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교주, 다산의 상징 ‘출산드라’로 주목 받은 게 2005년이니 벌써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김현숙’하면 다들 출산드라를 떠올리는데요. 이름을 알린 캐릭터니까 고맙긴 하지만 그 이미지에서 빠져나오고 싶을 때는 없나요?
세상에 김현숙이란 사람을 알리게 해줬으니 토를 단다면 배은망덕이 아닐까요? 하지만 동전의 양면이랄까? ‘출산드라’를 한 게 불과 8개월간이거든요. 짧다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는데 워낙 캐릭터가 강하다 보니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각인이 되어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제가 그래요. 나중에 비석에도 ‘출산드라 김현숙 잠들다’라고 쓰여 있을 것 같다고. 당연히 좋은 점이 더 많지만, 사람들이 선입견을 갖고 보니까 그건 살짝 불편하죠. <미녀는 괴로워>를 할 때도 분명 ‘출산드라’인줄 알고 캐스팅 한 제작진이 정작 편집할 때 보고 “재 누구냐. 연기 좋다.”라고 했대요. 하지만 영화든 코미디든, 무엇이 되었든 열쇠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차별화 되게 연기하는 건 제 능력이고, 제 숙제고, 어쨌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감사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아요.
출산드라 때 역할에 맞게 머리를 부풀리고 과장된 의상을 입어 좀 더 부하게 보이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손동작을 보며 손이 참 섬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보니 손은 물론 콧선도 날렵하고, 예쁘고 섬세한 면이 참 많아요. 한때 ‘사모님’의 김미려가 변신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그런 유혹을 받은 적은 없는지요.
<개그콘서트>를 하면서 철저하게 연기라고 생각하고 했고, 영화 <미녀는 괴로워>와 시트콤 tvN <막돼먹은 영애씨>를 거치면서도 그때마다 항상 그 캐릭터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만 했어요. 그러니 아름답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건 죽일 수밖에 없었죠. 작품을 무턱대고 고르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충실할 자신이 있는 작품을 선택하거든요. 내 스스로가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한 거지, 남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흔들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저도 여자인지라 날씬하고 예뻐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근데 지금 맡은 영애씨 역이 체구가 있어야 되는 역이잖아요. 어느 날은 살이 갑자기 많이 빠져 감독님이랑 스텝들이 저의 체중감소로 긴급회의까지 연 적이 있어요. 더 이상 살 빠지면 절대 안 된다고 엄명을 놓으시더라구요.(웃음) 살 찔까봐 걱정하는 여배우는 많아도, 저처럼 살 빠질까봐 걱정하면서 사는 여배우는 정말 드물걸요.
카리스마 넘치는 개그우먼에서 영화 <미녀는 괴로워>와 시트콤 <막돼먹은 영애씨>를 통해 이젠 연기자 김현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미녀는..> 이후 ‘친구’ 역할 제의가 꽤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 ‘친구’에 어울릴 법한 인물이 <막돼먹은 영애씨>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영애씨는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가진 거에 비해 축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누구나 이 바닥에서는 다들 열심히 하거든요. 누구나 욕심도 있고. 하지만 이 직업의 특성상 내가 원한다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김현숙’은 몰라도 ‘출산드라’와 ‘영애’라면 다들 아니까, 이건 분명한 행운이죠.
<막돼먹은 영애씨>만큼 막장 요소가 빠진 드라마도 드물지 싶어요. 그냥 실제 가족과 직장에서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니까. 하지만 영애의 러브라인은 판타지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직장에서 두 꽃미남의 대시를 받는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니까. 현숙씨 본인이라면 어떤 쪽에 더 끌리시나요. 어렵네요. 둘을 적당히 섞어 놓으면 좋은데.
저로 말하자면 결혼할 상대로는 장과장이 낫지 싶어요, 어쩐지 코드가 통할 것 같거든요. 제가 이해영과 최원준이란 배우를 개인적으로 접해 보기 때문일까요? 묵직하고 말 없는 이해영씨에게 더 끌립니다. 극중 영애에게도 장과장이 더 바람직할 거 같고요. 겉으로 보면 엄청 고리타분하고 썰렁하긴 해요, 그쵸?
주변 사람들이 영애씨를 함부로 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더군요.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남들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시는 건 특히 속상하더라고요. 아무리 딸이라지만 너무 심하지 않나요? 키워보면 자식도 좀 어려운 자식이 있더군요. 아마 어머니에게 영애씨는 편한 자식인 듯.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행복한 분이지 싶습니다. 속을 풀어낼 상대가, 받아줄 상대가 있는 거니까. 실제 현숙씨 어머님과 현숙씨는 어떤 모녀 지간이신지요.
실제로도 똑 같아요. 질풍노도 시기엔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어요. 저는 둘째에요. 어릴 적부터 맏이인 오빠는 끔찍이 위하시면서 저는 만만하게 대하시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엄마랑은 아직도 종종 그 얘기로 싸워요. 그런데 떠받들어 키운 오빠가 요즘은 어째 손님 같고 불편하시대요. 지금은 알죠. 만만하고 편안한 기댐 목이 저라는 걸. 제가 초등학교 때 혼자 되셨으니 얼마나 힘아 드셨겠어요. 그래서 같은 여자로서의 연민이 있다 보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마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잘하게 되요.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기형도를 좋아한다면 나름 사춘기 때 문학소녀였다는 얘긴데, 어떤 청소년기를 보냈을지 궁금합니다. 영향을 준 책 이나 음악이 있나요
제가 꽤 조숙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도 컸고 오빠와의 비교로 괴로워하기도 했고요. 존재감 없는 내성적인 아이로 쭉 지내오다, 5학년 때였나? 선생님이 자기의 일대기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거든요. 그런데 발표할 때 제가 뭐에 홀린 양 그 조용하던 애가 모노드라마 분위기로 연기를 한 거예요. 친구들이 막 박수를 치며 열광하는데, 그 순간 전율이 느껴졌어요. 집에서 느끼지 못하는 따뜻함과 관심과 위로를 느꼈던 거죠. 그 일을 계기로 성격이 180도 바뀌어서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교장선생님도 알 정도로 해운대 일대에서 유명해졌어요. 19살 때 기형도 시집을 처음 접했죠, 아마. ‘바람은 그대쪽’으로라는 시가 가슴에 뭉클하니 와 닿더라고요. 제가 김광석 마니아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그런 문학이나 음악을 칙칙하고 우울하다고 하지만 저는 어린나이였음에도 기형도의 시와 김광석의 음악을 통해 희망을 보았어요.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었지만 그들의 혼이 느껴졌고, 내 마음을 들어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런 사람 질색이다, 이런 행동은 용납 못한다. 그런 거 있나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이요. 요즘 와 부쩍 느끼는 거지만,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의 경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바꿔서 만나기는 힘들더군요. 나와 잘 맞는 사람들 가려 만나는 게 좋더라고요. 뭔가 목적을 가지고 일명 간을 본다거나 악용하는 사람들, 정말 질색이죠.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예전에 뮤지컬 <넌센스 잼보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출산드라가 이렇게 노래를 잘하다니! 하고. ‘먹다 지쳐 잠이 들면~~’ 뭐 이런 노래를 불렀을 때 발성이 좋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뮤지컬 배우로서의 재능을 묵혀두는 게 아깝습니다. 하기는 지금은 제의가 들어와도 <영애씨> 때문에 힘들 것 같지만. <영애씨>를 뮤지컬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사실 개그로 데뷔하기 전 연극과 뮤지컬을 했었어요. 개그는 인생의 한부분이고, 색다른 도전이었지만 솔직히 익숙한 건 무대에요. 그래서 욕심은 나긴 하죠. 그러나 드라마와 같이 병행하면 민폐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제하고 있어요. 뮤지컬을 했을 땐 차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늘 MR CD를 듣고 대본을 끼고 살았어요. 그리고 음악감독님들께 사정해서 과외로 지도도 부탁드리고요. 전문 배우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더 부지런히, 열심히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진짜 여유 있을 때 몰입해서 해야 되는구나 하게 되었어요. 언젠가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싶을 때 연극을 하고 싶어요, 관객들의 피드백이 바로 오니까, 할 때는 무지무지 힘들지만 막상 하면 충전이 되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알고 보면 참 다재다능하세요. <무한걸스> 파일럿 때 출연하셨죠. <영애씨>에 캐스팅 되어 빠진 것 같은데 김현숙씨가 남았다면 <무한걸스>가 훨씬 더 잘 되었으리라고 저는 믿거든요. 올리브 TV의 <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를 진행 중인데 지금까지 진행자가 여럿 바뀌었지만 김현숙씨를 최고로 꼽고 싶습니다. 막장으로 흐르는 기막힌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할까? 진행자로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무한걸즈>는 솔직히 잘할 자신이 있었지만 리얼 버라이어티니까 아무래도 <막돼먹은 영애씨>에게 피해가 가지 싶어서 정규 편성 때 정중히 고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리얼리티 쇼인 경우엔 김현숙이란 사람 자체를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내보이지 않으면 재미가 없거든요. 이미 김현숙을 까 보일 때까지 까 보이면 영애한테 기대치가 없어질 거 같아서, 영애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만둔 거죠.
<연애불변>을 보며 나중에 상담 봉사자로 나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를 들어주고 촌철살인의 조언을 해주고. 설득의 기술도 있으실 것 같거든요. 그리고, 어떤 지적을 해도 상대방이 그리 노여워하지 않을 듯. 양희은씨의 포스가 느껴진다고 하면 이해가 되시려나요?
관심 많아요. 상담에도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특히 청소년 상담을 하고 싶어요. 청소년기에 한 부분을 누군가 잘 이끌어주면 인생이 바뀐다는 걸 저는 제 경험을 통해 알거든요. 누군가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매력을 느껴요. 어머니도 청소년 선도 일을 하고 계시고 나중에 제가 어머니의 뜻을 이어주리라 믿고 계세요. 실제로 어머니께서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 보면 나쁜 애가 하나도 없대요. 어찌 보면 문제 있는 어른들이 문제아들을 만든 걸 수도 있거든요. 언젠가는 제가 그런 공부를 할 때가 오리라 믿어요.
흔히들 우리나라의 오프라 윈프리가 되고 싶다는 얘기들 많이 하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며 김현숙씨라면? 괜찮겠다 싶어졌어요. 생각도 깊으시고, 혜안과 통찰력도 있으시고요. 뭐니 뭐니 해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가장 중요할 텐데요.
사람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배려라고 생각해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진정성이 젤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봐요. 연기도 마찬가지에요. 예전에 선배님들이 남의 대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하실 때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그저 제 대사치기에 급급했죠. 그러나 저도 나름 연륜이 생기다보니 이젠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죠. 저도 좋은 MC가 되고 싶어요. 내공을 쌓아서 사람 냄새나는 토크쇼를 언젠가 하고 싶죠. 다만 지금은 마음을 비우려고 해요. 욕심을 가지면 딜레마에 빠질 것 같아서요.
진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얘기해주세요.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지. 포부? 목표?
(오랜 생각과 깊은 한숨) 하고 싶은 건 많은데요. 뭘 하든 사람다운 사람이고 싶어요. 그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거잖아요. 연기자로서는 팔색조가 되고 싶죠. 하지만 전 연기자 김현숙 이전에 무엇보다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인격적인 인물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김현숙씨는 실제로 보면 어느 누구보다 글래머스하고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첫 인사가 “우와 현숙씨가 이렇게 날씬하고 예쁜 줄 몰랐다”일 정도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역시 그녀의 화면과 다른 매력적인 외모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출산드라 때부터 지금의 막돼먹은 영애씨까지 사회에서 비만으로 인해 비주류적인 인물로 소외되는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몸이 부해 보이는 의상을 줄곧 입는다. 피곤하고 힘들어 저절로 살이 빠질 때도 기뻐하기 보다는 걱정이 되어 없는 입맛에도 음식을 일부러 먹고 잠자리에 들 정도다. 여배우로서 어느 누가 어여쁘고 사랑받는 공주님 역을 마다할까나. 하지만 반면 줄곧 뚱뚱해서 놀림당하고 미모와는 거리가 먼 여성을 어느 여배우가 줄곧 그토록 투철한 프로의식으로 고집할 수 있을까나.
사실 우리 삶의 주인공들이 늘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처럼 44사이즈의 소유자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우리와는 늘 거리가 먼 신체와 환경의 인물들이었다. 출산드라도 영애도 어쩌면 우리가 이전에는 TV에서 절대 볼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캐릭터였다. 우리가 그토록 그 신기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것은 김현숙이라는 배우가 지닌 비범한 연기력과 함께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이 담긴 인간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앞으로 뭘 하든 사람다운 사람이 우선 되겠다는 그녀의 다짐어린 말은 새삼 우리가 참 귀한 배우 하나를 곁에 두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 인터뷰_정석희 TV칼럼니스트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 글 정리-김서희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 사진_JD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