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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권이 우리에게 영화할 힘을 준다 <고갈> 김곡 감독
고갈 | 2009년 9월 7일 월요일 | 김도형 기자 이메일


<고갈>은 분명 힘들고 불편한 영화지만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 감독의 농담 섞인 요청처럼 중간에 나가지도 않았다.(웃음)
사실 이 영화는 나도 힘들다. 내 입맛에 맞는 영화는 아니다. 또 중간에 나가지 말라고 한건 진지하게 했던 말이다.(웃음) 영화제에서도 그렇고 중간에 나가는 관객들이 많았다. 근데 중간에 나가면 진짜 안타까운 영화가 되는 거다. 앙꼬 빼고 빵만 먹은 거지. 사실 예열작업인데 여기서 뜨겁다고 나가면 끝내 불꽃은 못 보는 거니까.

처음 영화를 구상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었나?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영화들이 관습적이고 안일했던 것 같아서 심장과 망막을 좀 녹여볼까 하고 만들었다. 이건 너무 막말인가?(웃음)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관객을 조롱하고 그러려고 만든 영화 절대 아니다. 영화로 관객을 고문하고 괴롭힐 생각도 전혀 없다. 사실 만드는 내가 더 고문당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나도 가슴이 벌렁거려서 끝까지 보기도 힘들었다. 현장에 있었고, 직접 생각해서 찍은 장면이지만 그래도 보면서 힘이 들더라. 보기에 좀 피곤하지만, 어차피 이 세상이 피곤하니까. 희망이나 행복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그게 없다는 게 아니라 너무 쉽게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 역시도 통과의례가 필요한데 나한테 그 절차는 바닥을 치는 거였다. 누가 술 먹고 와서 힘들다 소리 하면 그건 아직 바닥까진 안 간거다. 진짜 바닥을 친 사람들은 이미 뭔가를 하고 있거나 다른 걸 준비하고 있다. 정신을 차렸으니까. <고갈>로 바닥을 치는 과정을 보여준 것뿐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 자체가 암울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곳이 바로 그 바닥이기 때문인가?
세상이 완전히 썩었다고 보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영화도 안 찍었을 거다. 어떤 필연적인 측면을 본 거다. 같은 것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 좋은 측면만 보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눈감고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보이게 한 거다.

<고갈>은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있지만, 이야기의 비중이 큰 영화는 아니다.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영향력이 있다.
김곡 김선이 계속 추구하는 지향이기도한데, 이미지랑 이야기를 붙이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야기가 느슨하긴 해도 있긴 있다. A4로 10장 정도 쓴 이야기인데, 시나리오라고 하긴 좀 그렇고, 일기라고 할까? 3막 구조 뭐 이런 형식적인 것들은 갖췄지만 이야기 자체는 평범했다. 여자는 도망치려고 한다. 남자는 그녀를 지배하려고 한다. 여자는 도망쳤다. 여자가 다시 돌아온다. 뭐 이런 식이다. 시나리오는 이야기보다 행위를 묘사하는데 비중이 높다. 여자가 먹는다. 남자가 뛴다. 같이 뛴다. 뭐 이런 식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 빈칸이다. 그 빈칸을 배우들이랑 같이 채워나가는 과정이 힘들었다.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나?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부분도 많나?
큰 틀을 준비하고 미리 합을 짠다. 합이란 시나리오에 안 나오는 빈칸을 말하는데, 해야 할 행위들을 미리 정했다. 여기서 공격하고, 여기서 쓰러지고, 그런 것에 따라서 행위를 만든다. 어려운 작업이다. 처음 해봤는데 거의 무용에 가깝다. 현장에서는 연기 디렉팅이 아니라 무용 디렉팅을 했다. 대사도 없으니까. 이런 영화를 또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찍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누군가 젊은 혈기로 객기 부란다고도 하는데 그 말도 일부 맞긴 하다. 근데 나이 들어서도 이런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고갈>은 4시간이 넘든, 30분 안에 끝나든 상관없을 정도로 제약이 없다. 어떤 기준이나 컨셉이 있었나?
처음에는 중편으로 생각했다. 근데 마음만 먹으면 3,4시간이 넘거나 반대로 더 짧게도 가능했을 거다. 영화 길이는 2시간 정도가 적당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문화적인 최고치랄까. 지금도 간당간당하게 완주하는 편이니까.

더 길었으면 괴로움과 불편함도 배가 됐을 거다.
엄청났겠지. 근데 타르코프스키 영화도 길잖아? 근데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왜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침을 흘릴까? 사실 자는 사람 태반인데. 나는 타르코프스키 굉장히 좋아하고 존경하고 벽에 사진 붙여놓고 숭배할 정도지만 그래도 잘 때가 있다. 특히 <노스텔지아> 너무 지루하잖아? 특히 회상 장면은 무슨 스틸인 줄 알았다. 거기에 비하면 <희생>은 굉장히 드라미틱하다. 거의 액션영화지.(웃음)

관객들이 불편해하고 괴로워할 거라는 예상은 했을 테고,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나?
솔직히 이정도로 심한 혐오증자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왜냐면 요즘 사람들 야동도 많이 보지 않나? 동물만 검색해도 수간 리스트가 쫙 뜨는데. 게다가 우리는 항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영상물도 그렇지만, 세상은 더 끔찍하고, 뉴스만 봐도 만날 폭력적인 이야기다. 사실 세상의 잔인함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잔인함이어서 그냥 이 정도는 보여줘야겠구나 싶었다. 싫어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괴롭고 싫은걸 완전히 잊고 싶을 거다. 근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이런 잔혹극을 내놨을 거다. 세상이 점점 잔혹해지고 있으니까.

세상의 잔혹함을 의식해 잔인한 부분의 수위를 좀 더 높이기도 했나?
그렇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냥 있는 대로 표현했다. 나한테는 항상 대상이 세상이었으니까 그냥 그 세상을 묘사했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매개함수나 필터 같은 거다. 연결하고 걸러내고 하는 역할. 단지 사지절단 되고 영아가 살해되고 이런 잔인함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70대 독거노인을 만났는데 평생 혼자였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결혼도 못 하고 혼기마저 놓쳐 평생 그렇게 살았다. 70년 넘게 혼자였던 거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할 외로움이다. <고갈>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하지만 <고갈>을 보고 더럽고 불경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부딪히는 요소가 많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다.
사실 그게 지랄같은건데.(웃음) 바닥치고 뛰어오르고 바닥치고 뛰어오르고의 반복이랄까.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나? 미리 지어놓고 영화를 만드는 편인가?
곡사는 보통 제목을 미리 지어놓고 들어가는 편이다. 지향점을 만들어 놓으면 일관성도 생긴다. 현장에서 선택의 순간들이 올 때, 나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고갈>이라는 제목은 마음에 드나?
시나리오 반 정도 쓰고 있는데 ‘고갈’이라는 단어가 딱 떠올랐다. 근데 누가 이렇게 제목이랑 내용이랑 잘 맞는 영화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웃음) 스크린 안에서도 고갈되고, 만드는 고갈되고, 보는 사람도 고갈되고. ‘고갈’은 뭔가 있는 것을 확 털어버리는 역장력 같은 것이 필요하다. 장력을 다 끊어서 분자들이 서로 흩어지게끔.

관객과 소통할 의지 자체가 없냐는 소리도 있더라.
나도 많이 듣는 얘기다.(웃음) 공포영화나 고어영화들을 보면 그게 바로 소통의 방식이다. 영화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감동? 그건 휴먼드라마 얘기고. <고갈>에서도 감동이 있긴 하지만 방식이 다를 뿐이다. <고갈>은 폭력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그보다는 자진해산이나 무장해제 같이 발가벗겨지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게 이 영화의 소통방식이다. 공포영화랑 비슷하다. 보통 진짜 귀신이나 무서운 존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의 끔찍함을 즐긴다. 잔혹극도 만찬가지다. 사람들이 잊었던 것을 상기시켜준다.
싫어하거나 불편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이 바닥을 쳤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일텐데.
느낄 거 다 느껴놓고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 대한 묘사나 느낌을 잘 알면서 대안이 없다고 한 글도 봤다. 가슴과 머리가 분리된 경우다. 마음은 불편함을 이미 느꼈지만,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거다. <고갈>은 구토하듯 안 좋은 것을 내놓는 과정을 보여준다. 잔혹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신체적인 역전이나 뒤집힘으로 작용한다. 공포영화는 신체를 대상화해서 훼손하지만 잔혹극은 신체 자체를 뒤집는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뷰티풀 호러라는 말이 붙었다. 물론 배급 차원에서 붙인 말이겠지만.
근데 사실 호러 이상이다. 호러랑은 구분되는 잔혹극이니까. 그나마 공포영화는 귀신이나 유령과 같은 타자의 자리는 준다. 내부에서 왔어도 외부에 자리를 줘서 가시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근데 잔혹극 같은 경우는 그 자리조차 없다. 정말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게끔 한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공포영화는 귀신의 천장에서 시작한다면 잔혹극은 인간의 바닥에서 시작한다. 그래봐야 로맨틱 코미디에 비하면 얘네들은 한 패밀리지만.(웃음)

낯선 공간에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나와서 탈국가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고갈>은 시공간이 불분명하다. 핵전쟁 이후를 보여주는 공간은, 말 그대로 ‘노웨어’다. 인물관계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바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도 창녀라고 하면 중산층 손님을 받아야 돈을 버는데, 여자는 우리가 문화적, 인식론적으로 가장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한다. 이 부분은 향후 몇 년간 지우기 어려운 코드일거다. 외국인 노동자는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타자 중에서도 가장 밑에 있는, 우리가 가장 억압하기 쉬운 존재들. 굉장히 불건전한 인식이고 이런 현상을 자정하려면 오랫동안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새만금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선택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새만금이어서 선택한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새만금이 아니라 새만금 옆에 있는 공장지대다. 그냥 우연히 찾은 거다. 핵전쟁 이후 뭐가 없나 하다가 눈에 들어온 장소였다. 계속 핵전쟁을 거론하는 이유는 전방위적인 전멸의 이미지를 주고 싶어서였다. 근데 새만금은 정말 핵폭탄이 떨어진 곳이더라. 현 정부의 핵폭탄이. 완전히 싹 밀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 게다가 당시에는 정권 초기여서 그런 식의 폭탄투하가 가속회되던 시점이었다.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어 왔는데, 영화 만들기에서 이명박 정권과 이전 정권에 어떤 차이가 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그래도 사변의 기회가 있었다. 딴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는데, 현 정권은 계속 우리를 몰아치니까 딴 생각할 여유가 없다. 세상이 어렵게 돌아갈 때는 잠깐 딴 생각이라도 해야 사는데, 계속 한 방향으로 몰아치니까 영화만 자꾸 만들게 되더라. 정권과 세상이 계속 영화 소재를 주는 거지.(웃음) 그런 의미에서 이 정권은 우리에게 큰 에너지다. 의지를 불태워주니까.(웃음)

이번에 심의에 걸려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기도 했다.
심의는 진짜 문제가 많다. 정권에 따라서 기준이 바뀌는 건 그나마 봐줄만 하다. 솔직히 그건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부분도 있으니까. 근데 진짜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하면 스스로 못 버틴다. 이 작품 말고도 이제 표현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쏟아질 거다. 표현의 범위는 넓어졌는데, 그걸 기관이 막는다고 되겠나. 마치 불어나는 미역을 감싸고 있는 비닐봉지 같다. 좀만 더 부어주면 미역이 불어나서 결국 비닐봉지도 터지고 미역도 상처받는다. 어쨌든 공공기관이니 그런 상처를 최소화할 의무가 있는 거다. 계속 시대에 뒤처진 원칙 고수하고 있으면 오히려 영등위가 더 상처받게 될 거다. 세상은 광속인데, 거기는 계속 모뎀이다.(웃음)
사실 외설에 관한 것도 그렇다. 이제는 애들도 인터넷으로 쉽게 야동을 접하는 시대가 아닌가.
군대에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있다고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아예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제도화해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실제로 군대에서 동성애 문제가 터지면 정신병원에 보낸다. 그들의 상식에서는 동성애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까 정신병자나 범죄자 취급한다. 이런 사람들을 분류하는 카테고리가 없어서 그렇다. 영등위가 딱 그런 식이다. 해당 카테고리가 없으면 새로운 걸 만들 생각을 해야지.

사실 영등위 문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긴 하다.
계속 그랬지. <고갈>이야 그렇다 쳐도 <반두비>는 좀 심했다. <고갈> 앞에 두 편이 영등위에 걸렸다. <반두비>가 미성년자관람불가를, 서원태 감독의 <싱킹 블루>는 제한상영가를 받았다. 우리는 시기상 뒤였고 배급팀의 투지도 좋아서 그나마 잘 해결됐는데, 그 두 영화는 제대로 얻어맞았다. 특히 내가 분노한 건 <반두비>다. <고갈>이야 애들이랑 손잡고 볼 영화는 아니지만, <반두비>는 애들 손잡고 보라고 만든 영화잖아? 거기에 미성년자관람불가를 주다니 말이 되나. 잘 나오지도 않는 마사지 장면을 핑계 삼았는데, 현 정권 욕해서 그렇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이번에 <고갈>이 제한상영가 등급 받았을 때 <반두비> 신동일 감독이 힘내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정말 눈물 나더라.(웃음)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화를 포함한 문화적인 측면도 척박해졌지만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촛불 같은 경우는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 전에는 지지율 하락 정도로 나타나던 것이 이제는 집단행동으로 나타난 거니까. 총체적인 비토여서 영화나 이미지계에도 큰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점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다못해 <고갈>같은 잔혹극이라도 많이 나올 줄 알았다. 비관주의가 판을 치는 이미지들, 즉흥적이거나 빈틈을 파고드는 그런 모습이 없어서 좀 안타까웠다. 근데 또 그게 경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북한에서 혁명 안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제의식을 갖고 파고들기에는 너무 배고픈 거지.

경제도 말이 아니고 임기 중에 전 대통령 두 분도 서거하는 등 굵직한 사건이 많이 터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뚝심 하나는 마음에 든다.(웃음) 우리가 그동안 믿었던 것들이 현 정권 들어서면서 다 날아간 듯한 느낌이다. 난 그걸 <고갈>로 표현한 거다. 어떻게 보면 공포스럽다. 그나마 실제 세상에는 느려도 한 편으로 뭔가를 준비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고갈>은 그렇지 않다. 소통의 수단이 다 제거된 사람들을 다룬다. 특히 여자는 가진 게 몸밖에 없고, 팔 것도 자신의 몸뿐이다. 노동운동에서 말하는 노동자는 아니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싶었다. 팔게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들. 그래서 고다르도 창녀를 좋아했잖나? 창녀라는 캐릭터를 연구했고. 나도 그렇다.

자본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남자는 여자의 상위 개념이다. 하지만 주도권은 여자가 쥐고 있다.
애석한 아이러니다. 언제나 멍청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똑똑한 사람들이 당한다. 그것만으로도 애석한데, 위기가 오면 그 애석함은 배가 된다. 폭풍이 오면 개미는 도망가고 새도 날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당한다. 이 사이에 뭔가 소통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면 다 괜찮을 수도 있다. 근데 불행하게도 폭풍이 오는지 안 오는지 모르는 멍청한 계급이 상위에 있다.

몸밖에 없는 여자는 무감각하게 섹스를 한다. 섹스를 초월했다는 느낌은 인간 자체를 초월했다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그 여자는 인간 이상일거다. 인간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고. 알만큼 다 알았고, 이제 인간을 위협하는 것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로는 선지자다. 불행히도 그런 상황에 놓은 선지자지만.

사산된 아이의 출산은 미래를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암울한 미래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선지자여서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이 안 거다. 그렇다고 미래가 없다는 건 아니다. 미래를 살리려면 죽은 미래를 먼저 보자는 거다. 고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는 희망이나 행복은 믿지 않는다. 바닥을 치지 않고 희망이나 행복을 얻기는 힘들다. 사실 뭔지는 다 아는데, 이미지로 보려니까 좀 불편한 거다.

불편한 화면이 참 많이 나오긴 한다.(웃음)
망막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웃음) 김기덕과 비슷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좀 다르다. <고갈>은 핸드메이드로 완성된 작품이다. 곡사의 핸드메이드 개념은 인물이나 공간을 다룰 때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차이를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상징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곡사는 상징이 아닌 현상이나 징후를 다룬다. 나의 기침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는 것에 대한 징후다. 징후는 번역자가 필요 없다. 그냥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화 속에서 여자의 트림 같은 것도 증상이다. 몸 안의 압력이 꽉 차면 빼야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는 이유도 그런 거다. 상징 같은 것들이 나와 줘야 해석할 것들도 생기는데, 징후는 해석할 거리가 없다.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다.

공장 지대의 굴뚝은 상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데?
상징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처음 굴뚝을 보고 느낀 것은 징후였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엄청나게 긴 굴뚝이 건물 지붕이 아닌 그냥 땅에서부터 솟아 있다. 근데 거기서 연기가 계속 난다. 그건 지구 안에서 불을 땐다는 소리다. 언제라도 땅을 무너뜨릴 것 같은 용광로가 그 안에 있다는 얘기다. 땅 안에 있는 무엇과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관계는 상징이 아닌 징후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상징이 전부 징후일 수도 있다. 징후인데 상징화하는 거지. 근데 상징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징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확고한 편이다. 우리가 말하는 상징들은 원래 증상이나 징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직관이나 물리적인 게 먼저 오고, 지성이나 해석은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순서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암시하기보다 상황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에 주력했다는 얘긴가?
상황을 보자는 거다. 지평선 같은 곳에서 시작된 굴뚝에서 연기가 나와? 그럼 그 안에서 뭔가가 끓고 있겠네? 그냥 그거다. 그런 것들이 상징화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그건 그 다음 문제다. 억지로 상징화하지 않는다. 진짜 매력은 증상들이다. 시간이나 공간을 신체라고 생각했을 때 나타는 증상들을 다룬다. 몸이 아플 때 증상이 나오고 나중에는 몸이 엉망이 되고 종양까지 생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표현도 그런 식이다. 다만 살짝 변주를 했다. 종양의 진화과정이라면 쉽게 이해가 될 거다.

징후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더 힘들다. 근데 힘들게 봤다면 징후를 느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언급하는 글들을 보면 놀랍다. 하지만 대안은 찾지 말자. 영화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안은 현실세계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만들어 내는거지 영화의 역할은 아니다.

각자 개인이 원하는 결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안이 없다거나 희망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건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본 거다. 그건 <고갈>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내 영화에 대안이 없다고 하면 화가 나기도 한다. 공포영화가 장르가 바뀐다고 해서 대안이 더 생긴다거나 그렇진 않잖나? 영화는 이미지를 통해 기술하는 거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질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크린을 상대로 대화를 하려는 건 잘못된 거다. 그냥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거다. 영화는 우선 관객을 어둠에 가둔 후, 한 덩어리로 뭉개고 시작한다. 이미지와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나.

배우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나?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장난 아니게 많은 얘기를 했다. 대사가 없으니 따로 리딩도 없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자신만의 쉴드가 있는데 그걸 무너뜨리는 것을 겁낸다. 근데 이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굉장히 좋은 배우들을 만났다. 잔재주보다 마음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연기라고 믿는, 정치적으로 보면 강경파들이다. 계속 마음을 만지면서 작업했다. 남자배우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여자배우는 울기도 많이 했다. 작업의 고됨은 물리적인 환경과 겹쳤을 때 배가 되는데, 우리는 겨울에, 진짜 오염에 찌든 갯벌과 폐수에서 찍었다. 여관방은 말할 것도 없이 고생스러웠고. 그 사람들은 짐승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고 진짜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연기란 잘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선택은 능력과 의지 밖의 일이고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일이 선택이다.
중국집 배달원 캐릭터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둘 사이에 비극을 가져다주는 인물인데.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나는 고난 같은 거다. 고난의 징후와 증상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온다. 사실 징후들만 있다. 어떤 정권의 파국은 앞뒤로 이유나 동기 없이 그냥 올 거다. 단지 이유들은 이 인과관계 밑으로 숨어있고 표면에 드러난 건 두드러기나 종양 같은 것들이다. 중국집 배달원은 구원에 관련돼 있지만 주도적이지는 않다. 사생아를 꺼내주는 상황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을 구원이라 하면,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여자고 중국집 배달원은 도와주는 산파 역할이다.

구원을 보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몸을 훼손하는 행위를 한다.
하나의 의식이다. 신체 훼손은 의식의 일종인데, 무당이 귀신을 불러낼 때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쓰듯이 생명에 관련된 신체 부위를 이용해 의식을 치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꼽이나 자궁, 성기 등과 관련지었다. 근데 이런 말도 들었다. 상징 다 만들어놓고 왜 상징에서 도망다니냐고. 그래서 최근 이런 부분을 더 생각하고 있긴 한데, 상징과 징후는 어원도 비슷하고 원래부터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징후를 택한 순간 어쩔 수 없이 상징도 택하게 된다. 그냥 순서상 징후가 먼저고 상징이 나중이 아닐까 싶다.

상징은 결과론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현상도 순서대로 보면 징후겠지만, 돌이켜보면 상징이 된다.
맞다. 결과론!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다. 단지 같은 것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말인데 시점에 따라 달리 쓰이는 것 같다.

평소 김곡 김선의 공동작업이 주를 이뤘는데, 이번에는 단독 연출을 좀 내세우는 분위기다.
그건 여러 번 얘기했지만, 현장에 내가 좀 더 나와서 그렇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차피 공동 작업이고 마지막에 찍는 곡사라는 인장이 중요하다. <고갈> 역시 곡사의 인장이 찍힌 작품이다. 후반작업, 현상, 내가커팅 다 같이 했으니까. 하,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생지옥이었다. 작업 자체가 진짜 고갈이었다. 후반작업 생각하면 나도 관객한테 할 말이 있다.(웃음) 이미 골백번은 고갈당한 것 같다. 나만 편하고 관객은 고갈시키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16mm 필름 작업을 해봐서 아는데, 핸드메이드 작업은 정말 자살하고 싶은 과정이다.
진짜다. 막 집어던지고 싶고 그렇다. 그나마 16mm는 좀 낫지 8mm는 그림이 1/4니 오죽하겠나. 코드도 없다. 클로즈업 같은 건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다 똑같아 보인다. 손으로 하나하나 돌리면서 그림 확인하면 정말 미치는 느낌이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거다. 그렇다고 알아달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여하튼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

생략하고 파괴하고 왜곡시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운드를 비틀었다.
8mm로 했던 것을 고스란히 소리에도 적용시켰다. 내가 영상을 맡았다면, 홍철기는 그걸 앰비언스로 했다. 덩어리로 온 소린데, 흩어지는 소리로 만들었다. 사방에서 우리를 감싸는 소리로, 출구를 봉쇄한 듯 피할 수 없는 느낌을 준다. 영화에 대해 우리가 알아왔던 모든 믿음을 배신하는 소리다. 영원할 것 같은 소리, 어딜 가도 다 들릴 것 같은 소리다. 소리 자체는 익숙한데 왠지 다른 소리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래서 이걸 소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더라. 근데 이건 너무 부당하다. 뮤지션들에게 굉장한 모욕이다. 소음이라는 한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베리에이션이 엄청나다. 마치 메탈 모르는 사람들이 메탈리카나 카니발콥스나 다 똑같이 들린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그건 모욕이니까.
음원을 상실한 불길한 앰비언스라는 말로 소개되더라. 작업할 때 어떤 주문을 했기에 이런 소리가 나온 건가?
홍철기랑은 작업을 오래해서 긴 말이 필요 없다. 워낙 말을 안 하면서 잘 알아먹는 사이다. 만약 다른 사람과 함께 했다면 자신 없었을 거다. 이건 언어로 설명하고 요구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ADR이나 폴리라면 정확하게 말을 해주겠지만, 앰비언스는 다르니까. 형 여기서 우~ 해줘요 이렇게 할 수도 없잖은가.(웃음) 만약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묘사가 될 정도라면 그냥 우~ 하면서 녹음하는게 낫지.(웃음) 그래서 추상적인 말을 많이 한다. 좀 더 드라이하게라던지, 가끔은 이건 기관지에 넘어가다 만 소린데 내가 원하는 건 기관지를 거쳐 십이지장과 내장에 닿는 소리다. 뭐 이런 비유를 한다.(웃음) 근데 다 알아먹는다.

<고갈>의 대표 이미지라면 어떤 걸 들 수 있나?
영화에서는 꼽기 힘들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하고 작업한 것들은 있다. 뻘에 드릴이 서 있다. 거꾸로 툭툭 튀어나온 건데 몇 대가 굉장히 멀리 보인다. 근데 남녀가 거기서 뛰어 논다. 같이 있지만 액션 자체는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없다. 둘 사이의 영향력은 앰비언스가 다 먹어버린다. 노는 모습이 좀 불안해 보이는 이 그림이 갑자기 확 뒤로 넘어가거나 확 녹아버린다. 이게 <고갈>의 마스터 이미지다. 촬영 전에 촬영감독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그때도 이렇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촬영감독이 고개를 갸웃하더라. 근데 그 느낌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더라. 말 잘하고 그런 사람이 좋은 작업자가 아니다. 카메라로 말하는 촬영자가 진짜다.

접근 방식 자체가 기존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보기나 영화 읽기에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내가 새로운 뭔가를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의 역할을 솔직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위해 배우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나는 매체를 고를 때 신중했던 거다. 한마디로 8mm를 캐스팅했다. 절대 딴 짓을 했거나 반칙을 한 게 아니다. 보통은 필름은 깨끗하고 지문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난 조금 다른 방식을 썼을 뿐이다. 그 사람들 눈에는 마치 배우가 카메라를 쳐다보고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금지된 것을 건드린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곡사는 영화의 규칙을 잘 따르는 편이다. 다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배우의 이미지를 우리는 다른 쪽으로 보여줬다. 공간감 자체가 배우였다. 그것뿐이다. 이런 우리를 보고 실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영화의 의도를 잘 살린 영상이었다. <고갈>을 두고 실험영화라고 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처음 생각한 마스터이미지에 맞게 찍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영화에 맞는 매체나 배우, 상황, 액션, 줄거리를 찾은 것뿐이다. 엄청난 반영이나 의도를 갖고 무엇인가를 실험한 게 절대 아니다. 만약 <고갈>을 실험영화라고 하면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도 실험영화여야 한다. 우리는 실험영화라는 말을 너무 방만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알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들면 실험영화라고 해버린다. 뭔지 몰라 분류할 수 없으면 그냥 실험영화라는 폴더에 다 밀어 넣어서 섞어 버린다. 이건 진짜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진짜 실험영화들도 굉장한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단순히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끝내는 영화가 아니다. 분류하기 쉽게 그런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괜히 그런 단어에 호도돼서 작품을 오도하게 된다.

최근에도 작업하느라 정신없어 보인다. 오늘도 전화가 계속 오던데.
8mm에 치중해서 말하는 사람들한테 한 방 먹이자면, 이번에는 8mm 안 쓴다.(웃음) HD로 아주 깔끔하게 작업하는 정치 풍자물이다. 결국 <고갈>같은 영화가 아니란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르게 가는 거다. 물론 다시 8mm가 필요하다면 또 그렇게 사용하겠지만.

평소 곡사가 보여줬던 스타일의 영화인가?
그렇긴 한데, 심지어 이번에는 플롯도 많다. 멀티 플롯 영화로 4개의 내러티브가 동시에 진행된다. 인물도 많고 캐릭터도 많고 장소도 많아서 좀 고전하고 있다. 주어진 예산으로 4,5편을 찍는 것 같은 힘든 영화다.

쉬지 않고 꾸준히 영화를 찍고 있다. 제작비도 문제지만, 그런 에너지도 부럽다.
사실 우리도 속으로는 고갈되고 있다. 뭔가가 용솟음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속도가 남들보다 빠른 건 사실이다. 대신 또 쉽게 고갈된다. 비우고 채우는 주기가 좀 짧다. 대처하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신념이다. 독기 같은 것. 쉬고 싶으면 스스로한테 칭얼대면서 독하게 군다. 약간 가학적으로.(웃음) 현 정부가 환율 올려놓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책임을 진다. 현 정부는 환율 올려놓고 책임도 안지고 나중에는 슬쩍 바꾸지만, 우린 절대 안 그런다. 두 번째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좋은 세상을 만난 탓이다.(웃음)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세상, 영화로 만들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 그냥 무료하게 있으면 우주한테 죄 짓는 느낌이 드는 세상. 오히려 체력이 못 따라올까봐 두렵다. 3년 간 달려야 할테니.(웃음)
지금 준비하는 것도 현 정권을 향한 영환가?
그렇다. 근데 이것보다 김선이 단독 연출한 다른 영화가 있다. 옛날에 만들었던 <자가당착>의 속편격인 영화인데, 아직 편집 전이다. 진짜 달리고 있는 것 같다. <고갈> 이후 3,4작품을 더 하고 있다. 아유, 끔찍해.(웃음) 근데 김선이 더 늦으면 못할 것 같다고 꼭 해야겠다고 하더라. 기운도 좋지.(웃음) 난 지쳤으니 혼자 하라고 했더니 뭔가 하나 만들었다. 다리 없는 포돌이가 다리를 만들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긴데, 현 정권의 실세나 관계자들을 거론하는 영화여서 문제가 될 것도 같다.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로 왁자지껄한 마네킹 소극이다. 김선의 현 정권에 대한 미움을 영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촬영 끝나고 텔레시네 봤는데 너무 웃기더라.(웃음) 김선이 화가 많이 났구나 싶기도 했다. 뭐 잘못 되면 그 녀석 사식이나 넣어줘야지.(웃음) 그런데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영화를 접하면 영등위에서 뭐라고 할까? 주제의 선정성? 선정적인 건 없고. 폭력성? 폭력도 안 나오고. 반사회적? 약물? 약물은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약물 하나 안 나오는 <고갈>도 약물이 굉장히 높게 나왔다. 소주 먹는 것 때문에 그런가?(웃음) 도통 기준을 모르겠다.

제목은 아직 안정했나? 제목 들으면 방향성을 알 수 있을텐데.
아직이다. 일단 <자가당착 속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근데 이 영화가 완성되면 누가 이걸 배급할 지도 궁금하다. 야당이랑 연합이라도 해야 되나? 근데 다들 불똥 튈까봐 만지지도 못할 것 같다.(웃음) 이 영화 촬영이 거의 끝나고 보충 촬영 스케줄 잡고 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래서 보충 촬영 때 그런 쪽으로 내용이 더 들어갈 것 같다.

진짜 화가 많이 났나보다. 직접적으로 현 정권을 향하다니.
촛불 이후에 이미지 정국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그것 때문에 김선이랑 둘이 열을 좀 받았다. 그래서 김선이 <방독피> 전에 남은 에너지 다 쏟아 가면 그걸 만들었다. 쉬지도 않고 바로 다른 작품을 하다니 정말 정신력이나 체력이나 대단하다.

힘들어도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 한다는 게 대단하다.
이 영광을 현 정부에게 돌린다.(웃음)

2009년 9월 7일 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2009년 9월 7일 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장소협찬_홍대 이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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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0224
잘 읽었습니다   
2010-03-23 01:02
kisemo
잘 읽었습니다 ^^   
2010-03-19 21:17
youha73
잘 읽었습니다   
2010-02-27 20:43
pretto
좋은작품 기대할게요~   
2010-01-27 10:01
ninetwob
잘보고갑니다   
2010-01-21 16:38
loop1434
신선하다   
2009-09-28 10:40
egg0930
그렇군요...   
2009-09-16 09:11
hrqueen1
아, 그 영화를 만드신 분이네요....
근데 무척 험상궂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네요.   
2009-09-1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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