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문주은 기자]
2개월여만이다. <완벽한 타인>에선 서울대 출신 엘리트 변호사를 맡았고, 이번에는 소매치기를 일삼는 까막눈 ‘판수’를 연기했다.
얼마 전 <말모이> 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유학파 출신 ‘정환’역을 맡은 (윤)계상이에게 ‘여태껏 맡은 캐릭터 중 최고학력자인데 소감이 어떠하냐’는 질문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판수’는 내가 여태 맡은 역할 중 최저학력자인데, 나에겐 아무도 그런 질문을 안 하더라. ‘유해진이 까막눈을? 그래, 그럴 수 있어’하고 생각하는 거지. (웃음)
하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판수’ 역할이 잘 어울리더라.
엄유나 감독님이 애초부터 ‘판수’란 캐릭터를 나를 두고 쓰셨다고 하더라고. 우리말에 관한 작품이다 보니 말맛을 잘 살릴 것 같은 배우로 내가 생각나셨나 보더라.
엄유나 감독이 <택시 운전사>의 각본을 맡았던 만큼 두 분 간 인연이 깊겠다. 그 인연이 닿아 이번 작품도 함께하게 된 건가.
인연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작품을 선택할 수는 없다. 역할에 맡는 다른 주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택시 운전사>가 워낙 좋았으니,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궁금증이 있었고 (<말모이>가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는 만큼) 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판수’가 한글을 모르는 건달에서 점차 변화해나가는 과정을 잘 표현해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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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를 연기하며 어려운 점은 없었나.
청주에 살았는데 동네에 그런 분들이 꽤 있었다. 특히, 목공소에 있던 한 아저씨는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매일 욕을 입에 달고 살던 분이라 기억에 남아있다. ‘판수’도 좀 무능력하고 몰상식한 부분이 있다 보니 그분을 모델로 삼아 표현하려 했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들이 확실히 생동감을 부여하더라. 특히 조선어학회 회원 ‘구자영’역의 김선영과 아옹다옹하는 장면이 재밌었다. 학회 회원을 맡은 배우들과의 합은 어땠나.
학회 사람들하고는 <완벽한 타인> 때와 같은 느낌이 있었다. 술 좋아하시지, 연배 비슷하지, 특히 (김)홍파 선배와는 같은 극단 출신이거든. 또 선영 씨께서 분위기를 잘 살려주셔서 재미있게 지냈다.
윤계상과는 두 번째 호흡인데.
계상이는 <소수의견> 때도 물론 잘했지만, 그때보다 더 깊어진 것 같다. ‘판수’ 같은 역할은 사실 감정대로 표현하면 되는데, 계상이가 맡은 ‘정환’은 감정을 숨겨야 하는 인물이거든. 본인도 큰 도전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욕심을 내며 적극적으로 했다. ‘만약 내가 가수로 활동을 한다면 계상이가 배우로서 내고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본업이 가수였던 사람이 배우로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이 분명 어려웠을 거고 그만큼 대단하다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특히 술이 많이 늘었더라고. <소수의견> 때는 모처럼 기분 내려고 하면 얼굴이 빨개졌었는데. (웃음) 같이 세월을 먹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동지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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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란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극 중에서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다. 특히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어학회를 다시 찾아가 힘을 보탠다는 결단은 일반인으로서는 결코 내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했나.
변화가 급작스럽다면 관객분들도 거부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판수’가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충분히 납득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가 애초에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들의 학비 때문이었고, 학회 활동을 그만둔 것도 아이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마지막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다. ‘판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딸 ‘순희’다. 그가 학회 활동에 다시 참여하는 것은 ‘순희’가 좋아하는 한글 이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자, 보잘것없는 아비로서 아이한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거지.
그럼 만약 ‘판수’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나.
나 때문에 아들이 징용에 끌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처음에 ‘판수’가 그랬듯 학회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다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뒤 마음 한쪽에 계속 뭔가 남아있겠지. 그러면 양심상 편하게 집에서는 못 있을 거다. ‘판수’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런 분들이 많았을 것 같다. ‘판수’처럼 어떤 적극적인 행동에까지 나선 건 아니라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낸 분들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개인의 양심 혹은 용기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그러고 보면 <말모이>와 <택시 운전사>의 엔딩이 비슷한 결이다.
역사 속 희생된 분들을 한 번쯤 떠올려보게 하는 결말이랄까. 그런 공통점이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 생각한다. 오락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쓰신 분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파’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전을 찾아보니 신파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새로운 연극 사조’를 뜻한다고 나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극’이란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신파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억지 전개로 눈물만 쥐어짜게 만들면 안 되겠지만,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가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그런 전개가 영화의 메시지 전달하기에 효과적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전에 ‘신파’의 뜻을 휴대폰으로 찾아본 건가.
맞다. 아무래도 <말모이>하면서 우리말에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됐다. 우리는 현장에서도 일본어를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했다. 보통 ‘와꾸를 딴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넓은 그림 한 번 가시죠’라고 말을 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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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의 유해진도 궁금하다. 배우는 고생스러운 직업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을 거다.
상황에 맞는 말을 찾았을 때 기분이 참 좋다. 어떤 의미냐 하면, <말모이>에서 ‘판수’가 ‘정환’에게 더 이상 학회 활동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판수’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미안해요. 힘들 때 이래서”다. 원래는 없던 대사인데, 동지였던 누군가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미안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말은 인터넷에서 찾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계속된 생각 끝에 운 좋게 찾아낸 대사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영화의 색깔에 맞는 적절한 말을 발견해내는 것이 즐겁다.
그러면 <완벽한 타인> 찍을 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나.
꽤 있었지. 예를 들어 대본에 일본 고양이 캐릭터 ‘키티’가 나오는데 나한테는 딱 와 닿지 않더라고.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아 그 왜 얼굴 새하얗고 대가리에 리본 달린 고양이 있잖아”란 대사를 그렇게 찾아낸 거다. (웃음)
그런 디테일이 캐릭터를 완성하는 것 같다. 후반부에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직접 쓴 건가.
맞다. 아무래도 미술팀에 맡기면 마음이 좀 덜 간다. <무사>의 김성수 감독님이 연필을 되게 독특하게 쥔다. 한글 쓰는 데 서툰 효과를 내기 위해 그분을 흉내 냈다.
정작 힘들었던 것은 후시 녹음이었다. 편지 속 어투가 ‘판수’는 잘 쓰지 않는 문어체였거든. ‘판수’답게 읽으면 영화 후반부에 산통이 깨지는 거 같고,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게 읽으면 그의 색깔이 사라질 것 같았다. 짧은 분량인데 결국 첫째 날에는 못 끝내고 며칠 뒤에 다시 가서 그 부분만 녹음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욕심은 없나.
사실 이미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건 같다. 나한테 뭐가 또 나오겠나. (웃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겠다기보다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에 충실하게 녹아드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차기작이 궁금하다.
봉오동 전투를 다룬 원신연 감독의 <전투>다. 촬영 막바지 단계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자전거 타는 게 소소한 행복이라 답했는데 여전한가.
요즘은 뛸 때, 걸을 때 행복하다. 답변이 매번 그 주변을 맴돈다. (웃음) 그게 사실이니까.
2019년 1월 8일 화요일 | 글 문주은 기자( jooeun4@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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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