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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으로 응축된 연기 <무뢰한> 전도연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칸을 네 번이나 갔다 왔는데도 매번 시차적응이 힘든가봐요.
그저께 한국에 도착했는데 아직 여독이 안 풀린 것 같아요. 너무 머니까요. 특히 이번에는 굉장히 짧은 기간 머물렀거든요. 칸에서 시차 적응을 안 하고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오니 오히려 체감하는 시차가 애매해져서 잠을 더 못자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제 하루는 쉬어서 조금 괜찮아요.

언론시사회 때 <무뢰한>을 잘 봤다고 직접 이야기했는데 영화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요?
영화를 처음 봐서 많이 떨렸는데 감독님이 표현하고자 한 부분이 영화에서 보이고 느껴져서 좋았어요. 물론 모든 부분이 만족스럽게 표현됐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요.

촬영하면서 오승욱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부분을 많이 이야기 하던가요?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감독님은 솔직한 영화를 찍고 싶어 했어요. 저는 그 이야기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인물을 표현하려했고요. 칸에서 <무뢰한>을 또 봤는데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웃음). 처음에는 긴장해서 작품을 단순하게 보게 되지만 영화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놓친 부분이 계속해서 보이거든요. 아무래도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마다 부족한 부분이 하나씩 더 보이는 것 같아요.

흥행에 기대가 큰가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영화제에서 호평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는 영화제에 보내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거니까요. 관객이 많이 봐 주면 너무 좋죠. 영화의 호평이 흥행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작사 사나이픽처스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사나이픽처스와 다시 작업 안할 거라고 말했어요(웃음). 정말 오랜만에 충무로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어휴, 충무로 시대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접속> 이전에 있었던 영화사들이나 그랬을 것 같아요(웃음). <무뢰한>으로 처음 사나이픽처스를 찾아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직원들이 일렬로 줄을 맞춰 기다리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저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웃음). 제가 원한 건 그런 투박한 방식의 친절이 아닌데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너무 잘해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런 친절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나니 예스럽게 느껴지고 정다워 좋아요. 세상이 많이 변해서 지금은 영화 제작 과정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정해진 스케줄대로 시스템처럼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다시 작업 하자고 하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밀양> 촬영을 마치고도 이창동 감독과 다시 작업 못하겠다고 했다면서요(웃음).
네(웃음). 그런데 <밀양>이 끝나고 나서는 왜 그때 이창동 감독님의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했나 싶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다음에 또다시 함께 작업할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아닐걸?’ 그러시더라고요(웃음). 감독님에게 아직 제가 보지 못한 모습이 있나봐요.
<무뢰한>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나리오가 굉장히 좋았어요. 하드보일드의 중심이 멜로라는 점이 좋았거든요. 영화 속 인물들이 폭력적인 사건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이 좋았어요. 서로에게 무례하게 되고 바닥의 끝인 것 같던 곳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오승욱 감독이 여자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감독님이 여자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독님은 여자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소통을 모르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소통 말이에요.

김남길에게도 여자를 너무 모른다고 지청구를 줬다면서요?
김남길이 이번 작품을 통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서 어떻게 바뀌었냐고 물어봤어요(웃음). 그랬더니 ‘더 잘해주고 애교부리는 거?’라고 하기에 그건 여자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줬어요(웃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물론 다르겠지만요(웃음). 사실 남자는 여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정재곤도 김혜경을 가장 괴롭히는 게 주변인물들이라고 생각해서 모두 정리해주지만 정작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건 본인이잖아요. 남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여자에게 잘하는 건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본인만의 방식으로 잘해줘요. 그리고 여자가 거기에 호응을 안 해주면 실망하고요. 김남길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칸에서 감독님이 김남길이 자신과 닮았다는 거예요(웃음). 김남길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따지더라고요(웃음). 저도 당황했어요.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고 닮았다고 한 걸까요? (웃음) 내가 둘이 서로 형, 동생하라고 그랬어요.

시나리오상의 김혜경과 완성된 영화 속 김혜경은 어떻게 다른가요?
시나리오에서는 김혜경이 많은 부분 대상화되어있다고 느꼈어요. 김혜경이 겪는 상황들이 에피소드처럼 함축돼서 표현된 부분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실제 김혜경은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훨씬 더 치열하게 살고 있을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일상처럼 계속해서 벌어진다고 해서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김혜경에게는 그때마다 그런 순간이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인물들이 흔들리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어차피 멜로의 감정이 있잖아요. 그래서 김혜경을 표현할 때 여자로서의 매력만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김혜경이 다른 인물들과 어떻게 섞여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조금 더 표현하고 싶었어요. 김혜경이 어떻게 흔들리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말이에요. 감독님도 그 부분에 동의했고요.

김혜경이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순간은 김혜경의 가장 처절한 순간이에요. 자존심 하나는 지켜왔던 여자이고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고 싶지 않은 여자이니까요. 시나리오에 정재곤이 김혜경에게 아이가 즐기며 장난치는 것처럼 ‘충성’이라고 문자를 보내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김혜경에게도 그런 상황이 과연 장난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만일 정재곤이 김혜경과의 관계를 놀이처럼 흥미롭게만 여겨왔다면 그 순간 김혜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다시 보게 됐을 것 같아요.

빨간 드레스를 입은 모습만큼이나 김혜경이 한복 입은 모습의 이미지가 강렬했어요.
시나리오에는 ‘선녀 같은 한복을 입고 회사원들 사이를 누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웃음). 감독님이 원한 건 정말 ‘선녀 같은 한복’이었어요. 감독님은 김혜경이 한복 입은 모습을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처럼 생각했나봐요. 그런데 한복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정말 더웠고 모기도 너무 많았거든요. 모기채를 휘두르면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모기가 타다닥 잡혔는데 한복 안에도 모기가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의상팀이 여러 한복을 가지고 왔는데 정말 기함할 정도로 화려한 한복도 있었거든요. 무당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웃음). 그나마 괜찮은 걸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감독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작품을 보고 알았어요. 너무 좋은 선택이었어요. 김혜경은 남자들을 상대하려고 매우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 있는 거죠. ‘선녀 같은 한복’, 너무 재밌지 않나요? (웃음) 심지어 미스코리아처럼 띠도 두르자고 했어요(웃음). 남자들은 유흥업소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지 몰라도 저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 없거든요. 그래서 띠는 빼자고 했어요.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촬영장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에게 갖는 이미지가 매우 특이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정재곤에게 ‘어제 박준길을 만났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의 연기가 특히 좋았어요. 김혜경의 복잡한 심경이 직접 말로 표현되지 않았는데도 전달됐거든요.
김혜경과 정재곤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데도 그걸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는 거죠. 정재곤 같은 경우는 김혜경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데도 그것을 줄 수가 없고요. 영화에는 그런 식의 엇갈리는 갈등이 끊임없이 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솔직한 소통에 서툴다고 말하는 거예요(웃음). 사실 <무뢰한>이 관객들이 원하는 답을 명확하게 주는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이 <무뢰한>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김혜경과 정재곤의 살아가는 모습이 더 안타깝게 여겨지고, 처절해서 연민도 가거든요. 누군가에게 말로 진실을 전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말뿐인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김혜경과 정재곤은 그들 안에 있는 감정을 온 몸으로 끄집어내서 표현하는데도 계속해서 엇갈려요. 그런 식으로 <무뢰한>의 인물들은 말로 표현하지 않는 소통을 끊임없이 해요.

캐릭터를 이해하는 전도연만의 노하우가 있다면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웃음). 캐릭터와 같은 경험이 있어서 그 경험에 빗대어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똑같은 경험이 없다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도 책과 같거든요. 책을 읽을 때 상상력을 동원해서 끝까지 읽으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연기도 그런 방식인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인물을 완전히 이해하고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인물을 연기하면서 계속 생각하다보면 그 인물의 정서나 말투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어떤 인물을 이해한다는 건 저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배우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이해하는 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서 연기로 표현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김혜경은 이해하기 쉬운 편이었나요?
쉽지는 않았어요. 특히 처음 시나리오에는 김혜경이 너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었거든요.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에게 김혜경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여자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인물들에게 무뢰한 같은 여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희망이 없는 여자처럼 보였어요. 힘든 생활을 일상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여자 같았어요. 그런데 시나리오에서의 그런 모습만으로 김혜경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어요. 김혜경이 정말 단순하게 남자들을 헤집어 놓는 무뢰한, 또는 팜므파탈처럼 보일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김혜경이 어떤 여자인지 계속해서 생각해보니 그녀가 단순한 팜므파탈은 아닌 것 같았어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순순히 믿어버린다고 그녀가 팜므파탈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김혜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몸짓이라는 언어로 가장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시나리오에서 김혜경은 꿈도 희망도 없던 여자에 더 가까웠나봐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랬죠. 그런데 정재곤을 연기하는 김남길을 만나 같이 연기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김혜경이 과연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온 인물인지 의문이 생겼어요. 그런데 반대일 것 같은 거예요. 김혜경은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선택되는 삶을 살았던 거죠. 그리고 그 삶이 본인의 것인 줄 알았고요. 사랑인 줄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거예요. 만일 김혜경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사는 여자였다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았을 거예요. 하지만 김혜경은 박준길과의 관계를 사랑이라 믿고 쫓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김혜경은 시간이 지나도 박준길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은 못할 것 같아요. 그것도 그녀에게는 사랑이거든요. 하지만 정재곤은 김혜경이 처음으로 직접 감정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김혜경이 전부터 만나온 남자들은 그들이 원할 때 김혜경 옆에 있었던 사람이지 김혜경이 원할 때 곁에 있어 준 남자는 아닐 것 같았어요. 박준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정재곤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항상 김혜경 옆에서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남자잖아요. 그래서 김혜경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김혜경이 정재곤에게 여기서 도망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이 어떻게 보면 정재곤에게 직접적인 말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김혜경이 박준길을 결정적으로 선택하는 순간이 있다면 영화 속에서 어떤 장면일까요?
김혜경에게는 정재곤이 나타난 시점부터 매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김혜경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재곤은 항상 그녀 옆에 있었으니까요. 김혜경은 정재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자신에게 거짓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바닥에서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두바이에 있었다는 정재곤이 너무 촌스럽고 어설프게 보이는 거죠. 정재곤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초짜인 게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정재곤이 매 순간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걸 보면서 정재곤에 대한 감정을 순간순간 느꼈을 것 같아요.
김혜경은 말로 소통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표정 연기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아요.
특별히 표정 연기를 신경 쓴 건 아니에요. 표정 연기는 신경 쓰고 계산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단지 김혜경의 표현 방식이 말로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에 조금 더 집중한 부분은 있어요. 어떤 표정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을 더 극대화해서 표현해야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김혜경은 상대방에게 직접 욕을 하면서 쏘아대거나 화를 내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삐뚤어진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감정에 더 집중했어요.

‘상처 위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얹고서 사는 거지’라는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본인이 스스로의 상처를 돌아볼 기회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 장면은 김혜경에게 그런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죠. 그리고 정재곤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 거예요. 상처받은 짐승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것 같은 느낌의 신이었어요.

촬영하면서 스탭들에게 ‘나 잘하고 있어?’라는 쪽지를 남겼다면서요.
메이킹 영상을 촬영하는 분과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어요. 그분이 작품을 냉정하게 이야기해주는 편이라 가끔 의견을 물어봐요. 이번에도 내가 잘하고 있는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분에게 쪽지를 남겼는데 그걸 사진으로 찍어서 깜짝 놀랐어요. 무슨 콘셉트 같잖아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진상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이름이 진상이거든요. 그래서 ‘진상, 진상, 김진상!’ 이렇게 불러요. 그런데 그분이 뭐가 아직도 그렇게 불안하냐고, 이제는 안 물어봐도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잘하고 있는지 여전히 불안해서 끊임없이 확인하게 돼요.

연기 경력이 20년이 넘었는데 하면 할수록 어렵나봐요.
한 작품을 여러 번 찍는다면 조금 편해지겠죠. 그런데 매번 다른 작품, 다른 캐릭터, 새로운 사람과 작업하잖아요.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나 연기가 캐릭터마다 다르니 쉬워지거나 편해지지는 않아요. 그런 부분이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해주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싫고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오승욱 감독님이 전도연에게 많이 의지했다고 해요. 경력이 쌓이고 세계적으로 연기력도 인정받는 만큼 본인을 의지하는 감독이 더 많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감독님에게 매우 의존적이에요(웃음). 영화가 퍼즐이라면 큰 판의 퍼즐을 전체적으로 본 사람은 감독님이잖아요. 촬영은 퍼즐을 뒤집어엎고 맞추는 것 같아서 끊임없이 내가 선택한 그림이 맞는지, 잘 맞추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요. 영화는 순서대로 촬영하지 않고 뒤죽박죽 찍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 역할 안에만 빠지다보면 전체적인 감정을 놓칠 수 있어서 감독님에게 많이 의지해요. 감정이 너무 과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감독님이 생각한 그림 안에서 뭔가를 조율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무뢰한>은 감독님이 저를 믿고 많이 맡겨 준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제가 끝까지 포기하기 않도록 감독님이 많이 격려해줬어요. 촬영할 때는 너무 힘드니까 ‘그냥 이렇게 찍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거든요. 그때마다 감독님이 계속해서 김혜경이 너무 좋다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를 해줬어요. 배우를 북돋아서 캐릭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감독님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제가 감독님을 많이 의지했던 것 같아요.

<무뢰한>이 칸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것에는 전도연의 영향도 크지 않을까요?
관심의 시작은 전도연이라는 배우 때문일 수 있지만 칸영화제는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곳이에요. 전도연이라는 이름이 아주 조금의 프리미엄이 될 수는 있겠지만 <무뢰한>은 어디까지나 작품 자체로 평가 받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감독님도 좋아하고 뿌듯해 한 거고요.
칸영화제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는데 전도연이 생각하는 전도연은 어떤 사람인가요?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매우 고집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고집스러워서 좋은 순간도 있지만 살다보면 타협해야 되는 순간도 있잖아요. 그래서 고집 때문에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최근에는 우연치 않게 작품을 연이어 하게 됐지만 공백이 있을 때는 영화를 많이 봐요. 그런데 간혹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영화, 나라면 과연 저렇게 연기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어요. 그럴 때면 내가 너무 구식처럼 내 생각과 고집만 고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칸에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세계적인 감독님들의 작품을 보면서 나도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잘하고 있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격려가 됐죠. 한국에서는 전도연으로 알려져 있지만 칸에서는 아직 제 존재가 각인되지 않아서 매우 작게 느껴졌는데 거기서 받은 자극이 컸어요. 칸영화제는 배우가 상을 받은 이후에도 어떤 작품을 하는지, 어떤 연기를 하는지,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해외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다음 작품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새로운 목표 설정에 도움이 됐다는 말인가요?
목표나 꿈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어요. 목표나 꿈은 이뤄지면 끝나는 거잖아요. 그러면 또 다른 꿈을 꿔야 되고요. 또 다른 꿈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어렸을 때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요리도 잘했고 아기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배우가 꿈은 아니지만 해야 되는 일이 돼 버린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이 된 거죠. 만일 칸영화제나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는 것,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것과 같은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연기를 시작했다면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하잖아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연기를 하는 건 매우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제 목적이에요. 목표는 아니지만요.

어떤 면에서 연기가 그렇게 계속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가요?
연기도 연기지만 일하는 작업 방식이 너무 좋고 즐거워요. 물론 지금은 <접속>을 찍었던 충무로 시절과는 현장이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가끔 현장에서 7~8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힘을 모은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한 작품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좁혀가니까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매우 즐겁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계속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 있는 순간이 매우 자유롭고 좋아요. 물론 카메라 앞에서는 갇혀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마음이 자유롭고 즐거운 것 같아요.

요즘 전도연을 자극시키는 것이 있나요?
꼭 자극이 필요한가요? 자극받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글쎄요. 전도연이요? (웃음) 저 자신에게 자극받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런데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앞으로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런 면이 스스로에게 감사할 때도 있고요. 정말 너무 힘든 순간에는 조금 편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그런 순간에 내려놓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내 자신에게 매우 고마워요. 배우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는 순간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특별한 자극을 찾기보다 제 자신에게 집중하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협녀>가 아직 개봉을 못했어요. 연기를 잘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에요.
연기를 잘하면 또 얼마나 잘했겠어요(웃음). 개인적으로 굉장히 보고 싶은 작품이기는 해요. 우리나라에서 무협영화가 오랜만에 개봉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마 올해 말 정도에 개봉하지 않을까 싶어요.

<협녀> 편집본은 봤나요?
못 봤어요. 사실 편집본을 잘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최근 제가 영화를 잘 본다고 생각하는지 편집본을 보겠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몇몇 있지만 극장에서 보는 걸 더 좋아해요. 편집실에서 보면 음악을 포함한 후반작업이 아무것도 안 된 상태라 더 산만한 것 같아요. 현장을 알고 있으니까요.
전도연 특별전이 열리는데 라인업에 빠져서 아쉬운 작품이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멋진 하루>가 빠져서 안타까워요.
<내 마음의 풍금>도 아쉬워요. 어떡하죠? 너무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은데 말이에요(웃음). 빠진 작품은 모두 아쉬워요. 개봉 이후 한 번도 출연작을 극장에서 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되면 볼 수 있는 작품들은 모두 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최근 우연한 기회에 ‘젊은이의 양지’의 일부 장면을 보게 됐는데 풋풋한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20대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아무리 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예쁜 옷을 입어도 젊음에서 오는 풋풋함을 따라 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당할 수 있어 좋아 보여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서야 당당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여배우가 맨 얼굴로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각기 다른 의견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제일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요. 아직까지는 제 얼굴이 불편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이 좋아요. 이자벨 위페르가 방한했을 때 사석에서 잠시 만났는데 깜짝 놀랐어요. 화면에서 보던 모습과 매우 달랐지만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요. 진짜 배우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런 내 얼굴에 당당하고 싶어요. 이 마음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지만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인지하는 편인가요?
불편하면 무엇이 불편한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인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적어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는 파악해서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요.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하지만 남들이 원하는 것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무뢰한>의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좋은 신들이 많아요. 그런데 김혜경이 빨간 원피스를 입고 돈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 정말 좋아요. 빨간 원피스는 김혜경의 전투복이라고 생각해요. 그 장면은 그동안 김혜경이 다른 인물들과 어떻게 부딪히며 살아왔는지를 단편적으로 짧게나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그 전에는 희생하고 이용당하는 여자처럼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촬영할 때도, 영화를 볼 때도, 그 장면이 가슴 아파요. 김혜경이 자신의 가장 강한 부분을 드러낸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거든요.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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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etsu35
흐엉 언니 왜 이렇게 이쁜가요 T^T 세번째 사진 진짜 이뻐요 +_+!!
내일 영화 예매하고, 인터뷰 보러 들어왔는데.. "나 잘하고 있어?" 쪽지 얘기 보니까 더더더더 궁금하네요 T^T .
  
2015-06-11 16:45
junyeong325
와 인터뷰 참 좋네요....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이요~ 전도연씨 언제나 응원합니다 빨리 협녀랑 남과여 보고싶네요^^   
2015-06-0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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