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가영’(정가영)과 ‘성범’(이석형)은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가영’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고 ‘성범’은 득남한 지 얼마 안 된 유부남이다. 두 사람은 전에도 이렇게 마주 앉아 술을 마셨고, 당연히 술만 마시지는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불쑥 찾아온 ‘가영’의 관심사는 이제 더는 ‘성범’이 아니라는 것. 또 다른 유부남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는 ‘가영’은 그가 세상에서 자기가 아는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추켜세운다. ‘성범’은 자신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해대는 ‘가영’이 매우 못마땅하지만, 내칠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 생각하면서 해도 돼?”라는 <하트>의 포스터 문구가 우리의 상상력에 본능적인 답을 내려 줄 것이다. 20대의 정가영 감독은 <비치온더비치>(2016) <밤치기>(2017)를 거치면서 남자에게 마구 들이대고,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덕도 그다지 없는 여자의 ‘찐한’ 매력을 보여줬다. <하트>는 소위 ‘비치(나쁜년) 3부작’으로 명명될 수 있는 이 연애 시리즈의 종결판이다. 발칙한 섹드립과 웃음 끝에 전에 없던 철학적인 질문을 집어넣은 건 그래서일지 모른다.
우리가 좋아한 정가영 감독의 작품 속 나쁜 년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아간다는 이유로 갑자기 철이 확 들어버린 재미 없는 여자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지난 27일(금) <하트>를 개봉한, 정가영 감독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힌트 하나, 그는 이제 “배려하고 노력하는 사랑의 고슬고슬한 맛”이 알고 싶다고 한다. 힌트 둘, 차기작은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난 남녀가 꽁냥꽁냥 썸을 타다가 각자의 성장을 마주하는” 이야기라는데. 이 두 단서가 그의 차기작에 절묘하게 녹아들 생각을 하니, 어째서 히죽 즐거운 웃음이 나오는 건지!
*코로나19 국면의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맞춰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비치온더비치> <밤치기>에 이어 <하트>로 일종의 ‘3부작’을 완성하셨어요. 이 세 작품을 관통하는 이야기(정서)는 무엇인지 감독님의 언어로 설명을 듣고 싶어요.
정가영식 내 멋대로 사랑하기, 아닐까요. 실제로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게 영화에도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웃음) 그러다 최근에는 배려하고 노력하는 사랑을 하고싶어졌어요. 그 고슬고슬한 사랑의 맛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극 중 ‘성범’과 ‘가영’은 각자 화장실에서 한 차례씩 귀신(?)과 마주하는데요. 호러 장면을 표방하며 두 사람에게 도덕적 일침을 가하는 짧은 장면의 삽입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부분의 연출 의도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저는 죄를 저지른 후 죄책감이 바로 왔어요. ‘에라 모르겠다’ 저지르고, ‘아 X됐다’, 그랬죠. 영화 속에서처럼 환영을 보는 건 아니지만, 그 수준의 공포감과 자멸감을 느꼈어요.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형식적으로는 <토요 미스테리>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나오는 파란 조명의 무서운 재연 장면들을 좋아하는데, 그런 연출을 해보고 싶었어요. 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촬영하면서 즐거웠고, 내 전공인 멜로에 집중하자란 확신이 들었어요. (웃음)
<하트>는 ‘비치 3부작의 종결판’이라고 소개돼 있는데요. ‘나쁜 여자’를 말해온 감독님 작품 세계관의 마무리인 건가요? 다음 작품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될지도 알고 싶어요. 현재 작업 중이신 시나리오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 영화 인생의 1막이 끝났다고 생각해요. 이십 대에 나를 지배했던 욕망과 감정을 맘껏 이야기했단 생각이 듭니다. 즐거웠고, 감사했고, 운이 좋았어요. 현재는 <서른>이란 제목의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있어요.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난 남녀가 꽁냥꽁냥 썸을 타다가 각자의 성장을 마주하는, 신선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밤치기> 당시 레진엔터테인먼트가 투자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봤었는데요. 성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강점이 있는 정가영 감독님과 레진의 협업이 흥미로웠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또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예정돼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서른>외에 예정된 프로젝트는 없어요. 얼마 전에 <밤의 문이 열린다>(2018)를 연출한 유은정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영화는 잘하는 사람이 만들 필요가 없고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문장을 보고, 힐링과 위안을 얻었어요. 언제부턴가 저도 커리어에 집착하며 조급했었는데, 영화라는 건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회가 닿으면, 누구나 언제든 만들면 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렇고요.
장, 단편을 통해 ‘가영’ 역을 연기 해오셨는데 앞으로는 배우를 섭외해 작품을 진행할 계획도 있으신지요? 앞서 단편 <조인성을 좋아하세요>(2017) 조인성 씨 목소리를 섭외하신 만큼(웃음) 앞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배우진이 궁금합니다.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함께 작업하고 싶어요. 연기를 잘 하시면 더 좋고요. (웃음) 일단 그러려면 제가 좋은 사람, 좋은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니까 매일 긴장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저와 인터뷰하는 분들께 공통으로 드리는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입니다.
매일 집 앞 중랑천을 한 시간씩 걸어요. 요즘 마음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중랑천에서 운동을 하는데, 벤치에 잠깐 놔둔 손가방이 사라졌어요. 지갑, 책, 장갑 이렇게 들어있었는데요. 손가방도 엄청 예쁜 거였고. 요리조리 찾아봐도 없길래 그냥 집에 왔어요. 별로 아깝거나 화나지 않더라고요. 지갑에 한 푼도 없었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모두에게 충만한 2020년 됐으면 좋겠어요. 피이쓰.
사진_ 정가영 감독
2020년 3월 5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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