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변화는 때로 상상 이상으로 고달프다. 새 얼굴을 보여주려는 각오로 촬영에 임한 배우라면 때에 따라 극단적인 시도도 마다치 않게 된다. 맡은 역할을 잘 연기해내겠다는 약속을 성실히 이행해야만 감독, 스태프, 관객에게 자기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도감>에서 연상의 여인을 꼬시는 능글맞은 제비 ‘황재민’을 연기한 엄태구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잉투기>(2013)의 잉여 청춘 ‘태식’, <밀정>(2016)의 일본 순사 ‘하시모토’, <택시운전사>(2017)의 검문소 중사역까지 주조연을 막론하고 줄곧 어둡고 진지한 역할을 맡아왔다. 의외로, 실제 성격은 수줍음이 굉장해 SNS도 하지 않을 정도. 개인적인 감흥을 공유하는 게 어쩐지 부끄럽단다. 그러니 <어른도감>의 능청스러운 끼쟁이 역할이 안긴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드러진 트로트를 불러젖혀 주변까지 흥겹게 만드는 장면에서 그는 결국 생전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들이켰다. 어마어마한 숙취에 다시는 술 먹고 연기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었다지만, 그 말끝에 은근슬쩍 스며 나오는 미소에는 맡은 바를 다해낸 자에게만 풍기는 은근한 뿌듯함이 녹아있다.
<어른도감>으로 14살 조카와 함께 살게 된 철딱서니 없는 삼촌을 연기했다. 직업은 무려 연상의 여인을 꼬셔 금전을 탐하는 이른바 ‘제비’다.
김인선 감독님이 이런 캐릭터를 나에게 제안해줬다는 게 놀랍고 또 감사했다. 아마 감독님 입장에서도 모험적인 캐스팅이었을 것이다. 그간 내가 연기해온 역할과 큰 연관성이 없는 인물인지라, 내 입장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능글맞은 역할은 아마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처음인 듯싶은데. <잉투기> <밀정> <택시운전사> 등 관객의 뇌리에 당신의 인상을 강하게 남긴 전작을 떠올려보면 더욱 낯설다.(웃음)
난생처음이다.(웃음) 장편 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대사를 소화해본 것도 처음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2017) 정도가 유일하게 대사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그건 단편 영화였다. 게다가 평소에도 그다지 ‘업’ 돼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억지로라도 밝게 보여야 하는 역할이라 스스로 걱정이 됐다. 그런 와중에 감독님은 캐스팅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시더라.
당신의 어떤 면모를 보고 확신을 얻으신 걸까.
그걸 나도 모르겠다.(웃음)
<밀정> 당시 인터뷰를 돌이켜 보면, ‘하시모토’역으로 눈도장은 찍었지만 대중은 여전히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보여줄 얼굴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건 기억이 나지만 <어른도감>의 ‘황재민’같은 역할까지 예상하고 한 말은 아니다.(웃음)
엄태구의 ‘제비’는 과연 어떤 스타일인가. 영화를 보기 전 관객에게 힌트를 준다면.
‘제비’하면 딱 떠오르는 (느끼한) 말투에 부담스러운 이미지는 멀리하자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다가서야 진짜 제비 아니겠는가.(웃음) 동네 약사 ‘오점희’(서정연)가 진심처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독특한 키스신은 언론배급시사회 당시 큰 웃음을 끌어냈다.(웃음)
하지만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굉장히 진지하게 찍었다.
조카 역으로 가장 많은 장면을 함께한 이재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는가. 극 중 역할 덕분에 줄곧 당신이 먼저 다가가야 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평소에는 잘 안 하는 행동을 연기의 힘을 빌려 저질러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둘 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지만 촬영 6회차 정도부터는 서로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친해졌다. 언론배급시사회 때 2년 만에 다시 만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친하다.(웃음)
트로트곡 ‘제비처럼’을 소화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술이 올라와 얼굴이 벌건 상태로 구성진 노랫가락을 뽐낸다.
찍기 전부터 굉장히 걱정이 많은 장면이었다. 내가 어색하면 모든 게 다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위축됐다. 대본 리딩 단계에서 감독님과 서너 차례 노래방을 갔는데 도저히 노래를 못 부르겠더라. 흥 넘치는 스태프가 함께 따라와서 일부러 분위기를 띄워주는데 그럴수록 난 더 작아지고...(웃음)
뭔지 안다. 자리 깔아주면 더 못하는 사람들, 많다.(웃음)
결국 술의 도움을 받아 흥을 끌어올려 보기로 했다. 촬영 당시 맥주 한 캔 반 정도를 먹고 연기했다.
본래 술을 못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맥주 한 캔 반에 취해버린 것 같다.(웃음) 전까지는 술 취한 장면을 연기할 때도 술을 전혀 먹지 않았다. <어른도감>에서는 어차피 술이 많이 취한 상태를 연기하는 거라 영화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술 먹고 연기하는 방식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게 됐다.
고생을 좀 했나 보다.
그날따라 밥을 거의 먹지 못하고 촬영을 했는데 술을 먹고 나니 헛구역질이 심하고 머리도 터질 것 같더라. 숙취 해소 약을 먹고 쓰러져 잤다. 다행히도 다음 신이 조카(이재인)와 동네 약사(서정연)의 ‘진실게임’ 장면이었다. (기자 주: ‘진실게임’ 장면에서 ‘황재민’역의 엄태구는 쓰러져 자는 연기를 펼친다.)
힘들게 촬영했지만, 그 장면을 보고 관객이 웃어 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딱 그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촬영했다.(웃음) 심혈을 기울여 촬영하고 나니 엄청 개운하더라. 보람도 좀 느꼈다. 그렇지만 VIP 시사회때 부모님과 지인을 많이 모셨는데, 그때는 사실 좀 도망가고 싶었다.(웃음)
친척들과 다 같이 <유숙자>(2010)를 볼 때도 도망가고 싶었다고 했는데.(웃음)
아…(웃음) <어른도감>은 그에 비하면 일가친척을 다 초대하고 싶은 영화다. (기자 주: 엄태구는 친형 엄태화 감독의 단편 <유숙자>에서 전라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를 본 엄태화 감독은 뭐라고 하던가.
아무 말도 안 하더라.
역시…(웃음)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뒤풀이 자리에도 늦게까지 있었던 걸 보면 재미있게 본 것 같다.
앞으로도 엄태화 감독의 작품에서 당신을 만나볼 수 있을까.
형 작품에 먼저 출연하겠다고 말해본 적은 없다. 형이 시나리오를 쓰고 한번 보라고 주면 모를까. 자존심상…(웃음)
(하하하)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어쨌든 캐스팅은 감독의 일이다. 내가 괜히 하고 싶다고 나서 봐야, 그쪽에서 날 쓸 생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는다. 날 쓰고 싶으면 직접 얘기하겠지.(웃음)
엄태화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인터뷰에서 형 이야기가 나오면 재미있다. 갑자기 마음이 확 편해지고, 말도 좀 막 하게 된다.(웃음)
<밀정> 이후로는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졌을 것 같은데, 실감하는가.
(한참 고민하다가) 실감한다.(웃음) <기담>(2007)으로 치면 데뷔 11년 차고, <친절한 금자씨>(2005)로 치면 그보다 좀 더 된다. 그동안 정말 신기할 정도로 차곡차곡 출연 비중을 높였다. 나를 알아봐 주는 분들도 차곡차곡 늘어난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식당에 갔을 때 주문을 하려고 “저기요” 하고 말했는데 주변에서 “맞네!” 라고 하시더라.(웃음)
워낙 독특한 음색이니…(웃음)
감명 깊었던 팬도 있다. <잉투기>를 찍고 나서 버스를 탔는데 내 앞에 서 계시던 여성분이 쪽지를 써서 주셨다. 혹시라도 아는 척을 하면 내가 불편할까봐 글로 고맙다는 말을 써 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전혀 하지 않으니, 당신을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는 소통 면에서 아쉬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안 하는 건 아니고… 작품으로 소통하는 지금이 좋다. 아무래도 너무 형식적인 말인 것 같지만 진짜다.(웃음) 내가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서 여기저기 알리는 것도 좀 민망하고 쑥스럽다. 아무래도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정말 보여주고 싶은 사진이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야, 이거 봐봐”하는 식이다. 그게 좋다.
앞으로 관객과 만나게 될 일정은.
<안시성>에서는 기마 대장 ‘파소’역을, <뎀프시롤>에서는 복싱 선수 ‘병구’역을 맡았다. ‘병구’역은 장구 소리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는 복싱을 개발하느라 힘들었다. 일단 복싱 기본기를 갖추느라 두 달 동안 하루 다섯 시간씩 복싱 연습을 했다. 배우라는 본분을 잠시 잊고 시합 준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핸드폰 속 포메라이언 사진을 보여주며) 강아지 ‘엄지’ 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키우던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간 뒤에 한동안 새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다. 부모님이 강아지와 헤어지는 걸 겁나 하셨다. ‘엄지’는 이제 키운 지 1년쯤 됐다. ‘엄지’와 같이 산책할 때가 요즘 제일 행복하다.
2018년 8월 22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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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프레인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