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바람의 언덕>은 묘한 매력을 지녔다. 좋지만, 어디가 좋냐고 묻는다면 딱히 짚기 어렵다. 등장인물이 전하는 말과 감정을 느끼나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다. 규정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들꽃>(2015), <스틸플라워>(2016), <재꽃>(2017) 꽃 3부작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의 신작이다. 개봉 전 지방에서 먼저 프리미어 상영을 시작하고, 상영 후 관객과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로 새로운 독립영화 배급 방식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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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그리고 태백
거리의 아이들에 주목한 <들꽃>(2015), <스틸플라워>(2016), <재꽃>(2017) 꽃 3부작을 끝낸 후 박석영 감독은 좀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고 싶은 영화를 못 찍는 등 해소되지 못한 욕망과 관련된 것들 때문이다. 함께 산책 다니던 어머니가 “너무 힘든 영화 하지 말고, 엄마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봐”라면서 뒷주머니에서 돈을 빼 내밀었다. 그렇게 <바람의 언덕> 제작비가 일부 마련됐다. 어머니가 제작자가 된 셈이다. 제작사도 어머니 이름 그대로 ‘삼순’이라 지었다.
박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머니의 쌈짓돈을 냉큼 받아 이전 영화들과 전혀 상관없는, 심리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을 선택해 찾아갔다. ‘태백’이다. 40대 후반인 그에게 태백은 석탄 산업이 몰락한 후 쇠락한 도시의 이미지였다. 관광지로 개발된 사실을 모른 채 태백에 가 그곳의 밤거리를 걸어 다니며 도시의 공기를 호흡했다. 태백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흡사 동굴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어두운 와중에 군데군데 빛이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어 마치 모델하우스 거리 같았다. 그때, 박 감독은 전단지를 붙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밤거리를 홀로 다니며 전단지를 붙이고 환하게 웃으며 기도하는 여성, 아마도 무척 소중한 존재를 위해서리라. 그 대상은 누굴까. 그렇게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분’(정은경)과 ‘한희’(장선) 모녀 이야기를 키워나갔다.
"우리어머니 역시 극 중 ‘영분’처럼 아들이 만든 영화 홍보에 적극적이었어요. 대학로에 나가 영화가 새겨진 명함을 일일이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죠. 어머니는 아들 그러니까 내가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데 대단히 자부심이 분명한 분이에요. 한데 딜레마가 뭐냐면, 자랑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아무도 그 영화를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 직접 알리기로 작정하시고, 대학로에서 꽤 오랫동안 명함 돌리는 일을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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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과 다른 경험
<바람의 언덕>은 개봉 전 지역 커뮤니티를 찾아 상영 후 관객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그리고 맥주나 막걸리와 함께하는 2차까지 꽤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개봉관을 잡는 것도, 잡아도 오래 걸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독립영화가 모색한 대안이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커뮤니티가 주체가 되고,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를 들고 찾아간다. 유랑극단 같은 느낌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렇게 850명 정도의 관객과 만났다.
“근접해서 관객을 만난다는 게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본질은 같으나)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죠. 우리가 그저 꽃 한 송이를 그리려 했다면 그 꽃을 피우기까지의 시간이 관객의 사연을 통해 다채로워지는 느낌이랄까요.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관점이 모여 해석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배급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일반 홍보를 하기 전, 즉 영화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각각의 커뮤니티가 자체의 행사로 진행해야 하기에 두 달 정도 지역 커뮤니티를 설득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도에선 영화 커뮤니티 후원의 밤 행사로, 목포에서는 ‘시네라운지MM’ 개관 기념으로, 진주에서는 여성주의 관점 영화 상영의 일환으로, 강릉에서는 영화 평론을 쓴 후 초대하는 형식으로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했다.
“나뿐만 아니라 앞으로 독립·예술 영화가 이런 방식을 택하면 좋을 것 같아 친한 감독에게도 권유합니다. 힘들게 만든 영화가 극장에 한주나 두 주 걸리다가 사라져 버리는 현실에서 오는 열패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창작자에게도 커뮤니티에도 서로 좋은 일이니까요. 다만 수익은 기대할 수 없죠. 보통의 배급사들이 선택하기 힘든 방식이긴 해요. 수익 없이 몇 달을 매달려야 하니까요. 우리도 ‘아워스’(<바람의 언덕> 마케팅사)가 받아줘서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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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연기 나아가 자기 고백
<바람의 언덕>은 오랫동안 병상에 있던 남자 ‘윤식’이 죽으면서 추동된다. 그의 곁에서 5년 동안 간병한 ‘영분’은 그가 죽자 고향 태백으로 향한다. 남자의 아들 ‘용진’(김태희)에게는 잠시 다녀온다며 떠났지만,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태백에 도착한 ‘영분’은 젊은 시절 자신이 버린 딸 ‘한희’(장선)가 엄마를 찾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연락처를 전해 받는다. 외면하려 했으나 결국 한밤중 ‘윤식’(김준배)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한희’가 운영하는 필라테스 교습소를 찾는다. 얼굴만 보려 했는데 얼떨결에 수강 회원이 된 ‘영분’, 교습소를 나서며 전단지를 한 움큼 가방에 챙긴다. 밤거리를 홀로 걸으며 전단지를 붙인 후 환하게 웃는다.
“전단지를 붙이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시작했지만, 배우 한 분 한 분의 인생 여정과 마주하고 나눠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생각이에요. 이런 면에서 처음 시도라고 할 수 있어요. 그전에는 인물이 위에 있고, 나와 배우가 그 인물을 같이 찾고 만드는 형태로 찍었다면, 이번에는 배우의 삶을 많이 반영해 이야기를 만든 셈입니다. 그 결과 나만의 디자인이나 앙상한 플롯이 아닌 인물이 보인 것보다 다른 깊이 혹은 이면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사실 ‘영분’이 딸을 왜 버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는데 관객이 자신의 판단 안에서 다 짐작해 주세요. 이런 면에서 확실히 신비로운 경험이고, 연기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극 중 인물 안에는 배우의 실제 모습이 많이 투영돼 있다. ‘용진’역을 연기한 김태희 배우는 실제로 오랫동안 병상에서 투병 중인 아버지가 있다. 극 중 등장하는 방과 침상, 그리고 창밖 풍경 등이 모두 아버지가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택시기사 ‘윤식’역의 김준배 배우는 극 중처럼 한쪽 눈의 시력이 거의 없다. 박 감독도 나중에 촬영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이젠 극복했다면서 흔쾌히 촬영에 임했다고 전한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 딸 ‘한희’역의 장선은 집안의 장녀로 책임감이 뛰어나고 어른스럽다. ‘한희’가 필라테스 교습소를 운영하는 것은 장선 배우가 필라테스 강사로 활동한 이력 덕분이라고. 태백에 필라테스 학원이 없을 것을 우려해 찾아보니 단 한 곳 있었고 그곳에서 촬영했다. 엄마 ‘영분’역의 정은경 배우는 소녀 같다고 한다. 그때그때 기뻐하기도 우울해하기도 재밌어하기도 하는 등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
“소품도 의상도, 심지어 극 중 이름도(‘윤식’제외) 다 배우가 준비하고 직접 지었어요. 엄마가 준 선물 같은 느낌으로 기쁘게 살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큰 ‘한’에 기쁠 ‘희’를 써서 ‘한희’, 영분의 경우 1분, 2분, 3분이 아니라 영분 등 말이죠. ‘사람은 다 그 나이 때의 진실이 있다’는 ‘윤식’의 대사는 김준배 선배가 한 말입니다. 도저히 내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죠. (웃음) 영화 속 모든 사연이 실제는 아니지만, 배우들이 자기 몸과 기억을 내주면서 인물을 완성했습니다. 나도 몰랐던 지점 즉 사적 고백이 많아요. 어떤 고백과 해소의 시간이 아니었을지 짐작합니다.”
# 어머니 ‘삼순’
어머니 ‘삼순’은 일찍 박 감독을 낳았다. 덕분에 박 감독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다 기억한다. 60대 후반까지 한 인간이 여러 감정과 질곡을 감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 감독은 때때로 숨이 참을 느낀다.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일방적인 문화 안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 젊은 혹은 중년 여성에게 요구되는 많은 굴레에 말이다.
“어머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엄마라는 규정에 맞지 않는 분이었어요. 물론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충실히 다 하셨지만 말이죠. 삼순 씨는 하고 싶었던 것, 바라는 것, 사랑하는 것이 정말 다채로운 사람이에요. 아들뿐만 아니라 꽃도 운동도 삶도 언어를 배우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분입니다. 다만 엄마라는 이름의 사회적 규정에 매여 있다 보니 극 중 ‘영분’이처럼 살지 못했죠. 엄마가 ‘영분’처럼 살았다면 정말 재미있게 살았을 거예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새로운 지역을 가도 금방 친구를 사귀고 행복하게 노래 부르며 살 분인데 그렇게 살지 못했어요.”
처음엔 엄마로서 이젠 ‘삼순 씨’로서 그 삶을 바라보게 됐다는 박 감독. 지난 네 편의 영화를 하면서 ‘중년 남자가 어린 여학생들과 무슨 영화를 찍냐’는 누군가의 비난에 상처도 꽤 받았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가 목격하지 못했던 시간을 영화를 찍으면서 본 것 같다고, 어머니의 어린 날이 첫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다고 전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모두 어머니를 그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혹은 나와 가깝지 않았던 캐릭터, 사람, 공간 등에 다가갈 수 있어 영화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고집대로, 하고 싶은 대로 안 하고 말이죠. 영화는 특히나 내가 모르는 것을 하고자 했어요. 모르는 곳에 가야 끊임없이 한 발짝씩 나갈 수 있다고 느끼거든요. 영화하면서 동료가 생기고 그와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면서 나라는 사람의 이해 폭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차기작
“제주도 올로케이션으로 내년 초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바람의 언덕>이 전단지 붙이는 장면에서 시작했듯, 그런 대표적인 몇 장면을 현재 찾은 상태입니다. 떠내려오는 바이올린 하드케이스와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수녀 두 분이 중심 이미지예요. 소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수녀원에 위탁하게 된 참이고,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항구를 보며 한마디 하죠. ‘배가 들어온다고 했어’ 라고요. 심정적으로 이어져 있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 명이 웃으면 다른 한 명은 갑자기 슬픔을 느끼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장선, 정하담 배우와 함께하려고 합니다.”
2020년 5월 7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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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아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