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인 ‘심덕수’와 ‘박평달’이 살인자를 추적하는 흔치 않은 노인 버디물 <반드시 잡는다>로 돌아왔다.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이 궁금하다.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배우는 자기가 출연한 작품을 야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으로 보기보단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로 보게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주로 (내 연기의) 아쉬운 부분이 먼저 보인다.
작품을 선택한 계기가 있을 것이다.
제작사 AD406 차지현 대표가 나를 필요로한다는 연락을 받고 만남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작품 합류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소재가 좀 와 닿지 않았다. 원작 웹툰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를 알려주기에 그걸 봤더니 ‘아 이런 작품이 나에게 왔구나’하고 이해가 되더라. 제피가루라는 웹툰 작가의 작품인데 그 사람이 쓴 작품 후기까지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게 보게 됐다.
원작 웹툰이 영화에 합류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모양이다.
물론 시나리오 변천사도 좀 있었다. 결론적으로 김홍선 감독이 웹툰을 잘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6.25를 경험하면서 주인공 ‘심덕수’에게 생겨난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다 표현돼 있다. 영화에서 그런저런 내용을 다 다뤘다면 아마 ‘심덕수 회고전’이 됐을 것이다.(웃음)
당신이 연기한 ‘심덕수’는 꼬장꼬장한 동네 노인이다. 그간 맡은 배역 중 가장 현실적인 할아버지(웃음)처럼 보인다.
그동안 ‘심덕수’정도 되는 연령층을 소화해본 적이 없긴 하다. 내 입으로 말하면 좀 그렇지만 내가 갖춘 (외적) 조건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웃음) 그럼에도 한국 영화에서 시니어의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다룬 작품이 없다고 판단해 관심을 갖게 됐다. 배우는 관객에게 새로운 인물,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 마치 음식 맛이 다양한 것처럼 배우도 이런 맛, 저런 맛을 보여주는 게 관객에 대한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한다.
언론시사회 당시 당신이 맡은 역할을 두고 ‘스크루지 영감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심덕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한 동네에 터를 잡고 남에게 손 내밀지 않기 위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열쇠 수리공 일을 계속할 정도로 경제관념이 철저하다.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만 그러다 보니 자기에 비해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안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덕수’도 월세 밀린 세입자에게 심한 말을 하고, 주변에서 보면 괴롭히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군다.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덕에 그런 인물 특색이 더욱 맛깔나게 표현된 듯하다.
주로 목포, 군산, 광주, 영광 등지에서 촬영을 했기 때문에 그 지역 분들을 보조 출연자로 섭외했는데 나에게 남도 사투리 참 제대로 쓴다고 하더라.(웃음)
<내부자들>의 주필 ‘이강희’는 지식과 권력을 갖춘 상류층으로 세상을 리드하려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완전한 소시민 역할이다. 각자 다른 색을 가진 인물이니 그들의 인생을 반영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한다.
현실에 있을 법한 평범한 소시민 노인 캐릭터를 연기해보니 어떻던가.
별거 없더라.(웃음) 몸담고 있는 사회와 주변 환경이 다를 뿐 나 역시 인생의 나이가 만만치 않은 사람 아닌가. 물론 실제 나이를 공개하고 싶진 않지만(웃음) 연기하면서 특별히 이질감 같은 걸 느끼진 않았다.
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시다.(웃음)
나이에 크게 구애받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유교적 보수성이 강하고 장유유서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주민등록증상의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 툭하면 “너 몇 살이야?” 한다.(웃음) 하지만 창작 활동을 하고 작품을 꾸려나가는 업계에서는 나이가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주민등록증 나이를 보고 ‘이 역할에 어울릴까?’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물론 큰 틀에서 나이라는 걸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화면에 나타나는 실제 모습과 그 인물이 어울리는 캐스팅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거다.
맞는 말씀이다. 이번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 상대 배우로 호흡을 맞춘 성동일에게 연기가 늘었다는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나 역시 그동안 성동일이 출연한 작품을 봐왔지 않겠나.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 같은 건 본적이 없다.(웃음) 원래 내가 칭찬을 비롯한 여러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닌데 현장에 같이 있으니 연기가 늘었다는 게 잘 와 닿더라. 주변 스탭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연륜이 꽤 있는 사람들끼리 ‘너 연기 많이 늘었다’ 하는 식으로 말을 주고받으니 재미있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난 진지하게 한 말이다.(웃음) 아무튼 성동일은 정말 앞길이 창창한 배우다.
영화 연출을 위해 비를 내리게 만들거나 바닥에 갯벌을 만들곤 했는데 그런 상황은 난도가 좀 있더라. 그 외에는 체력적인 애로사항은 거의 없었다. 다들 그렇듯 나도 건강관리를 생활화한다. 시간이 나면 스포츠 클럽에 가는 건 기본이고 허리 사이즈도 항상 변하지 않는다.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 등 전과 다르게 작품 홍보도 열심히 하시는 듯한데.
분야가 다르니 그동안은 예능 프로그램에 잘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좋은 의미가 있는 분야라 모처럼 후배들과 함께 출연해봤다. 같이 어울려보니 재미있더라. 예전에는 ‘토토즐’이나 ‘일밤’같은 프로그램에도 나간 적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말을 줄여 쓰듯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일요일 밤의 대행진’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웃음)
둘째 아들 백서빈의 영화 <산상수훈>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다.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좋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산상수훈>은 규모는 크지 않아도 독특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고 본다.(웃음) 불교의 여성 스님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종교적 라이벌인 기독교의 성경을 소재로 삼았다. 종교적인 뜻이 없는 관객이 이해하기에도 어렵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한집에 사는 아들들에게 연기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지 궁금하다.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이다.(웃음)
마찬가지다. 워낙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연기도 가르칠 수는 있고, 전문적으로 레슨을 하는 학교도 있기는 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가이드라인을 세워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부딪히고 부딪히며 길을 개척하다 보면 한 단계씩 올라서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게 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연이어 작품을 선보인 덕에 관객이 그 여파를 체감하지는 못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런던에서 ‘백윤식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었다. 내가 좋은 작품들이 좀 있지 않나.(웃음) 대학교수를 비롯한 영화계의 전문성 있는 외국인들과 함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오랜 극장에 모였다. 그런데 외신이 블랙리스트에 관한 질문을 하더라. 대한민국의 위상이 있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부끄럽고 안타깝다”는 정도만 말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특히나 곤혹스러운 질문이었겠다.
창피한 일이었다. 내 나이 정도면 독재 시절, 암울한 시대를 다 경험한 산 증인 아닌가. 당시에는 피 끓는 청년기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더욱 민감했다. 우리 후손에게는 그런 짐을 안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의사를 떠나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본다. 나도 손주가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우리 후손들은 아주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겠나 싶다.(웃음)
요즘 영화계 티켓 파워를 쥔 건 젊은 층, 특히 여성 분들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 분들까지 긍정적으로 봐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극장하고는 조금 거리감이 있는 내 또래의 중장년층들도 자신들의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이 등장하니 좋게 봐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입소문이 나길 기대한다.
앞으로도 당신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고 싶다.
힘닿는 데까진 계속하겠다. 사라질 때가 되면 멋있게 잘 사라지겠다. 퇴장하는 시기도 아주 중요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있다. 아름답고 멋있게 퇴장하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어떤 배우로 불릴 때 가장 흐뭇한가.
배우의 본분을 다하는 건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다’는 평가를 들을 때다. 좋은 연기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