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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의 새 방향을 모색하다 <올드마린보이> 진모영 감독
2017년 11월 10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분명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인데, 저작권은 나에게 없다? 공영방송에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외주제작사 소속 PD로 경력을 쌓아오던 진모영 감독이 목격한 현실은 부당했다. 방송이라는 플랫폼을 선택하는 순간 콘텐츠에 대한 모든 권리가 방송국에 귀속되는 한국 다큐멘터리계의 고약한 관행을 순순히 따르기는 싫었다. 세계 무대의 투자자를 직접 만나 다큐멘터리 기획 취지를 설명하고, 투자금을 유치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투자자에게 작품에 대한 지분을 나눠주는 대신 자신은 저작권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는 보란 듯이 관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대중에겐 혜성처럼 나타난 다큐멘터리스트처럼 보였지만, 방송국 FD와 VJ, 외주제작사 PD 생활을 경험하며 부딪힌 국내 다큐멘터리 현실의 공고한 벽을 뛰어넘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거쳐온 그였다.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올드마린보이>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빛을 보게된 작품이다. 진모영 감독,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먼저, 독자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이하 ‘님아’)를 연출한 감독, 이라는 수식어 이상으로 당신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웃음)
그 말보다 나를 빠르게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가끔 모르는 누군가를 만날 때 나를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하면 “아, 네~” 하는 반응인데 ‘님아’를 연출한 그 감독이라고 하면 “아! 네!!!” 하는 식이다.(웃음)

관객 입장에서는 ‘님아’로 혜성처럼 세상에 나타난 영화감독으로 느껴질 텐데, 다큐멘터리스트로 살아온 시간은 꽤 오래인 걸로 안다.
제일 처음엔 방송국 FD로 시작해 잡일을 거들며 어깨너머로 영상을 배웠다. 소위 VJ라고 불리는 직업으로 6mm 카메라 촬영을 시작했다. KBS에 다큐멘터리 콘텐츠를 제공하는 외주제작사, 우리끼리는 ‘공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했고 이후 영화감독이 됐다. 그런데, 이런 명칭들이 어떨 때는 참 계급적으로 느껴진다. 은연중에 나를 PD인지, 감독인지 분류하려는 느낌이다. 마치 미켈란젤로에게 ‘네 직업을 딱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웃음) 아무튼 독립 PD, 외주 PD, 프리랜서 PD, 프로덕션 PD 등등… 방송국 PD만 아닌 모든 PD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더 명쾌하게 말하면, 역시 다큐멘터리스트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 하지만 방송국이라는 플랫폼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의미는 자기 콘텐츠로 다양한 플랫폼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예컨대 52분짜리 TV 버전, 90분이나 120분에 달하는 영화제와 극장 버전, 다운로드 서비스와 명절특집 등 부가판권 시장에 적합한 버전, 해외 방송사를 위한 버전까지 다양한 종류를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가자지구의 분리장벽보다도 높게 느껴지는 TV와 극장 사이의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에(웃음) 콘텐츠 하나를 두고 TV에서 틀 건지 극장에서 상영할 건지를 선택해야 한다. 참 낡은 구조다.
일반적으로 플랫폼에 구애받지 않고 제작, 유통하는 게 다큐멘터리계의 글로벌 스탠다드인가보다.
확실히 그렇다. 그런 시스템이 기능하는 세계를 ‘크리에이티브 다큐멘터리’라고 정의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자간 계약을 통한 국제 공동제작이다.

다자간 계약을 통한 국제 공동제작,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해주면 좋겠다.
다큐멘터리 한 편의 제작비가 5억이라면, 그 프로젝트에 투자하려는 전 세계 사람들이 피자 한 조각(투자금)을 들고 모이는 거다. 열 군데서 모이면 각자 5천만 원씩 투자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투자자는 5천만 원을 투자해 5억짜리 퀄리티의 콘텐츠를 자기 플랫폼에서 방송할 수 있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팔릴수록 자신이 보유한 지분만큼 수익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투자금을 모으려면, 연출팀과 제작사 입장에서도 투자 유치를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다.
대표적인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피칭’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전 세계 방송국이나 배급사에서 콘텐츠를 사들일 수 있는 결정권자들이 모인다. BBC나 ZDF, Arte 같은 곳이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 프로듀서, 작품 수준을 보증할 수 있는 펀드 책임자가 그들 앞에서 PR을 시작한다. 나는 아무개고, 우리는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들 예정이고, 인건비는 이 정도 소요된다. 지금까지 얼마의 투자를 따냈으니 너희들이 투자할 수 있는 규모는 이 정도다. 그런 설명이 이루어진 뒤에 개별적인 미팅을 한다.

제작 단계부터 상당히 체계적이다.
그게 ‘크리에이티브 다큐멘터리’계의 표준 제작 모델이다. 일단 만들고 나서 괜찮지? 사봐! 하는 식이 아니다. 그렇게 제작비가 2년, 3년씩 쌓이기 시작하면 국제적으로도 작품이 홍보되기 시작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투자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올드마린보이>도 그런 방식으로 제작된 건가.
물론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도 마찬가지었고, <다시 태어나도 우리>(2016)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문창용, 전진 감독의 작품인데.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창작집단 917 멤버들이다.

창작집단 917, 당신의 페이스북 자기 소개란에 게재돼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
일종의 동인 집단이다. <오래된 인력거>(2011)를 연출한 고 이성규 감독과 같이 놀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한국독립피디협회 동료들이기도 하다.

‘동인’이라 함은…
공동의 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겠지.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저작권에 관한 문제의식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방송사는 창작자에게 저작권을 주지 않다. 일종의 ‘씨받이’ 구조라서, 아이(콘텐츠)를 하나 낳게 한 다음 돈을 주고 쫓아낸다. 그 후에는 자신들이 콘텐츠 저작권의 알파와 오메가까지 다 갖는, 이상한 구조다. 콘텐츠의 모든 권리를 갖고 싶으면 그 작품의 미래 가치까지 모두 사면 되는데, 5천만 원을 주고 5억 원의 가능성을 다 묶어버리는 식이다. 그런 와중에 이충렬 감독이 <워낭소리>(2008)로 묘한 가능성을 열었던 거다.

묘한 가능성이라면, 예컨대.
방송사에게 콘텐츠를 소비 당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펀드를 구축해 자기 다큐멘터리를 전진시킬 방법을 알게 된 거다. 창작집단 917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그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단 하나라도 함께 나눈다. 새로운 영화제에서 들은 소식, 새롭게 알게 된 펀드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하고 서로의 작품 제작 지평을 넓힌다. 공유와 협력 정신이 기본 방침이다. 특히 작품 기획을 도우면 엔딩 크레딧에 ‘창작집단 917’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안 그러면 손목을 자른다. 농담이다.(웃음)

(웃음) 국내 제작 환경에서는 그런 글로벌 스탠다드가 통용되지 않으니, 창작자로서 답답한 지점이 상당히 많겠다.
플랫폼이 콘텐츠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방송사 노조의 파업이 큰 이슈인지라 아직까지 묻혀 있지만, 장차 큰 과제로 다뤄져야 할 주제다.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올드마린보이> 주인공 박명호 씨는 1순위 섭외자는 아니라고 들었다.
본래 주인공이었던 분은 섭외 당시 잠수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있던 상황이었다. 치료가 길어지면서 촬영에 함께할 수 없게 됐고, 그간 수집한 자료를 다시 살펴봤다. 최고령 잠수부, 형제 잠수부 등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박명호 씨가 ‘머구리’ 잠수부의 인생을 훨씬 풍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있을 텐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다는 상징성이 워낙 강했다.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탈북했으니까. 게다가 ‘머구리’는 대부분 가정이 파탄 나고 병들고 힘든 상태로 혼자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박명호 씨는 (화목한) 가족관계 덕분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박명호 씨 가족들의 일상생활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특히 그의 부인 김순희 씨는 말수는 적지만 존재감은 꽤 크게 느껴지더라.
실제로도 말이 많은 분은 아니다. 집안 분위기가 붕 뜨면 잘 눌러 놓고, 가장 마지막에서 버티고 있는 역할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가장 부담스러운 출연자이기도 했다.(웃음)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다에서의 촬영은 (사전에 합의된) 우리끼리 하는 일이다. 하지만 부인 김순희 씨가 운영하는 육지 횟집에서의 촬영은 손님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모든 손님이 카메라를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또 모두 싫어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구분이 되질 않으니 촬영 자체가 긴장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손님이 카메라를 보고 ‘움찔’하고 돌아가면, 그때부터 나와 부인의 관계가 쌔~해지기 시작한다. 손님이 돌아서는 순간 얼마가 날아갔는지 알게 되니까 미안해진다. 아주 어색하다. 난 누구인가, 여긴 어딘가…(웃음)

현실적인 문제다.(웃음)
사실 이런 미묘한 갈등(?)은 바다 촬영 때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수중 카메라맨이 바닷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문어가 하나도 안 나오다가 테이프 분량을 다 소진한 뒤에 잠수복도 벗어놓고 뱃전에 앉아있으면 그제야 문어가 잡혀 끌어올려 진다. 그 순간 나와 수중 촬영감독의 사이가 매우 어색해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저렇게 큰 것을 찍었다면 정말 멋있었을 텐데’ 싶은 거고 수중 촬영감독은 ‘그 타이밍을 내가 어떻게 아냐’는 거지.(웃음) 인건비가 많이 드는 촬영인데 예상치 못하게 풍랑이 닥쳐 카메라맨이 호텔에만 앉아있던 때도 있었다. 정말 속이 타더라.(웃음)
바다 촬영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로 백내장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다.
누가 그러더라. 이 나이 되면 다들 백내장이 온다고.(웃음) 내 경우에는 동해의 강렬한 자외선에 그 이유를 뒤집어씌운 거다. 아무래도 선글라스를 끼면 뷰파인더가 어둡게 보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자외선을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관계에 마음 졸이고, 눈 건강까지 희생해가며 고생스럽게 담아낸 장면들이다. 결과물을 보니 만족스럽던가.
음… 만족 못 한다. 영상이 후져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늘 더 멋진 걸 찍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어서 그렇다.

언론과 평단의 평가는 상당히 우호적이다. 당신이 SNS에 공유한 영화 기사만 봐도 그렇다.(웃음) 기자 이름까지 언급하는 성의가 인상적이던데.
명감독, 대배우의 작품도 아니고 블록버스터도 아닌 우리 작품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게 쉽지 않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써도 큰 재미를 못 보는 기사일 수도 있다.(웃음) 그런 상황에서 기사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가.

(웃음)
게다가 당신의 사생활을 다 공개한 출연자와 의리 관계라는 것도 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영화를 전할 수 있도록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감독이 맨날 SNS에 자기 영화 기사나 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기 검열을 하고 싶은 욕구가 들 때도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홍보하겠나. 절대 부끄럽지 않다.(웃음)
많은 관객에게 전해져야 할 이유가 충분한 작품이라는 것, 잘 알겠다. 어떤 관객이 이번 작품을 가장 좋아해 줄까.
처음에는 씩씩한 아버지, 가장에게 박수를 보낸다는 느낌으로 작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가족이 볼 수 있는 ‘가족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직장에서는 내 남편, 내 아내가 또라이로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위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내 가족에게 나만큼은 적어도 연민을 품어주는 게 맞지 않을까. 온종일 서 있어야 하는 판매원, 식당 서빙을 하는 사람, 질이 좋지 않은 비정규직 혹은 아르바이트까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내 가족과 주변 사람이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워낙 ‘개저씨’류의 비하 발언이 범람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삼식이’같은 종류의 유머도 있다.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유머가 자주 반복되면 분명 그것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생긴다. 허공에도 싹이 트고, 말에도 씨앗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너무나 업신여기는 유머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왜 그런 말들이 나오는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인간을 개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줌마는 지하철에서 가방 집어던지고 슬라이딩 하는 사람, 여자는 ‘된장녀’, 남자는 ‘한남충’, 애들은 ‘급식충’… 이런 말들이 권장사항은 아니다.

비하하기는 쉽지만, 따뜻하게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올드마린보이>는 참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음… 옥상에 텃밭을 가꾼다. 지금은 국화만 남았지만, 주말에는 열심히 풀을 뽑는다. 먹지 않는 옥수수를 심어두고 바람에 옥수수 잎이 삭삭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앉아있던 적도 있다.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많이 중화시켜준다. 그런 게 가장 행복하다.


2017년 11월 10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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