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지혜 기자]
감기가 많이 심한가 보다.
심하다(웃음).
일정이 바빠서 그런 건가.
그렇진 않다(웃음). 호텔이 춥고 건조해서 그런 것 같다.
영화가 참 따뜻하더라. <너는 착한 아이>는 소설이 원작이던데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뭔가?
‘너는 착한 아이야’라는 원작 소설이 정말 좋았다. 내 마음이 다 구원받는 것 같더라. 학대 당한 적 없는 내가 감동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감동 받을 거라 생각했다. 원작 소설에 담긴 사회문제들과 문제의식, 감성을 영화에 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맞다. 아동학대, 아동학대의 대물림 같은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좋았다. 그런데 문제의식만 있고 뚜렷한 해결책은 없더라.
그런 사회문제들에 정확한 해결책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해결책이 없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너는 착한 아이야’ 소설에서 해결책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아동학대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영화에서 제시하고 싶었다.
어떤 실마리를 말하는 건가?
영화에서 ‘오카노’ 교사는 아이들에게, 가족들에게 안기고 오라는 숙제를 낸다. 바로 이거다. 사람은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야 한다. 물론 ‘그렇게 작은 일이 무슨 해결책이 될 수 있겠어’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은 스킨십 하나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게 사람이다. ‘미즈키’와 '오오미야'도 마찬가지다. 오오미야는 미즈키가 자신의 딸에게 매를 드는 순간 미즈키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미즈키가 오오미야의 손길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자신을 지켜 봐주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다는 것이 불행을 극복하는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을 지켜봐 주는 타인의 시선이다. 오오미야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학대 당했다. 그렇지만 이웃집 할머니가 그녀를 예뻐해 줬다. 집에 들여서 밥을 먹이기도 하고 ‘넌 예쁘고 소중한 아이야’라며 응원해주기도 했다. 오오미야는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학대를 버티지 못했을 거다. 비록 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오오미야의 남편은 초등학교 교사다. 너스레를 떨면서 장애아를 돌보는 선생님이 오오미야의 남편이다. 오오미야가 밝게 지낼 수 있는 건 남편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채워져 있어서일 거다. 자신을 지켜봐 주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란 건 오오미야의 할머니나 남편처럼 내게 따뜻하게 다가와 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 미즈키는 혼자서 학대를 견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혼자다. 미즈키의 남편은 해외 근무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미즈키가 남편에게 자신이 학대 당했던 사실을 고백했을까? 그렇진 않을 거다.
곁에 아무도 없는 미즈키가 가엾다. 미즈키가 어떤 학대를 당했으리라고 보나.
학대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아마 ‘미즈키’는 버릇을 들인다는 명목 아래 학대 당했을 거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 해라, 옷을 갖춰 입어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 하는 식으로.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집임에도 미즈키의 집은 정리정돈이 잘 돼 있고 옷차림도 정갈하다.
원작 소설 ‘너는 착한 아이야’에서 미즈키는 밖에서만 웃는 엄마로 나온다. 공원에서는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낳은 아이를 학대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차분한 엄마 정도로만 표현돼 있더라. 원작 소설의 설정을 드러냈다면 영화가 조금 더 친절했을 텐데.
한국에서는 ‘웃는 엄마’로 번역돼 있지만 일본 원제는 ‘예쁜 아이’다. 원작소설의 5개 단편 중에 3개를 선택했다. 신입 교사 이야기, 아이를 때리는 엄마 이야기, 치매 할머니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머지 두 편은 세 가지 이야기에 덧붙여 녹여냈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여러 인물의 삶을 그리기가 너무나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꼭 넣어야 할 이야기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미즈키의 과거사가 빠졌다. 시간이 한정돼 있어서 미즈키의 과거를 회상신으로 삽입할 수도 없었다. 각 캐릭터의 과거사를 친절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오오미야가 미즈키에게 손을 내민다는 부분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나는 좀 다르다, 우리 가족은 좀 다르다,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 주변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정상인데 우리 가족만 다르다는 느낌이 무의식 중에 배어 있었다. 사춘기가 되고 나서는 정상적인 가정, 일반적인 가정이란 건 뭘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던 ‘나’ 에게 의문을 갖게 됐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정상적인 가족, 보통 가족이란 건 없단 걸 알게 됐다. 어떤 가족이든 한 두 개의 문제는 가지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 만큼의 유대감도 갖고 있는 거다. 각양각색의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내 영화에는 내가 품어왔던 가족에 대한 의문과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고민들이 반영돼 있다. 각양각색의 가족들을 그린 영화를 만들면서 나 자신의 가족관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신의 가족관은 뭔가?
귀찮은 거? 성가신 거(웃음)? 그럼에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 해야 할 말은 안 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는 게 가족인 것 같다. 나는 도쿄에 살고 있지만 부모님은 간사이 지방에 살고 계신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을 때는 고맙고 그리운 존재처럼 느껴지다가도 막상 만나면 성가시게 느껴진다(웃음). 부모님 댁에 사흘 정도 머무른다고 하면, 첫째 날은 서로 반겨준다. 이튿날이 되면 ‘됐어, 됐어’ 하며 건성으로 대하고 사흘째가 되면 ‘이제 빨리 가’ 한다. 그럼에도 서로 끈끈한 유대감을 느낀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면서 깜짝 놀랐다. 그 동안은 가족이란 건 떨어져 있으면 그립다가 만나면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생글생글 웃고 말다툼도 안 했다. 시댁의 분위기가 정말 따뜻해서 처음에는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남편이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 남편은 자존감이 높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칭찬을 받으면 ‘아이고, 아니에요, 뭘요’라고 반응하는 데 반해 남편은 ‘고맙습니다’ 하면서 좋아한다. 우리 부부만 봐도 가족이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지 않나.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자존감이 높다, 이 말이 참 인상적이다. 아동 심리학에서도 이 부분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어제 일반 시사회를 마치고 시네마토크를 하면서 한국의 중앙아동기관장이 학대 당한 아이들은 늘 다른 사람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까, 비난하진 않을까, 겁먹은 상태라고 했다.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학대 당한 아이의 특성이라고도 했다. 학대를 당하면 자기긍정 능력,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는 거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이 말이 옳다는 걸 느낀다. 내 아이는 아직 9개월밖에 되지 않아 말이 통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며 칭찬을 해 주면 아이가 싱긋 웃는다. 이런 칭찬들이 쌓여서 자존감, 자기 긍정 능력이 된다는 걸 일상적으로 항상 느낀다.
영화에 출연한 아역들은 모두 배우가 아닌 일반 어린이들이다. 자폐증을 가진 ‘히로’ 역만 아역배우를 캐스팅했다. ‘미즈키’의 딸 ‘아야네’로 나온 '미야케 노아'도 아동극단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너는 착한 아이>에서 처음 연기했다. 오디션으로 캐스팅하고 나서도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야네가 학대 당하며 매 맞는 연기를 할 때 실제로 맞지는 않지만 행여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미야케 노아는 <겨울왕국>을 대형스크린에서 보고 자기도 엘사처럼 큰 화면에 나오고 싶어 연기를 시작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미야케 노아에게 <너는 착한 아이>에서는 예쁜 공주님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수 차례 이야기 해 줬다. 그럼에도 계속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 아야네로 캐스팅했다. 촬영 전 리허설에서도 연기를 아주 잘 해 줬다. 그런데 촬영을 마치고 나니 미야케 노아가 울기 시작하더라. 집에서 연습할 때는 아주 잘 했는데 촬영할 때는 연습 때보다 못해 속상해서 운다고 했다. 비록 서너 살의 아이지만 미야케 노아가 아야네를 제대로 연기하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미야케 노아를 믿고 가기로 했다.
일본의 유명 배우가 많이 출연했다. 캐스팅 비화가 있을 것 같다.
‘오카노 교사’ 역의 코라 켄고는 부산 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이다. 밤에 한 잔 하면서 식사하는 자리였다. 잘 생기고 폼 좀 잡는 친구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몹시 의외였다. 좋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라 켄고는 주연 배우로 성장했더라. 그런데 코라 켄고는 살인하는 역할, 살해 당하는 역할, 혹은 마음이 병 들어 있는 역할 등 삐죽하고 날카로운 역만 계속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카노 교사’ 역으로 코라 켄고를 캐스팅하면 그에 대한 좋은 첫인상을 잘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즈키’ 역의 오노 마치코는 평소부터 훌륭한 배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볼 때면 내 시선이 오노 마치코만 따라갔다. 배우 오노 마치코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역할로서 그녀를 느꼈다. 좋은 배우, 존재감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오노 마치코라면 ‘미즈키’를 어정쩡하지 않고 진지하게 소화해낼 거라고 믿었다. 오오미야 역의 이케와키 치즈루는 일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평가 받고 있다. 전작 <그곳에서만 빛난다>로 함께 작업하면서 이케와키 치즈루가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영화든, 어떤 역할이든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다. 오오미야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이 역할을 맡을 사람으로 이케와키 치즈루 외에 떠오르는 배우가 없었다.
글쎄, 지금 인터뷰하고 당신도, 통역가도 모두 여자이지 않나. 조명 같이 힘을 써야 하는 역할에서도 여성이 장을 맡는 경우도 많고 여류 감독들도 많다. 영화판에 들어선지 15년 정도 됐는데 점점 더 여자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연차가 많이 쌓인 남자 스텝이 ‘아, 그건 아니지’ 하며 어깃장 놓을 때도 있지만 대충 넘어가면서 계속 작업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건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다. 출산을 하면서 모든 계획을 없애고 제로로 만들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지금은 아이에만 묶여 있는 상태다. 언제 다시 영화를 촬영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만든 영화를 빨리 보고 싶을 뿐이다. 아, 한국에 내 전작 <그곳에서만 빛난다>가 개봉했으면 좋겠다. 한국 사람들은 아마 좋아할 거다.
최근에 즐거웠던 일은?
그러고 보니 가족과 같이 해외로 여행을 간 게 이번 한국 방문이 처음이다. 부부가 같이 해외에 여행을 온 것도 처음이다. 아, 여행 아니지, 일이지(웃음). 어제가 만 39살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한다(웃음).
고맙다.
2016년 3월 17일 목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imovist.com)
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