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서정환 영화 칼럼니스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과 감성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켜왔던 지성원은 결코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씩 행보를 이어온 배우였다. 배우로서 열정을 갖고 늘 노력하는 것, 꾸준한 시도의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해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냉혹한 현실과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만, 비관하며 체념하거나 수긍하며 안주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조금씩 개척해나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지성원이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기획과 제작을 병행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다년간의 준비를 거쳤고,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상태다. 다가올 미래의 변수를 두려움보다는 흥미롭고 설레는 도전으로 채워보려 한다.
<미국인 친구> 인터뷰 당시 황금희라는 본명을 사용했는데 다시 지성원으로 돌아왔네요.
그러니까요. 배우는 연기가 중요하지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다, 본명이라도 괜찮다, 당당하게 큰소리쳤는데(웃음). 혼자 활동하다 2년 전 지금 소속사에 들어갔는데, 아침드라마를 끝내고 회사 대표님이 방송국을 다녀도 지성원은 아는데 황금희는 모르더라는 거예요. 지성원이라는 이름을 오래 사용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더라고요. 심지어 오랜만에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황금희라는 이름으로 불리니까 기자분들이 아무도 기사를 안올리는 거예요. 올해 부산영화제도 2년 만에 갔는데 지성원이라고 하니까 기사가 올라오더라고요.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바로 꼬리 내리고 다시 지성원으로(웃음).
아침드라마에 출연했어도 바뀐 이름을 각인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드라마가 6개월 이상 방영됐고 황금희가 포함된 제목으로 인터넷에 다시 보기 클립들이 계속 올라오다보니 황금희라는 이름이 금방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어요.
아침드라마를 시청하시는 분들이 주로 어머님들이잖아요. 대부분 배우 얼굴이나 극 중 배역으로 알아보고 기억하지 배우 이름까지 기억하는 경우들은 많지 않죠.
어머님들이 많이 알아보는데 주로 극 중 캐릭터 이름인 사라박, 박미숙으로 알고 계시죠. 아침드라마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지 몰랐어요. 종영한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알아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다시보기로 ‘이산’을 보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고요. 영화보다 드라마 때문에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요.
‘자명고’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했어요.
영화를 주로 하다 오랜만에 드라마를 했는데 게다가 아침드라마라 연기를 대사 위주로 하는 것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작가님이 잘 못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웃음). 이해가 안돼서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요. 촬영을 진행하면서 시청자들이 대사만 듣고도 전체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수능시험 보듯이 대사를 외웠어요. 그러면 빨리 쏟아내고 싶은 거죠. 대사를 잊어버릴 것 같으니까. 녹화 끝나고 다 쏟아내면 시험 문제를 다 푼 것처럼 속이 후련해지더라고요.
그래도 금방 적응했나보네요.
드라마와 영화는 매체가 다르다보니 연기도 다른 지점들이 있긴 해요. 못할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 많은 대사 치면서, 카메라 어디 있는지 불 들어오는 거 보면서, 상대 배우 리액션 보면서, 내 얼굴은 멀쩡히 나오나 체크하면서(웃음), 그걸 다 하고 있더라고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해봐야만 아는 부분들이 분명 있거든요. 영화만 했다면 드라마의 매력이나 힘든 점들을 아마 몰랐을 테니까요.
일일드라마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 않은 과정이죠.
그동안 영화를 10편정도 하면서 쌓여 온 것들이 있어요. 영화는 리얼하잖아요. 느껴야 연기가 되잖아요. 영화나 연극을 주로 한 분들은 드라마의 즉흥성 때문에 처음에 어려워하거든요. 그 부분을 극복하기위해 촬영 전부터 감정을 잡고 있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촬영에 들어가니 영화를 할 때처럼 제가 느끼고 연기할 수 있더라고요. 보는 분들도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고요.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똑같이 느끼고 전달할 수 있구나, 이번 드라마 작업을 통해서 알게 돼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와 드라마 연기를 볼 때 감정선의 무게감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드라마는 매 신마다 중점이 되는 감정을 강조하는 연기에 아무래도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면, 영화는 극의 흐름 속에서 인물 감정의 연속성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한번은 드라마에서 오열하는 장면을 찍는데 너무 오열하니 눈물이 안나요. 너무 감정이 격해서 가슴을 치며 울었는데 콧물만 쏟아지더라고요. 근데 그 장면이 그렇게 슬퍼 보였다는 리뷰가 많이 올라왔어요.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느껴지는가, 인 것 같아요.
배우마다 다양한 감정 표현이 가능할 텐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쁘거나 보기 좋은 그림만을 위해 천편일률적인 감정 표현을 요구하는 연출자들이 있다 보니 배우의 연기 폭을 제한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배우가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그 배우의 모습과 감정을 보고 느껴야하는 것 같아요. 물론 보여주는 신도 있지만, 꼭 다 보여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울지 않아도 오열하는 것보다 극적인 효과를 나타낼 때가 있어요. 그러면 관객들이 오히려 대신 울어주는 거죠.
연기는 고차원의 행위 예술인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들이 더 대단해 보이는 것 같고요.
배우고 감독이라고 해서 이론적으로 모든 것을 정확히 분석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연기하는 사람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보는 분들이 평가하는 거죠. 점점 나이 들면서 연기도 배우는 과정이지만 인생도 안 살아봤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발전할 수 있는 것 같고요.
<미국인 친구> 개봉 이후로 이미 촬영을 마쳤던 <애비> <숲속의 부부>가 늦게나마 개봉을 했는데요, 우려하던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를 선호하는 배우라는 선입견이 더 굳어진 건 아닌가 싶어요.
어릴 적부터 상업영화보다 어렵고 심각한 영화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뭘 알고 본 것도 아닌데 뭔가 울림이 있었다고 할까요. 클래식을 전공했는데 예고 다닐 때 유일한 낙이 플루트로 영화 음악 연주하거나 비디오방에서 예술영화 보는 거였어요. 친구들은 주로 TV 보고 연예인 이야기, 농구 선수 이야기했거든요. 저는 그런 것들이 관심 밖이다 보니 영화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어요. 저만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제가 생각해도 특이한 아이였어요(웃음). 전공을 바꿔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SBS 공채로 선발돼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지만 늘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방법을 몰랐고 매니저와 소송에 휘말리면서 불신은 커지고 기회는 얻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자명고’까지 힘들게 작업하다 건강상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드라마는 더 이상 못하겠다, 활동을 그만뒀는데 마침 영화 기회가 오더라고요. 그렇게 <하모니>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하게 됐어요.
운명 같은 만남으로 느껴졌겠네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시나리오는 단박에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이건 꼭해야한다, 이건 운명이다. 엄마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영화 데뷔는 늦었지만 나도 칸영화제 가고 할리우드에서도 오라고 할지 어떻게 알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라고요. 제가 큰소리 잘 치거든요(웃음). 엄마는 너는 뭘 밀고 만날 큰소리냐고 하셨는데, 정말 칸영화제에 가게 된 거죠. 열정이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스탭들의 영화를 완성하고 말겠다는 열정. 무인도 같은 섬에서 두세 달을 버티면서 찍었거든요. 가장 고생했지만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죠. 그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처음부터 너무 맛있는 걸 먹으면 입맛 버린다고(웃음). 첫 작품부터 칸영화제라니, 처음부터 꽃등심, 랍스타 같은 걸 먹은 거죠. 그래서 다른 감독님들이 저를 영화제용 배우, 게다가 꽃등심, 랍스타 아니면 안 먹을 것 같은 배우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 영화에 관심이 가는 건 맞지만, 그런 영화들만 고집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
그런 측면에서 상업영화 <순수의 시대>와 전작들에 비해 작품도 캐릭터도 덜 무거운 <우리 연애의 이력>은 지성원이라는 배우의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깰 수 있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성 캐릭터와 이야기 중심의 한국 상업영화에서 제 나이 대의 여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너무 한정적이고 그마저도 기회가 없어요. 비중 있는 엄마 역은 지명도 있는 배우 몇 분이 주로 맡게 되고 다른 배역은 두세 신 정도 되는 역할들인데, 굳이 제가 필요한 역할이 아니다보니 감독님들도 미안한지 주길 꺼려하더라고요. <순수의 시대>처럼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 참여하고 싶어요. <우리 연애의 이력>은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작품이에요. <미국인 친구>도 그렇고 여성 감독님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면이나 다양한 색을 잘 캐치해서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지성원이라는 배우가 다양한 시도를 원하고 있고 새로운 면들을 보여줄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결국 꾸준히 해보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시도해봐야 시행착오도 겪고 발전도 할 수 있겠죠. 물론 실력도 있고 운도 따라서 항상 화제작에 출연하고 관심 받는 배우도 있지만, 누구나 그렇진 않잖아요. 열정을 갖고 늘 노력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접전: 갑을 전쟁>에서 남편과는 드잡이하지만 딸의 눈치는 보는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감독님은 외모도 어느 정도 되고 집안도 어느 정도 살고 대학 나와서 상류층을 꿈꾸는,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로 캐릭터를 설명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 싶은 여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월세는 밀리고, 카드는 정지되고, 남편이 대기업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운전기사고. 개인적으로 사랑 없이 결혼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비즈니스로 생각하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고요. 그런 현실들을 떠올리며 연기하다보니 슬프기도 하면서 점점 화가 나서 상황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접전: 갑을 전쟁>이 먼저 개봉하게 됐지만 지성원 감독과 작업한 첫 영화는 <순이>에요.
<순이>는 스릴러 장르에 호러 요소가 결합된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장르 안에서 드라마가 중심이 되는데, 감독님의 어린 시절 경험을 이야기로 썼다고 해요. 개인적으로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는데 종교와 결합된 오컬트영화에는 흥미가 있어요. <오멘> <곡성> <사바하> 이런 영화들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런 영화들 꼭 해보고 싶어요.
이름도 같은 지성원 감독과 두 작품을 함께했어요(웃음).
감독님이 늦은 나이에 <순이>로 입봉을 하게 됐지만 열정이 대단해요. 착하고 얌전한 분이라 오히려 털털한 제가 감독님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고 있죠(웃음). <순이> 미팅 때 처음 만나서 시나리오 읽고 <오멘> 생각이 났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런 이야기하는 배우는 처음이라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오멘>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는데 어떻게 알았냐며, 첫 만남부터 그렇게 이야기가 통하는 면들이 있었어요. 게다가 이름도 같아서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고요(웃음).
<악몽>이라는 영화도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여의도>를 연출한 송정우 감독님의 차기작이고요, 오지호 선배와 작업했어요. <악몽>도 스릴러에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웃음), 장자의 호접지몽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에요.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너무 헛갈리고 묘했기 때문이에요. 오지호 선배가 극 중 감독 역할인데 계속 꿈을 꿔요. 그 꿈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거죠. 그 부분을 흥미롭게 봤어요. 명확하지 않은 혼란이랄까.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도 받았어요.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 기획과 제작 쪽으로 활동의 폭을 넓힐 계획이 있다면서요.
마동석 선배를 롤모델로 삼고 있어요.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많은 배우들이 연기와 제작을 병행하고 있잖아요. 기획과 제작도 같이 하는 배우를 꿈꾸는 거죠. <기생충>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미래는 더 다양해지고 재미있어질 것 같다고 예측하는데요, 글로벌 시장까지 대비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려해요. 영어, 중국어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고요. 고무적인 건 여성 서사,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 올해 여러 편 선보였는데요, 저도 좋은 여성 감독들을 발굴하는데 일조하고픈 바람이 있어요. 많은 여성 감독들과 일을 하고 싶고, 배우로도 좋은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요.
사진_ 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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