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2014년에 촬영한 <불온한 당신>을 3년 만에 정식 개봉하게 됐다. 축하한다.
2012년 기획을 시작해 3년간 제작한 후 2015년 9월 열린 DMZ다큐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50회 정도 공동체상영을 진행해 4천 명 정도의 관객에게 영화를 공개한 상황이다. 나는 극장 개봉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오히려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개봉 요구가 많았다. 극장에 걸어야 새로운 관객층을 발굴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에게 ‘공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말이다.
제목이 하필이면 ‘불온’한 당신이다. 함의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온하다는 표현은 체제 질서에 저항한 이들에게 자주 붙었다. ‘온당하지 않다’는 거다. 촬영을 기획하고 진행하던 시기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던 때라 종북몰이가 거셌고 그것이 성 소수자 혐오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종북 게이’라는 프레임이 생겨났다. 너희는 불온한 존재이니 사회에서 사라지라고 말하는 사람과,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는 사람의 구도가 형성됐다고 본다. 그 과정을 추적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 분위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각종 집회 영상이 다수 등장한다.
촬영 중이던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예상하지 못한 사회적 재난으로 혼란한 틈을 타 누군가의 삶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라. 위기를 기회 삼아 혐오를 배양하기 시작하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는 항상 위험해진다. 각종 혐오 발언 집회를 촬영하면서 관객이 그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들이미는 성 소수자 혐오의 프레임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도 알리고 싶었다.
실질적인 비중은 반 반 정도로 생각한다.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와 광장의 혐오 집회를 교차해 이야기를 직조했다. 광장의 집회를 통해 마치 공기처럼 확산하는 혐오 분위기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잘못된 정보와 거짓말로 이루어진 그들의 목소리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박원순 서울시장을 무릎 꿇게 하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무산시켰다. 누군가의 인권을 파괴하고 공공연히 불평등을 조장하는 일이 지금 여기,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려야 했다.
촬영 당시가 2014년인 걸 감안하면, 2017년 7월 현재 상황에서는 시간적 여백이 크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정권이 바뀌고, 많은 일이 진행됐다.
2015년 9월 영화를 처음 상영할 때 관객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은 도대체 (혐오 집회를 벌이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러냐는 것이었다. 2016년 4월 어버이연합이 청와대의 사주로 집회를 열었고 전경련의 돈을 받아 실행에 옮겼다고 말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는다. ‘종북 좌빨’ 운운하며 북한 김정은을 처단하자던 어버이연합 사무국장 OOO씨가 나중에는 세월호 반대 집회를 열고, 성 소수자 혐오 집회를 열고, 국정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집회까지 열었던 이유다.
영화감독으로서, 성 소수자로서 변화를 체감하는가.
정권이 교체됐고 영화에 대한 지원도 분명히 전보다 좋아졌다. 세월호를 다루거나 정권 비판적 내용을 담은 영화는 늘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개봉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기 어려웠고, 영화제에서도 부담스러워했다. <불온한 당신>도 세 번째 시도 만에 영진위 개봉 지원을 받게 됐다. 7월 20일 개봉인데 6월 말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아 준비 기간이 상당히 촉박하지만 말이다.(웃음) 그런가 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대선 TV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나. 정권이 바뀌었지만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혐오 세력의 공격적인 언사에 버거운 느낌을 받게 될 관객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역할을 하길 바랐다. 선배님은 70년 평생을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 부정적인 질문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한 멋진 분이다. 성 소수자의 역사이자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감이 있다.
아무리 노인이 됐다지만, 성 소수자로 살아온 내밀한 지난 세월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묵’ 선생님 섭외 과정이 상당히 궁금하다.
전작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2007)로 10대 레즈비언을 다룬 적이 있다. 그때 내가 30대였는데 젊은 세대와의 교류가 참 즐거웠다. 자연스럽게 나도 나의 선배 세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도 노년 세대 레즈비언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8년부터 전국을 돌며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옛날 신문 자료를 펼쳐놓고 택시운전사나 운동선수처럼, 과거 여성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직업으로 활동한 분들을 찾았다. 두 여성이 오랫동안 함께 산 경우도 조사했다. 지방에서 공동체 상영을 진행하면 그 지역 어른들께 가서 이 동네에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 없냐고 물었다. 그렇게 집을 알게 되면 무작정 문을 두드리며 “선배님, 제가 바지씨 후뱁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무작정 찾아다녔단 말인가.
방법이 없으니까.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렇게 해서 한 명의 선배를 알게 되면 그다음엔 어느 동네에 가면 내 친구 누가 있다는 식으로 정보를 주신다. 제주부터 서울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50분 정도를 만나 직접 얼굴을 보고 인터뷰했다.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2008년부터 시작해 2012년까지 쭉 이어졌다. 그 후로 지금까지 새롭게 알게 된 선배님들은 훨씬 더 늘어났다.
취재를 시작할 때는 7~80대 선배라면 이미 현직에서 은퇴한 나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회적 커밍아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생업전선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대다수였고, 자녀를 결혼시킨 분들도 많아서 공개가 쉽지 않았다. ‘이묵’ 선배님은 성 소수자 후배들이 당당히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흔쾌히 허락하셨다.
‘이묵’ 선생님을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존경과 애정이 느껴지더라.
‘선배’와 ‘후배’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쓰는 선후배의 의미도 있지만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활용되는 용어다. 옛날에는 ‘동료인’이라는 표현도 썼다고 한다.
(하하하) 그런데 실제로 일반 관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용어에 대한 것이다. ‘선배’나 ‘후배’란 어떤 의미냐는 거다. 호칭도 어려워한다. ‘이묵’은 도대체 할머니냐, 할아버지냐, 님이냐, 선배냐.(웃음) 영화를 본 10대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합쳐 ‘할머지’라고 부르기도 했다.(웃음)
모든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용어와 호칭, 즉 언어일 것이다.
90년대 초중반에 들면서 LGBT 인권 운동이 시작됐고, 지금 사용하는 레즈비언 같은 용어도 생겨났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성 소수자 커뮤니티가 활성화됐고 나 역시 그곳에서 활동했다. 영화에 나오는 ‘이묵’ 선배님처럼 ‘바지씨’같은 호칭을 사용하던 세대는 아마 지금 나이 60세 정도의 선배들이 마지막일 거다.
일본인 레즈비언 커플 ‘논’과 ‘텐’의 이야기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기획 단계이던 2012년 당시, 우리나라 종편 채널에서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몇 차례 위기설을 보도했다. 주변 친구들끼리 모여서 진짜 전쟁이 터지면 지하철역으로 모이자는 말이 나왔다. 거기가 공식적인 대피소라더라.(웃음) 그런데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외모를 봐라, 거기 가봤자 레즈비언인 게 알려질 게 뻔한데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겠냐.(웃음) 그러니 그냥 옥상에 모여 맥주나 마시자고 말이다.
그때 일본은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진짜 전쟁은 아니지만 재난으로 인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때마침 도쿄에서 내 영화를 상영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일본인 성 소수자 친구들이 후쿠시마 이야기를 하더라. 일반 사람들은 모두 대피소로 갔는데, 성 소수자는 대체로 집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무작정 후쿠시마로 찾아갔다.
당신, 엄청 무대포다.(웃음)
(하하하) 칭찬으로 듣겠다. 고맙다. 아무튼 그렇게 후쿠시마를 찾았는데 원전 폭발의 피해와 후유증이 너무 심각해 사람들을 촬영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쓰나미가 밀려온 미야기현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렇게 ‘논’과 ‘텐’을 찾았다. 그들 집에서 한 달을 살았다.
한 달이나.(웃음)
아아 촬영을 하다 보니 그만…(멋쩍은 웃음) 그 둘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커밍아웃했다.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됐냐고 물으니, 재난 때문에 서로 떨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도 연인도 찾지 못하는 마당에 자신들을 단순한 친구 사이로 설명했다가는 상대를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내가 촬영하던 시점에도 끊임없이 여진이 일고, 쓰나미가 다시 몰려온다는 소식까지 있었으니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거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선택하면, 그에 따르는 시선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게 딜레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면 커밍아웃을 해야 하고, 커밍아웃을 하면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게다가 ‘논’과 ‘텐’이 사는 동네는 시골이고 어릴 때부터 쭉 살아온 고향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존엄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공감이 많이 되고 슬펐다. 그들의 상황이 성 소수자의 특수한 처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한 달이나 머물렀으니 훨씬 많은 촬영분이 있었다. 그들 뿐 아니라 ‘이묵’ 선배님의 삶도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낼 분량 아닌가. 하지만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메시지를 강조할지에 따라 많은 부분을 추려내야 한다. 당시에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만연하다는 것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성 소수자는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혐오를 방치하면 결국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해한다. 구성과 내용 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던지고 싶다. 변영주 감독이 영화 모니터링을 맡아주었다고 들었다.
평소에도 영화에 대한 조언을 자주 구하는 분이다. <불온한 당신>에 대해서는 에피소드 간 유기성을 강화하고 관객에게 친절해지라는 조언을 받았다. 본래는 내가 영화에 등장하거나 내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넣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의 의견을 반영했다. 변영주 선배는 GV 진행도 맡아주고 여러모로 고마움이 큰 분이다.
엔딩크레딧을 살펴보면 그 외에도 다수가 검수를 맡아줬더라.
일본인 목사이자 한국에서 활동하는 친구에게 검수를 부탁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동일본대지진 자체가 강력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논’과 ‘텐’의 이야기를 다룬 장면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살펴봐달라고 했다. 페미니스트이자 퀴어인 동시에 해외에서 공부한 학자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예를 들면.
어버이연합이 “애미애비도 없냐!”는 말을 자주 하는데, 해외 관객에게 이 말을 이해시키려면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들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나이 위계를 납득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빨갱이’나 ‘종북’ 같은 개념은 냉전 시대의 산물인데 그 용어를 현대 서구인들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해외 관객이 한국식 나이 위계를 상징하는 표현이나 이념주의적 용어를 이해 하는 편이던가.
나라마다 다르다. 독일 관객은 전체주의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빨갱이’ 같은 식의 단어는 바로바로 이해하더라. 반면 부모님도 이름으로 부르는 서구권에서는 ‘애미애비’같은 단어가 주는 느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까 불쾌하고 무례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다고 하더라.(웃음)
나를 공격하고 내 친구들을 공격하는 이야기니까 당연히 듣고 싶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커 이가 세 개나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촬영을 계속해왔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음. ‘논’과 ‘텐’이 그러더라. 일본 내 성 소수자의 삶에 대해 제대로 증언해줄 만한 사람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이다. 자신들은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경우가 좋은 것이라며,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꼭 소통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묵’ 선배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이야기가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소중히 마음에 품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아무리 정의롭고 바른 일이더라도, 때로는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앞에 나서 이야기한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동안 내 작품에 출연한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다. 그중에서도 장애를 가졌거나 성 소수자인, ‘비가시화’(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된 이들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이 모두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삶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정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닮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내가 용기를 냈다기보다는 용기 있는 그들 주변에 머무른 것이다.
앞으로도 당연히, 그런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품을 찍을 것 같다.(웃음)
미디어가 조명하는 획일화된 여성상 대신 좀 더 파워풀하고 복합적인 욕망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다. 여성들, 상당히 사랑스러우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존재다.
준비하고 있는 후속작이 있는지.
‘바지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미 상당 부분 촬영해 두었다전작을 촬영하면서 만났던 10대 레즈비언들이 이제는 30대가 됐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도 찍을 생각이다. 날 처음 만났을 때 “30대에도 레즈비언 해요?”라고 물었던 이들이다.(하하하) 이제는 당시의 나보다 더 센 언니들이 돼서 날 지켜준다. 편하게 기대고 있다.(웃음)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소재다.(웃음)
그 친구들은 내 이름을 부른다.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고들 하는데, 그 속도를 늦출 방법은 젊은 세대와 교감하는 것 뿐인 듯하다.(웃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관객에게 자신이 어떻게 소개되었으면 좋겠는가.
여성주의 다큐를 제작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레즈비언이다.
알겠다.(웃음)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다가 영화 홍보를 위해 카메라 앞으로 나오니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더라.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얼마나 민망한지, 새삼 내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웃음) 그 대단한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에 앉아있는 걸 볼 때 참 행복하다.
사진 제공_무브먼트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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