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배우라는 직업 자체는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꿈꿨지만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꽃미남 밴드’였어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본다는 것이 굉장히 재밌어 보였지만 감히 도전할 생각은 못했거든요. 그러다 대학 진학을 통해서 조금 더 발을 내딛었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해 보니 막연히 생각했던 때와 다른 점이 있던가요?
네, 그럼요. 대중이나 관객입장으로 볼 때와 연기를 직접 할 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요. 막상 해보니까 아주 짧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도 그 캐릭터에 완전한 몰입이 되지 않으면 정말 어색하고 힘들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가시> 속 영은 캐릭터는 어떻게 설정하고 접근했나요?
설정에 있어서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오랫동안 오디션을 봤거든요. 7차례 걸친 오디션 모두 영은이에 관한 오디션이었어요. 감독님이 영은이 등장하는 신 하나하나를 다 보셨던 거예요. 이게 영은일까, 저게 영은일까 다양한 시도를 할 때마다 감독님께서 연기 지도를 해주셨어요. 오디션, 다른 배우들과의 리딩, 그리고 많은 분석을 통해서 감독님과 영은이를 함께 만들어 나간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뭔가 영은이에 대한 확고한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표현들을 보면 분석해보고 다시 영화를 보거나 후기를 찾는 관객들이 있는 반면, 그냥 편하게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그런 관객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그럼 개인적인 생각으로 영은이는 어떤 사람인가요?
영은이는 정말 불쌍한 아이에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왠지 모르게 영은이가 너무 슬프게 와 닿더라고요.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분명 악랄한 행동도 많이 하지만 안쓰럽고 불쌍했어요. 그래서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혼자 고민도 하고 감독님과 얘기도 하면서 조금씩 영은이를 찾아 나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볼 때 영은이는 너무 순수하다 못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백지 같은 아이인 것 같아요. 표현하는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는 영은이의 행동이 조금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요. 영은이는 정말 사랑 하나만을 보면서 달려왔던 아이에요. 그래서 영은이가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 상황이나 인물들이 조금이라도 방해로 느껴지면 그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갔지만, 결국 영은이는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영은이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는데 그럼 영은의 전사는 설정해본 것이 있나요?
네, 전사 설정을 굉장히 많이 했죠. 우선 영은이는 엄청난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요. 애정결핍도 있고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라왔고 그런 아빠에게 금전적인 도움만 받으면서 살아왔어요. 엄마도 일찍 돌아가셨고 큰 집에 혼자 살아요. 혼자 남겨진 채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표현도 할 수 있고 줄 수도 있잖아요.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영은이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납득이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영은이는 오히려 더 뭔가를 얻기 위해서 본능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같아요. 조금은 더 일차원 적으로 생각하면서 영은이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해하기는 쉽지 않죠. 워낙 비현실적인 요소가 많다보니까. 근데 분명한건 영은이는 싸이코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 상황 자체가 영은이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싶었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모성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극에 달할 것이라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 접했을 때는 낯설기도 하고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영은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영은이가 더 다가오더라고요.
영은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영은이라는 아이 자체가 좀 허구적인 아이잖아요. 그런 영은이가 저로 인해 표현 된 거고요. 어차피 영은이라는 아이는 제가 표현하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나오는 저만의 생각이나 일상적인 말투나 행동들이 영은이에게 충분히 반영되더라고요. 무언가 더 만들어내기보다 주어진 상황이나 주어진 대사 안에서만 적극적인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영은이 준기의 결혼사진을 보면서 오열하다 갑자기 서연을 도발하는 장면이 있어요. 감정변화가 급작스럽게 느껴지던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신처럼 감정기복이 심한 상황은 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릴수록 더 과감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많은 걸 알지 못하니까 표현도 직설적일 수 있고요. 그래서 그 신을 촬영 할 때는 많은 걸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감정에 집중해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어떻게 보면 기복이 워낙 심하니까 가장 복잡한 신일 수도 있죠. 하지만 서연의 반응에 따라 즉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좀 더 신경 썼던 것 같아요.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베드신이었어요. 베드신 때문에 망설여지거나 하진 않았나요?
처음 경험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고 부담도 많이 됐어요. 행위보다는 오로지 서연의 약을 올리고, 지금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격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라는 두 가지 생각만으로 촬영했어요. 물론 부담되고 힘들었지만 일반적인 베드신과는 다르게 세 캐릭터의 감정선을 생각하며 표정이나 눈빛 연기에 신경 쓰려고 했어요.
다른 친구들처럼 단순하게 인기 많고 잘생긴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도 물론 있었겠지만 선생님에게 동변상련의 감정을 조금 느꼈을 것 같아요. 나도 굉장히 외롭고 힘든데 선생님도 나처럼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뚜렷한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구나, 생각돼서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는 좀 더 감성적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나 생각을 해요.
영화 전반에 걸쳐 영은은 순수하지만 그 나이 또래에서만 느껴지는 도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요. 그런 부분은 어떻게 준비를 했나요?
영은이라는 캐릭터는 철저히 순수함만을 가지고 연기하려고 했어요. 여자이고 싶어 하는, 그래서 도발적이고 싶어 하지만 굉장히 서툴러요. 같은 행동을 해도 뭔가 아이 같고요. 그런데 설정 자체는 뭔가 야할 수 있어서 그런 것들이 조화를 잘 이뤘던 게 아닐까 해요. 순수한 영은이가 선생님에게 여성으로서 다가가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에 집중했어요. 오히려 이 아이에게는 서툰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과감히 서툴게 표현했던 것 같아요. 뭔가를 의식하고 계획해서 연기하지 않았어요.
순수함이 오히려 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돼요. 자칫하면 예쁜 척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어 럭비 경기를 응원하는 장면이나 수돗가에서 물장난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도 영은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잖아요. 그런 장면들을 촬영할 때 더 의식되거나 어렵진 않았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랬어요. 오히려 대사가 있는 감정 신보다 응원하는 신이 어렵게 느껴졌어요. 운동장에서 응원해 본적도 없고 춤도 못 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수돗가에서 노는 장면도 막막했어요. 처음 보는 친구들과 어떻게 친구인척 어울려 놀아야 하나, 막막했어요. 그 신을 중후반에 찍었는데, 촬영하면 할수록 영은이가 점점 더 내 안에 들어오니까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좀 더 잘 표현이 되더라고요. 제가 현장에서 막내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주어진 도구 가지고 신나게 놀았어요. 의상팀 언니들한테 도구를 조금 더 준비해달라고 부탁도 했고요. 그냥 땀 뻘뻘 흘리면서 뛰어 놀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쁜 척은 하지 않았어요. 그게 보이지 않았나요?
예쁜 사람은 어떻게 해도 예쁘잖아요(웃음).
좋게 들을게요(웃음). 예쁘게 보여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그냥 뛰어 놀아야지, 라는 생각만 했어요. 그 공간에 선생님이 있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응원이니까 열심히 응원했어요. 그 감정에 충실하면서 나왔던 액션이었던 것 같아요.
오열하는 부분은 사실 마음껏 오열하고 싶었어요. 영은이를 가장 불쌍하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엔딩의 옥상 신 전에 한 번 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관객들이 영은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영은이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까지 이 아이가 얼마나 큰 슬픔과 분노를 느꼈는지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해보니 오열하는 신 밖에 없더라고요. 조금 과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러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영은이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더 불쌍하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준기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그런 퀭한 모습은 저도 동의를 해요(웃음). 갑자기 너무 극적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대사도 없고 상대도 없는데 그 앵글 안에서 내 감정을 눈빛만으로 표현하려다보니 그 감정이 너무 많이 나와서 오히려 과하게 표현이 됐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옥상에서의 “사랑하잖아요. 가슴이 뛰잖아요”라는 대사나 준기 팔에 매달려 “사랑이 아니면 뭔데요”라는 대사는 영은의 감정을 함축한 표현들인데 그 부분을 연기 할 때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엔딩 신이 영은이에게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제가 영은이에 대해 느낀 슬픔과 연민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관객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지금까지 영은이의 행동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슬프고 불쌍한 아이라는 연민이 들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옥상에서 준기에게 장난감이었냐고, 사랑이 아니었냐고 물어보는 신을 통해 영은이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촬영할 때도 마음이 안 좋았겠어요.
네, 그때 너무 마음이 안 좋았어요. 연기할 때 죽음 앞에서 사랑을 원하는 영은이의 입장이 아니라 그런 영은이를 바라보는 제 입장에 있게 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너무 눈물이 나는 거예요. 눈물을 마구 흘리며 사랑이 아니면 뭔데요,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사랑이었다는 대답 하나만 듣고 싶은 감정 그 자체에서 더 큰 슬픔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연기를 해야 되는데 촬영장에서 저는 계속 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준기 팔에 매달렸을 때의 영은의 표정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표정으로 인해 연민하기 힘든 캐릭터였던 영은이 더 이상 밉지가 않더라고요.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아이이길 바랐어요. 그리고 사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영은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도 관객들이 이해하길 바랐고요. 근데 그 부분은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영은이에게 굉장히 미안해요.
<가시>는 배우라는 인생에서 처음이자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예요. 저에게 가장 큰 시련이 있던 힘든 시기에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감독님께서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저는 그 선택에 부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요. 그 노력들을 하면서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어떤 배우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가시>라는 작품이 어떻게 보면 제 배우로서의 첫 작품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가장 의미 있고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은 그런 작품이에요.
앞으로 활동 계획은요.
정해진 건 아직 없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많은 오디션에 도전할 거예요. 어떤 장르나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다, 어떤 이미지가 되고 싶다, 이런 건 없어요. 특정 캐릭터에 국한되어서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영은이랑 겹치는 캐릭터여도 상관없고, 완전히 다른 캐릭터여도 상관없고요.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어도 영은이처럼 공부와 분석을 통해 제가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그 역을 또 열정과 노력을 가지고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정말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는 다채로운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떤 캐릭터를 하든 그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그런 배우요.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