작은 외할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재개 하고 교회 종을 치고. 그 장면이 저한테는 너무 힘든 이미지면서도 제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그 선홍 빛 이미지가 <할매꽃>의 전체 이미지인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아니었나 싶고요.
어떤 분들은 너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라고 하는데 일견 동의해요. 하지만 어떤 정서들,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전달해주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애니메이션에 만족하고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준 친구가 공감도 해주고, 기획도 같이 하면서 몇 년을 도와줬는데 돈도 못줬어요(웃음). 너무 고맙죠.

개개인에 따라 이해 정도가 다르겠지만, 연좌제도 큰 챕터를 할애하셨어요. 그 부분도 가족들에게는 쉽지 않은 부분일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원래 연좌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할 예정이었어요. 지금은 한두 가지 사례만 있고 거의 빠진 거죠. 어머니세대 기억으로 연좌제는 이미 그냥 생활인거에요. 여전히 억울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때 그랬다(웃음).

한번 걸러진 느낌?
어머니는 일부로 숨긴 게 아니라 말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세요. 이미 체화돼서 더 이상 크게 아프지가 않은 거죠. 교사였다 농촌에 계신 큰 외삼촌 인터뷰할 때 뭉클 한 게 있었어요. 제가 손자뻘이니까 힘드셨죠, 얘기 좀 해 주세요 그랬어요(웃음). 처음엔 힘든 게 뭐가 있었겠느냐 그러다 혼자 앉아서 중얼거리는 걸 찍은 거예요. ‘아휴, 삶이 진창이 됐지’ 라는 말씀이 한참 후에 카메라에 잡혔어요. 그 분들도 평소엔 담담하지만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한 과거인 거죠.

결과적으로는 다들 이겨냈으니까요. 지만원 같은 사람이 나쁜 거죠. 그런 걸 또 들쳐 내는.
네, 리뷰에 그 표현 너무 좋았어요. 관객과의 대화 때도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왜 굳이 그 분들의 아픔을 들춰내느냐, 그건 잘못된 행동일 수 있다. 어머니나 할머니 얘기, 연좌제나 마을 얘기, 그리고 일본까지 가서 왜 그러느냐(웃음). 좋은 뜻으로 얘기를 한 거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웃음). 화풀이 밖에 안 되잖아요. 은연중에 떠올린 목적은 이거 같아요. 국가의 폭력에 의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특히 국가 보안법은 아직도 있잖아요. <할매꽃>도 말만 하면 걸려 들어갈 만한 영화고. 그런 상황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한 과정인 거죠. 물론 제 가족 구성원이기 때문에 감정적일 수 있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중요한 건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거죠.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쪽이 다른 한 쪽에 폭력을 행사하는. 그래서 더 현 상황에서 <할매꽃>이 유효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위선적이었던 노무현 정권 때는 전선이 잘 안 그어 졌잖아요(웃음). 그래서 오히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 실천적인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이 시기에 더 많이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은.

한 편으로 조총련이나 우리 아픈 역사를 다룬 <디어평양>과 감정 세기는 다르지만 토픽은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2007년 바로 개봉했으면 감흥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디어 평양>이란 영화 정말 좋아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큐멘터리를 이렇게 잘 만들 수 있구나 싶고, 단 한 컷도 군더더기 없는 훌륭한 영화에요. 개봉하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요(웃음). 그래도 개봉을 위해 영혼을 팔아서까지 검열을 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어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개봉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고요. 시기는 중요치 않습니다(웃음). 요즘 진짜 숨이 막히잖아요. 한 템포 쉬어갔으면 좋겠어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시대라는 것이 모든 걸 상품 가치로 평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할매꽃>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우리를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할매꽃>은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많이 상기시켜줘요. 특히 조총련 간부였던 삼촌 이야기를 다룬 일본 분량은 의미가 역사적으로 크게 확장된다는 느낌이라 좋았어요.
일본 분량은 보충촬영이었어요. <밤손님>때 편집단계에서 이야기가 너무 안 풀렸거든요. 일본의 삼촌들을 만나면 어떤 전환점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죠. 보충 촬영의 느낌으로 간 건데 가서 많은 더 사건을 알게 됐고요. <우리학교>도 그렇고 재일조선인에 관련해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니 가풍도 느껴지고 다른 식으로 접근하게 됐어요. 일본에 살았던 할아버님은 정말 가족들 때문에 한국에 오고 싶어하셨어요. 그런데 혹시나 북한에 갈 때 문제가 될까봐 못 들어온 거죠. 또 가난하게 살았는데도 돈 모아서 북에 있는 떨어진 가족에게 다 보냈고요. 진짜 눈물나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역사나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남과 북, 일본의 둘레, 역사적인 공기, 그 속에 살았던 민초들의 모습이 보이는 거죠.

실제 경험하지 않으면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왜 귀화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잖아요.
그들이 성장하면서 당했던 차별들이 깡다구로 작용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할매꽃>이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일본도 그렇지만 마을 이야기만 해도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 있고요. 어떤 분들은 이 많은 아픔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편집하면서는 다시는 가족에 대한 다큐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이걸 지금 안 하면 언젠가는 다시 해야 되잖아요. 그게 저한테는 큰 부담이었어요.

어차피 해야 될 얘기니까 제대로 이번에 하자?
그게 아니라 일단 끝내자는 심정이었죠. 처음 편집을 하니 딱 8시간이었어요. 더 이상 못 줄이겠더라고요.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줄였죠. 그런데도 우격다짐이나 무리수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너무 촘촘하게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래서라도 털고 싶었죠. 만약 다시 가족 이야기를 만든다면 일본 이야기를 싶어요.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일까 하는 가치를 생각하게 하니까요. 그만큼 강렬한 이야기였어요.


마지막까지 어머님이 친구(외할머니의 오빠를 총으로 쏴 죽인 경찰은 문정현 감독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다)분과 만나서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잖아요. 감독님이 그렇게 권유를 종용하는 것도 가혹해 보일 수도 있는데요.
어머니가 참 민주적이세요. 예를 들면, 충분히 친구와 얘기할 수 있고 마무리까지 잘 해주겠다면서 너무 적극적인 거예요. 근데 갑자기 어머니가 안 되겠다고 한 거죠. 그게 궁금했어요. 나 같으면 어떨까. 그렇게 자신했던 어머니가 왜 그럴까. 전 촬영 할 때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결말이나 어떤 목적을 의식한 건가요?
그렇진 않았어요. 드라마의 한 축보다는 그냥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거죠. 영화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 자체가 넓어진 거 같아요. 그 전에는 경직되고 한쪽에서만 한쪽을 바라봤다면, 좀 더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죠. 이게 절대 타협이라 생각하진 않고요. 예를 들어 아버지는 저에게 극복의 대상이었어요. 답답해서 대화도 별로 해 본적도 없고요. 그런데 영화를 찍으면서 저분이 가진 경험에 의한 논리를 보니 최소한 이야기는 해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든 거죠. <밤손님>은 철저히 좌익의 입장에서 우익을 바라보고 싶었거든요. 독립영화라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어야 되고 또 이야기할 메시지나 주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반면 <할매꽃> 같은 경우는 영화를 끝내놓고 그게 무의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변해가는 과정이 영화에 나오잖아요? 그게 진짜에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아픔들은 어떻게 얘기해야하지? 그렇다면 화해라는 무언가 관객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거죠.

아버님과의 대화를 언급했는데, 부모님께 국가 보안법, 주한미군과 같은 첨예한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많이 웃더라고요.
평생을 한 이불 덥고 자는 사람도 생각이 그렇게 다르지만, 또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이 사회는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잖아요. 너무 웃긴 거 같아요. 또 이 배척이 너무 정치적이고 정략적이고. 국가 조직 시스템의 문제인거 같아요. 한 쪽 시각으로만 재단해 버리는 것도 분명 폭력이고요.

할머님의 임종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굉장히 담담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다들 호상이라고 얘기해요. 몇 년째 누워계시다가 며칠 곡기를 끊으시고 돌아가셨거든요. 워낙 대가족이고 오랜만에 모이는 거라 다들 분위기가 좋았는데 저만 많이 울었어요. 그런 게 있더라고요. 가족들은 할머니와 1대1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가족들을 다 만나면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온전히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만 우니까 가족들이 ‘쟤, 왜 저래 그러고(웃음).’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사람이 죽기 전에 귀는 꼭 들린다고 하던데, 할머니께 제가 해드린 일본 이야기는 그건 꼭 들었을 거라 생각해요. 또 카메라를 들고 할머니께 고생하셨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그때 거짓말처럼 그 말을 들으시고 할머니 숨소리가 엄청 거칠어지셨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때 카메라를 흔들지 않은 제가 대단한 놈 같아요(웃음). 마음속으론 엄청 놀라고 충격적이었는데, 제가 카메라는 들고 있더라고요. 할머니가 영화는 못 보셨지만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사실 저한테 더 큰 힘이 됐죠. 가시는 길에 그런 얘기를 해서 참 좋았다 싶은.

가족들은 완성된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1년 전에 가 편집 비디오를 보여드렸는데 정말 반응이 없더라고요(웃음). 고생했다, 이 정도? 어머니는 처음에 제가 재능이 없다고 했었어요. 우리 집안에는 끼가 별로 없다고.

엔터테이너 기질이 별로 없다?
네. ‘봐라, 이런 얘기가지고 영화를 찍는다니 무슨 감독을 하겠냐.’(웃음) 우리 세대에 이정 도 얘기 없는 집안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진짜 재미없는 영화가 될 거라고 했는데, 영화 보고 나서 첫마디가 ‘우리 집에 이야기가 조금 있긴 있구나’ 하면서 좋아하셨어요.

이제 예전 애기 좀 해 볼게요. <할매꽃>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니 학생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 질문은, 대학 때 운동권이지 않았을까 하는(웃음).
운동을 하려고 들어갔는데, 다 끝났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제가 좀 어려요. 94학번인데요. 전라도 광주 출신인데 고등학교 소풍 때 민중가요도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다 <상계동 올림픽>을 봤는데 너무 강렬했어요. 그때 이후로 카메라를 들고 싶었죠. 하지만 전 지금도 영화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거창하지만 제가 원하는 사회적, 정신적 진보를 이룰 수만 있다면야. 그렇다고 영화 한편으로 세상이 바뀌진 않지만요. 등치도 있고 카메라를 잘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푸른영상’에 들어갔죠.

그럼 지금 어린 시절 꿈을 이룬 건가요?(웃음)
제 평생의 영화지만 너무 많은 분들이 <상계동 올림픽> 이야기를 해서(웃음). 김동원 감독님도 그러더라고요. 다큐멘터리는 죽을 때까지 배우는 거라고. 근데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제 작업들을 통해 세상을 배웠거든요. 또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고. 그게 참 매력적인 거 같아요.

평소에는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극영화도 엄청 좋아해요. 요즘도 하루에 한 편 이상은 봐요. 작가들이 만든 영화들 있죠? 최근에 본 건 테오 앙겔로플러스. 요즘 주제 하나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작가들의 영화들을 묶어서 보는 게 취미에요(웃음). 예를 들면, 고다르 영화를 쭉 보고 그 감독이 얘기하고자하는 철학이나 소재를 선택 하는 방법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스스로 기획전을 하시는군요(웃음). 그럼 극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도 들겠어요.
솔직히 구분은 안 해요. 다큐도 어차피 감독의 이야기고 촬영이고 편집이기 때문에요. 요즘 다큐는 좀 더 극영화 쪽으로 가고, 극영화는 다큐 쪽으로 가려고 하잖아요. 전 서로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딱히 구분은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워낭소리>에 관한 요즘의 양상이 재미있는 거 같아요. 일부러 극영화 같은 부분을 강조했는데, 또 그에 대한 지적도 만만치 않았잖아요.
사실에 대한 선입견들이 있잖아요. 다큐는 사실일거라 접근하니까요. 조심해야 될 부분이죠. 전 다큐멘터리가 제작 윤리 때문에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항상 칼날 위에 서 있고요. 다큐는 윤리나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더 중요해서 매력적인 거 같아요.

표현은 다르지만 전 진정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 본인들이 촬영을 해나 가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현장에 서 있지 않는 다큐는 죽은 다큐라고 생각해요. 어떤 실험이나 형식들 다 좋지만, 분명 현장을 담으면서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다큐는 고민을 던져 줘야지 완결이 되면 힘이 빠지는 거 같아요. 시대를 고민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다큐고 또 극영화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영화의 의무고 또 제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고요.

독립 영화를 계속 해 온 감독으로써, <워낭소리>도 그렇고 요즘 영화진흥위원회의 행태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요.
영진위의 행태를 보자면, 지원사업도 다 끊겼잖아요. 독립영화에 ‘독립’도 빠지고 전용상영관도 유야무야되고. 사실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원을 안 해줘도 영화해요. 신념과도 같은 거니까. 그런데 우리는 권리를 얻어 낸 건데 그들은 수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국민들이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세금을 낸 거잖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권리인거죠. 근데 이걸 경쟁해서 따내라는 혹은 <워낭소리>처럼 잘 만들면 많이 본다는 건 해괴망측한 논리죠. MB처럼 친자본주의적이고, 친시장주의적인 논리인거죠.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인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모두가 경제, 생존을 위한 희생을 요구하는. 어이없죠.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의 지평들을 넓혀놨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조심스럽게 분석을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독립영화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됐지만, 이게 독립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 지평이 확 줄어들거든요. 일시적인 현상이고 거품 빠지면 제 자리를 찾아 갈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그 전보다 높은 단계가 될 거고. 독립영화는 묵직함과 진중함이 미덕이잖아요. 대중과의 소통에 대해서는 <워낭소리>를 분석하면서부터 시작해야 될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차기작을 여쭤봐야 될 것 같네요.
독립 영화가 한 번 찍기 시작하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벌려 놓는 스타일에요. 하는 이미 편집 중이고, 또 촬영하고 있는 것도 있어요. 또 다른 기획도 있고.

욕심쟁이신데요? 차근차근 들어볼게요.
사실 이런 사람이 힘은 없어요(웃음). 하나는 예전에 찍었던 <슬로브핫의 딸들>이란 작품의 두 번째 이야기에요. 내용은 이 사회에서 시민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아직 유효한가, 아니면 기층 운동에 걸림돌이 되는 부르주아 운동인가.

소위 말하는 NGO?
친자본주의적이고, 풀뿌리 운동이라고는 하는데, 회원은 잘 보이지 않잖아요. 과연 올바른 운동인건가. 또 다른 기획은 제 개인사인데요. 몇 년 간 본 영화 중 최고인 <파산의 기술>에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용산 참사를 보며 사람들이 더 이상 운동하지 않는다고 느꼈거든요. 1991년에도 학생들이 분신을 많이 했는데 이번 용산 참사도 분신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역사는 철저히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풀이돼요. 그래서 현장에서 아직까지도 싸우는 분들을 조명하면서 제 사적인 기록을 넣으려고요. 제가 광주 출신이라 5.18 광주 항쟁도 얘기하고, 우리 위 윗집에 살았던 이한열 열사에 대한 기억, 그리고 현재 용산 참사까지. 그런 걸 쉽고 재미있게 찍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역시나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이야기가 되겠네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큐를 선택한 것도 광주 얘기를 하고 싶어서거든요. 아직 광주항쟁과 관련된 제대로 된 다큐가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맛 배기로 걸쳐서 얘기해보고 싶어요.

광주를 다큐멘터리로 찍는 건, 분명 이야기해야 할 주제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이야기에요. 우리 집이 당구장을 했는데 전과자들이 노는 별들의 전쟁이었어요. 무서운 곳이었죠. 전 삼촌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광주 항쟁이 터졌을 때 그 분들이 다 시민군으로 합세했어요. 그런 건 사적인 기억인데 조합이 잘 되면 큰 역사가 보일 거 같아요. 또 하고 싶은 건, 그 당시 정말 철저했던 운동꾼들이지만 더 이상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제가 다니던 학교가 대학 부속고등학교였는데, 그때는 밤마다 쇠파이프를 가지고 산에 가서 연습을 했거든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다 국회에 들어갔잖아요. 5월 항쟁 기념행사도 매년 하고. 그 사람들이 너무 위선적으로 보여요. 그 사람들은 왜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을까, 누가 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줬을까, 누가 전두환을 용서하라고 했을까. 하지만 무겁지 않을 거예요. 나오는 캐릭터가 다 재미있거든요.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촬영은 이미 시작했나요?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니까. 촬영은 언제까지 할지 해봐야 알겠지만, 이미 시작은 했으니까. 오늘도 황사를 찍고 있어요. 이 황사같이 같이 찌푸린 한국 사회를.

2009년 3월 20일 금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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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mo
잘봤습니다   
2010-04-11 14:13
ninetwob
잘보고갑니다   
2010-01-22 02:11
taijilej
꼭 봐야겠어요!   
2009-04-21 21:17
hyosinkim
기대되네요   
2009-04-13 13:48
egg0930
기대합니다   
2009-04-06 03:34
okane100
할매꽃 꼭 볼께요   
2009-03-30 17:11
gkffkekd333
장르가 다큐멘터리인가봐요..   
2009-03-23 20:45
skdltm333
저두 기대됩니다..   
2009-03-2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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