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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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수많은 현장 행사가 미뤄지고 취소된 2020년, 지난해 한국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을 내놓은 네 명의 여성 감독이 한데 모였다. 1만여 명의 관객과 6일간의 여정을 무탈하게 소화한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다. 상영 장소를 야외로 확장하고, 게스트의 장갑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스마트폰을 활용한 방문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한 영화제는 비상한 시국에도 계획대로 <82년생 김지영> <벌새> <우리집> <아워 바디>의 연출자인 김도영, 김보라, 윤가은, 한가람 감독을 한 자리에 모았고, 그들에게 차질없이 마이크를 쥐여줬다.
네 감독은 ‘여성, 영화, 토크’라는 주제를 두고 공인된 자리에 함께 초대받았다. 자신들이 창조한 여성 캐릭터의 힘을 오롯이 이야기하고, 상대 영화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에 어떤 연유로 깊이 공감했는지 관객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나눴다. 더 많은 여성 감독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시대적 갈증을 해소할 만한 기획인 동시에, 여성 창작자가 서로를 북돋을 수 있는 설레는 경험이었다.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는 보편성이 있는가? 지나치게 자전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이다음 작품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뛰어난 능력이 빚어낸 서로의 성취를 지지하고, 그 뒤에 따르는 고민을 관객과 함께 나눈 21일 알펜시아 시네마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긴다.
박꽃 기자: 안녕하세요. 50분간의 ‘여성, 영화, 토크’ 진행을 맡게 된 무비스트 박꽃 기자입니다. 이렇게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자리에 모여 주신 관객 여러분 모습을 보니 뭔가 감동적입니다. 감독님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 소개와 인사말을 듣겠습니다.
김보라 감독: 안녕하세요. <벌새>를 만든 김보라입니다. 멀리에서, 또 이곳(강원도)에서 귀한 자리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한가람 감독: 안녕하세요. <아워바디>를 연출한 한가람입니다. 오늘 다른 훌륭한 감독님들과 함께 토크를 할 수 있게 돼 좋습니다. 좋은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윤가은 감독: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님들과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도영 감독: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입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 좋아하는 감독님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돼 떨리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꽃 기자: 먼저 오늘 저희가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말씀드릴 텐데요. 진행에 앞서, 이분들의 영화 중에 한 편이라도 보신 분은 손을 들어 주시겠어요? (관객 대부분이 손을 든다) 한 편은 다 보셨고요. 두 편 보신 분? 오, 거의 변동이 없네요. 세 편? 수는 조금 줄었지만, 반 정도는 세 편을 보셨고요. 대망의, 네 편을 다 보신 분! 여러분, 한 번 주변을 둘러보세요. 굉장히 많으시죠. 이분들께는 박수를 쳐 드려야 합니다.(웃음) 영화를 다 보신 분들은 오늘 토크가 더 재미있을 겁니다.
이 네 분 감독님이 만든 영화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들이 2019년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오늘은 이분 감독님들이 상대 영화에 나온 여성 캐릭터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인물을 한 명씩 뽑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단역이어도 상관 없고요. 예를 들어 김도영 감독님이 어떤 캐릭터를 뽑아서 이야기하면, 그 인물을 실제 연출한 감독님이 당시의 어려움, 두려움, 행복 등을 설명해주시는 겁니다.
사실 감독님들끼리도 누가 누구의 영화 속 인물을 지목할지 모르고 계세요. 혹여 내 영화 이야기는 안 나오는 것 아닐까 굉장히 걱정하고 있지만(웃음) 저로서는 오늘 이야기가 굉장히 기대되는 바입니다. (김도영 감독님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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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감독: 저는 각 영화마다 꼽고 싶은 캐릭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윤가은 감독님의 <우리집>에 나온 ‘유미’와 ‘유진’이 두 꼬맹이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 나이 또래 아이가 있는데, 좀 놀랐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대체 연기를 어떻게 시켰나.(웃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을 편안하게 연기하게 한 점이 좋았습니다. 특히 막내 ‘유진’ 캐릭터는 자칫하면 언니를 힘들게 하는 캐릭터로 묘사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모든 게 용서됐다고 할까요. 한편 ‘유미’의 속 깊은 캐릭터에 굉장히 마음이 가고 존경스럽기까지 했어요. 저는 딸 셋 중의 장녀인데, 막내 동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거의 (둘째) 동생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어요. 하지만 ‘유미’같은 언니는 아니었거든요. 감독님이 아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아이들과 잘 지내가며 영화를 찍었는지 굉장히 궁금하기도 합니다.
윤가은 감독: 엄청난 칭찬을 받은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네요.(웃음) 저는 장녀이고, 남동생이 있어요. 어릴 때는 어떤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고민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유미’에게 많이 이입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극 중 ‘유미’는 ‘하나’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동생이 돼 보는데요. 저도 어릴 때 동네 언니를 사귈 때 한 번도 부려본 적 없는 어리광을 부리면서 의지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유미’를 연기한 김시아 배우는 동생이 셋이에요. 가장 어린 동생과 나이 차이도 굉장히 많이 나는 맏언니, 맏누나죠. 동생을 책임진다는 게 어떤 건지 저보다도 몸으로 마음으로 여실히 느끼며 11년을 살아온 친구입니다. 저도 어릴 때 어지간히 애늙은이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웃음) 그 친구는 속이 너무 깊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를 신경 쓰고 있더라고요. 품성 자체도 주변에 대한 배려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이 저에게 자극을 줬어요. 그 친구와 함께 ‘유미’ 캐릭터를 만들어갔어요.
‘유진’이는 (김도영 감독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확히 그 지점이 중요했습니다. 언니들을 따라다니면서 (일종의)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 때로는 언니들에게 방해도 돼요. 그 선을 잘 넘나들 줄 아는 친구여야 했어요. 그냥 존재해서는 안 되고, 현재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충분히 알고 연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 나이에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배우가 사실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배우를 찾느라 애썼는데, 주예림 배우가 어디선가 ‘갑툭튀’했어요.(웃음) 그 친구는 외동이라 언니들과 있는 걸 정말정말 좋아했어요. 언니들이 끌어주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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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기자: 윤가은 감독님이 지목을 받고 말씀을 주셨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감독님 영화 속 캐릭터를 꼽아보면 좋을 것 같네요.
윤가은 감독: 캐릭터 이야기를 나누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꼽고 싶은 인물이 너무 많았어요. 평창에 오는 길에 정리를 해봤는데 공통으로 주인공 이름에 ‘영’자가 들어갔다는 생각만 했습니다.(웃음) 사실은, 한가람 감독님께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저는 <아워 바디>의 ‘자영’이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좋았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고민스러운 침묵이 이어진다) 이렇게 마가 뜨면 안 되는 거죠?(웃음)
설명해 볼게요. ‘자영’은 어떤 면에서 너무 저 같았어요. 영화라는 게 두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다 보니, 저에게 본의 아니게 인물의 들쭉날쭉한 면을 가공해서 ‘이 인물은 이러한 인물입니다’하고 보여주는 태도가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자영’은 그런 들쭉날쭉함을 다 보여주더라고요. 자신 안에 굉장히 다양한 욕망이 있는데, 그걸 정리하지 않은 채로 보여주고 그 모습이 바로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영화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저도 충분히 설득됐어요. ‘자영’은 그렇게 자기 욕망을 좇아 가면서도 계속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더라고요. 나는 일상에서 그런 순간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느 지점에서는 굉장히 사실적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굉장히 영화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굉장히 오랫동안 앓듯이 ‘자영’에 대해 생각했어요. 고민을 많이 던져준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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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감독: 바로 옆자리에서 다른 감독님이 제 영화를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해주시는 걸 처음 들어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웃음)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느낌입니다. ‘자영’은 굉장히 빠르게 쓰인 인물이에요. 상당 부분 저와 제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대사도 제가 잘했던 말들이거나,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말들이고요. 시나리오 자체가 술술 쓴 일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친구, 남자친구, 가족을 대할 때 조금씩 그 모습이 다른 복합적인 면이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캐스팅 전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자영’은 어찌 보면 평범하고, 어찌 보면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예요. 캐릭터가 확실히 있다기보다는, 배우가 캐스팅되면 그에 맞춰서 조금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웃고 있는 최희서 배우의 프로필 사진 속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무슨 관상이라도 보는 거냐고 하는데.(웃음) 이 얼굴이 ‘자영’이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 먼저 연락했습니다.
최희서 배우도 시나리오를 읽고 공감했다고 하더라고요. ‘자영’이는 고대 철학과를 나온 설정인데, 최희서 배우는 연대를 나왔기 때문에 주변에 ‘자영’이와 비슷한 느낌의 친구가 많다고 했습니다.(웃음)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쉬웠습니다. 최희서 배우는 본인과 ‘자영’을 비교해 이런 부분은 이해가 가고, 이런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어요. 어떤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하니 인위적이고 힘들다면서,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자기는 자신을 연기할 테니 그게 ‘자영’과 너무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 말해달라고요. 그렇게 ‘자영’이가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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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기자: 윤가은, 한가람 감독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감독님과 배우님 사이의 화학작용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한가람 감독님은 어떤 캐릭터를 꼽을지, 마음의 결정을 하셨는지요.
한가람 감독: 저는 사실, 세 작품 모두 인상 깊게 봐서 지금도 고민 중인데요. 제 옆에서 웃고 계신… (웃으며 김보라 감독을 바라본다)
박꽃 기자: 여러분, 어쩜 이렇게 짜여진 것처럼 순서대로 지목하시나요? (다같이 웃음) 좋습니다.
한가람 감독: (웃음) 저는 <벌새>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어요. 그때 <아워 바디>도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제 영화도 처음 상영하는지라 긴장된 상태인데 <벌새>가 너무 궁금해서 굳이 혼자 찾아가서 영화를 봤어요. 사실 <아워 바디>를 만들 때 어디선가 <벌새>가 탄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제 눈으로 <벌새>를 확인한 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박지후 배우가 연기한 ‘은희’의 얼굴이 그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같은 연출자로서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캐스팅을 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게 뭐였는지, (배우에게서) 어떤 면을 찾고 싶었는지요. 저처럼 관상을 보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웃음) 또 하나 가벼운 질문을 하자면, 극 중 ‘은희’는 중학생인데요. 고등학생이 됐을 땐 어떤 것이 가장 큰 고민이 될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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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 <벌새>를 꼽아 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벌새> 이야기가 없었으면 울고 싶었을 거예요.(웃음) 농담입니다. 저도 (한)가람 감독님이 최희서 배우에게 직감적으로 느낀 걸 느꼈어요. 농담처럼 관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그건 어떤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박지후 배우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좋았던 건, 오디션에서 (대사의) 행간을 굉장히 잘 읽었다는 점입니다. <벌새>는 대사가 많지 않고 그 대사 사이의 무드가 중요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요. 다른 아역 배우들은 호흡 없이 바로바로 읽는데 박지후 배우는 리딩부터 호흡을 잘 줘가면서 읽더라고요. 그때부터 느낌이 좋았어요.
그러곤 오디션이 끝나고 돌아갈 때 제가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가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뒤를 돌아보면서 “감독님” 하는 거예요. 그래요 “네”하고 대답했더니, “저는 ‘볼매’예요. 그러니까 다음 오디션에도 불러주세요. 여러 번 불러주셔도 좋아요” 하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 이 친구랑 정말 (같이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다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그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게 늘 부끄럽고 어떨 땐 수치스럽기까지 하잖아요. (패널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친구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투명하게 드러낼 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현장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그 투명한 열망과 아주 다양한 감정이 저와 그 친구가 깊게 연결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리고 ‘은희’는 아마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인터뷰에서 몇 번 이야기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학교라는 기관이 사람을 굉장히 아프게 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면접을 보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나요. 물론 행복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언제든지 어떤 무리에서 벗어나면 도태되거나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고, 실제 경험도 아팠던 생각이 나요. 그래서 항상 (무엇이든) 지나치게 열심히 했던 느낌이 있어요. <벌새>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 당시 유년의 기억을 날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윤가은 감독님의 <우리들>을 봤을 때 반가웠던 것 같아요.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은희’는 고등학생이 되면 제도 안에서 더 치열하게 고통을 느낄 거예요. 제 바람은, ‘은희’가 대학에 가면 ‘영지’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길 바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지’는 미래에서 온 ‘은희’라는 어떤 관객의 해석이 굉장히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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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이 다음 캐릭터를 손꼽을 순서가 되자) 참 신기한 게, 제가 이야기 순서를 이렇게 (차례대로) 흐르게 하려고 의도를 했거든요.(웃음) 저는 도저히 한 캐릭터만 꼽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좋은 캐릭터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짧게라도 한 명씩 다 이야기하고 싶어요.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지영’과 그의 언니인 ‘은영’ 둘 다 좋았어요. ‘지영’은 내가 방문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라 (마음이) 아팠다면 ‘은영’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때도 태도가 중요하잖아요. ‘은영’은 너무나 기분 좋게 그 이야기를 해요. 그게 좋았어요. 자찬하듯이 “학교 애들이 나 되게 좋아해”라고 말할 때 정말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학교에 다닐 때 그런 선생님이 있었고, 저에게 많은 힘이 돼 줬던 기억이 나요.
<우리집>에서는 ‘하나’가 좋았어요. ‘하나’는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이에요. 저는 올해 오지랖을 많이 부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올해 제 목표거든요. 우리는 친구 관계에서 (괜한) 오지랖을 부릴까봐 건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친구들이 어떤 선을 넘어와서 저를 위로해줬을 때, 정말 감동했어요. 어찌 보면 오지랖일 수 있는 행동인데 그 선을 뚫고 와준 순간이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하나’가 ‘유미’, ‘유진’ 자매에게 그런 행동을 (기꺼이) 한다는 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아워 바디>에서는 당연히 ‘자영’이 제일 공감됐어요. 윤가은 감독님 말처럼 저도 ‘자영’에 이입이 많이 됐거든요. 사실 영화 속 ‘자영’의 어떤 선택에 관한 비판도 있었던 거로 아는데, 저는 그 선택이 ‘자영’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의 욕망은 불균질하고, 다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요. ‘자영’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면에서 많이 공감했어요. 또 ‘자영’은 건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이잖아요. 저도 우울증이 심했을 때 몸으로서 뭔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운동을 하고자 하는 ‘자영’의 마음이 너무 와닿았어요. 그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각각의 이유로 세 캐릭터가 모두 좋았어요. 정말 정치적인 발언이 아니라(웃음) 진심으로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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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기자: 네, 김보라 감독님 혼자서…(웃음) 한 캐릭터씩 다 꼽으셨네요. 좋습니다. 지금 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관객 여러분은 <82년생 김지영> 상영이 끝난 뒤 이 자리에 함께하셨는데요. 연출자인 김도영 감독님의 캐릭터 설명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김도영 감독: ‘지영’의 모습, 환경, 그를 둘러싼 공기는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가끔은 ‘지영’처럼 그 욕망을 모른 척할 때도 있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나름대로는 씩씩하게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 마음 안에는 욕망을 감추고 있어요.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영’이가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은영’은 그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씩씩한 언니예요. 제 주변에 그런 분들이 꽤 많아요. 제가 닮고 싶은 분들이기도 합니다. 어떤 욕망을 선택하고자 할 때 그분들을 보면서 따라왔던 것 같아요.
‘은영’ 캐릭터 오디션 당시에는 저도 김보라 감독님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공민정 배우가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이 역이 너무 하고싶어요”라고요. 혹시 굉장히 작은 역이 돌아가도 될까요? 라고 물었을 때 “그래도 되지만, 정말 ‘은영’이를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아, 이 사람 ‘은영’이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그 역할을 하고 싶었겠지만 공민정 배우만이 그 이야기를 밝고 기분 나쁘지 않게, 굉장히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욕망을 순수하고 솔직하게 드러낼 때의 건강함이 기분 좋게 다가왔어요. 그 모습을 보는 게 굉장히 즐거웠고요. 한편 저도 배우였는데, 공민정 배우를 보면서 왜 그동안 내가 오디션에 그렇게 떨어졌는가를 깨닫게 됐죠.(웃음) 아, 그랬던 거구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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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기자: 저도 <82년생 김지영>에서 좋았던 캐릭터가 있는데요. 박성연 배우가 연기한 ‘김팀장’ 역할이요. ‘지영’이 다시 취업을 하고 싶어 할 때 찾아가는 직장 상사 기억나시죠? 그를 봤을 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캐릭터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물론 ‘김팀장’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죠. 커리어와 가정 사이의 어려움 때문에 후회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가면서 나보다 반 발자국, 한 발자국이라도 앞을 걸어가는 저런 선배가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감독님들께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성 감독으로서 앞서가는 선배 감독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윤가은 감독: 오랫동안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 했어요. 그때 운 좋게 학교 동아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선배님을 자주 찾아 뵙고 고민을 상담했어요. 바로 <집으로>를 연출한 이정향 감독님입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저는 너무 까마득한 후배였고, 저 쪼끄만 애가 뭘 알고 영화를 연출한다고 할까(웃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감독님은 저를 전혀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어요. 너무 반갑게 맞이해 주셨죠.
그때 선배님은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해주셨어요. 끝까지 주변을 설득해서 네가 하고싶은 얘기를 하라는 말이었는데 그게 힘이 많이 됐습니다. 그로부터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결국 영화를 만들게 됐지만요.(웃음)
영화를 만들고 개봉한 뒤 이런 자리에서 동료 감독을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아요. 다들 나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느낄 때가 있거든요. 불안하고, 힘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정말 할 수 있는 건가 고민이 많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뭔가를 제시해주기 이전에, 나만 이런 고민을 했던 게 아니고 이렇게 고민을 해도 괜찮은 거구나 확인을 할 수 있어요. 관객과 만나는 것도 너무 좋지만, 좋아하는 여성 감독님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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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감독: 저는 영화를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영화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30살 넘어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죠. 특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독립영화를 만들 때도 도와달라고 할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들이 있었고, 학교에서도 어떻게든 스태프를 구해주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상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합류해 영화와 드라마 중간의 무언가를 만들어보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되게 쉬운 일이었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때도 사실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웃음) 누군가의 돈을 받고 이미 기획된 프로젝트 안에서 감독으로서 내 역할을 수행하는 건 어려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로젝트를 함께한 감독 중에서도 제가 경력이 가장 없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피디, 조감독과 어딜 같이 가면 사람들이 제가 감독이라고 생각을 잘 못 하더라고요. 장소 헌팅을 하러 가면 현장 관리인이 “이거 학생 영화예요?”하고 물어봐요. 또 어딜 가면 “여기 감독님은 안 오셨나 봐요”라고 말하고요. 친구들이 농담처럼 완장 같은 걸 하나 차고 다니라고 합니다.(웃음) 저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 하고 다니는 게 문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고, 감독처럼 보이는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중요한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더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이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어쨌거나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이 길을 택했는데, 어떤 시나리오를 써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믿고 내 영화를 지지해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 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박꽃 기자: 너무 공감되는 이야기인데요. 감독님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지만 이제는 관객분들께 질문할 기회를 드릴 시간이네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점을 묻고 싶었다, 있으시면 손 들어주시겠어요?
관객 1: <82년생 김지영> 제작 소식이 알려지고 정유미라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택했을 때 이슈가 많이 됐는데요. 정유미 배우를 어떻게 선택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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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감독: 제가 배우를 선택한 건 아니고요, 배우가 저를…(웃음) 제가 알기로는 (정)유미 배우에게 시나리오가 전달됐어요. 그가 작품을 하고 싶어 해서 만나게 됐습니다. 처음 봤을 때 사람이 너무 맑아서 안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솔직하고 털털하다고 할까요. 그런 면 덕분에 어쩌면 ‘지영’이가 굉장히 생기 있어 보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영’은 개인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이미 어떤 상징처럼 돼버린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배우가 들어와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는데 자연스럽게 캐스팅 고민이 해결된 거죠.
관객 2: 감독님들 영화에 모두 엄마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엄마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드러내고 싶었는지 듣고 싶어요.
김도영 감독: ‘오미숙’은 이미 원작에 존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오미숙’은 ‘지영’이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지영’세대 이전 세대의 여성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가람 감독: 제 경우에는 ‘자영’이 엄마로부터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엄마는 엄마대로 ‘자영’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자영’이 그 기대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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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 어제도 박꽃 기자님과 이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한국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딸을 가스라이팅 하는 동시에 딸에게 애정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 자체가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 있고, 그중에서도 엄마라는 존재는 가부장제에 복무하고 그 안의 역할을 수행해온 여성이에요. 그가 엄마가 됐을 때는 아이에게 굉장히 사랑을 주면서 상처를 주는 말도 하죠.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아이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철저하게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굉장히 복잡한 포지션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아마 모두가 어느 정도는 엄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이 있을 거예요. <벌새>의 엄마는 ‘은희’가 오빠에게 맞는데도 오빠와 싸우지 말라고 하잖아요. 엄마는 사실은 알거든요.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라는 것을요. 그런데 그 사실을 직면하기에는 너무 아파서 차마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존재인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은희’에게 감자전을 부쳐주고,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하죠. 그게 애처롭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럴 때는 한 개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지 않는 게 중요해요. 나쁜 엄마가 아니라, 그런 복잡한 관계망과 세계 속에서 사는 또 다른 여성을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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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 저에게는 되게 어려운 질문이에요. 제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소외되어 있거든요.(웃음) 아이들 캐릭터만큼 깊이 고민하지는 못하다가, 성인 배우가 캐스팅되면 그제서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 같아요. (극 중 엄마의 역할을) 되짚어보느라 갑자기 ‘멘붕’이 왔어요.(웃음) <우리집>에 나오는 ‘하나’의 엄마는 저의 엄마를 많이 떠올리기는 했어요. 우선 일을 하는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다만 흔히 엄마는 다정하고 따뜻할 거라는 태도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싶었어요. 부드럽고 편한 엄마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기 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엄마요. 또 집 안에서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많은데 그걸 잘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까지도요. 일하는 엄마에게 그런 감정이 많으니까, 그런 지점을 배우와 많이 이야기했어요.
관객 3: 학교 수업 시간에 <우리들>을 보고 반 친구들이 다 울었어요. 그 영화 주인공 같은 상황에 놓인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윤가은 감독: 그 영화는 저의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를 꺼내서 만든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 이야기 하자고 마음을 먹었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기보다는 “나도 이랬어”, “이런 사람이 있었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다였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아프고 깊은 상처를 들여다볼 때 그게 나만의 것이라 느끼면 가장 고통스럽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떤 방식으로라도 나누는 순간 분명히 자연스럽게 위로가 생겨요.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에 대해서 상대가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요. 제가 바란 건 그런 지점이에요. 어쩌면 <우리들>은 제가 뭔가를 얻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그 순간의 내 감정을 공유하고 싶으니, 또 누구든 저에게 그런 감정을 알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요. 내 이야기를 내가 듣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나? 싶은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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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4: 여성 창작자로서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필연적으로 자기 과거의 상처나 아픔을 투영하는 것 같아요. 저도 여성 캐릭터를 조직할 때 저도 모르게 옛날 상처를 꺼내 써요. 그걸 어디까지 허락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객관적으로 써야 하는 데… 너무 몰입하니까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요. 누군가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하냐는 피드백을 주기도 해서 고민이 많습니다. 감독님들은 여성 캐릭터 쓸 때 어떻게 하셨는지, 본인만의 선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가람 감독: 저는 이미 ‘자영’에게 공감 못 하겠다는 사람을 많이 봐서...(웃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워 바디>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 단계 나아졌고 발전했다고 느꼈을 때는 내가 차마 못 쓰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까지 썼을 때 였던 것 같아요.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긴 만큼 ‘내가 이런 것까지 쓰다니...’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영화가 한 단계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윤가은 감독: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도 한가람 감독님 생각과 같은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재료로 쓸 수 있다면 너무 다행인 거죠. 그 안에 재료가 있다면, 감당할 수 있는 한 한계 없이 들여다보고 건지는 게 맞지 않을까 해요. 자전적 경험은 그대로 씬이 되기도 하지만, 재창조되기도 하니까요. 초점은 그 안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할 것인가 아닐까요.
저는 제 영화에서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이제는 뭐 고칠 수가 없으니까.(웃음) 그게 많이 아쉬워요. 그때 좀 더 용감했더라면, 아프기는 하지만 더 나를 들여다보고 어떤 걸 건져 올릴지 고민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요. 그런 면에서 <아워 바디>의 ‘자영’이 자극을 줬어요. 앞으로도 다른 분들의 영화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싶고,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김보라 감독: (한)가람 감독님의 말이 마음에 굉장히 와닿았어요. 오랫동안 기억이 날 것 같아요. <벌새>도 많이 알려진 것처럼 자전적인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들어갔어요.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요. 모든 게 똑같지는 않지만, 그 감정은 제가 그 시절에 느낀 것들이에요. 이때 세운 원칙이 있어요. 미움이 남아있지 않을 때만 이 마음을 표현하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벌새>를 만들면서 그 어느 때 보다 가족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명상을 많이 했고, 어린 시절을 재방문하면서 가족을 진짜 사랑하게 됐어요. <벌새>가 14만 관객을 모은 좋은 결과가 있기 전에 저는 이미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이 사람들(가족)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요. 혈연 가족이라서 뿐만 아니라, 제3자로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그게 굉장히 기쁜 일이었어요. 엘리슨 벡델이라는 만화가도 자전적인 내용을 그릴 때,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으면 그리는 게 아니라고 했대요.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면서도 내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묘사하자는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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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감독: 저에게는 단편 <자유연기>가 그런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그전까지는 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을 상상하고 지어내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자유연기>를 연출할 때에는 한 번쯤은 내 이야기를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일어났던 일을 처음 발표할 때는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그 얘기가 내 얘기인 걸 모두 알아서요. 그걸 모두가 본다는 게 민망했지만, 또 그걸 내놓은 순간이 굉장히 용감했던 것 같아요. “그러라지 뭐, 너희는 나의 일기장을 보렴.(웃음) 난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의외로 놀란 건, <자유연기>가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저는 배우라는 특수 직업군의 여자 이야기라 사람들이 많이 공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걸 보면서,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더 용감하게, 더 바닥까지 내려갈걸. 그런 용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른 분들의 작품을 볼 때도 자신이 드러날 때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데 주저하지 말고 끝까지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꽃 기자: 여러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네요. 감독님들이 마지막 인사할 시간을 쪼개 마지막 질문의 기회를 드렸기 때문에 인사는 간단히 생략하려고 합니다. 오늘 시간을 내주신 관객분들을 위해 같이 박수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제공_평창국제평화영화제
2020년 6월 30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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