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김종관 감독의 <조제>가 오는 10일(목) 개봉을 확정했다. 창작자가 대중을 만나기 쉽지 않은 때지만, 사회 분위기도 타인과의 관계도 모두 퍽퍽하게 느끼기 쉬운 시절을 탈 없이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건 어쩌면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한 움큼의 촉촉한 감성, 사랑일지 모른다. <조제>는 국내 관객의 애정을 듬뿍 받은 일본의 멜로 성장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4)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최악의 하루>(2015) <더 테이블>(2016)로 애틋하고 따뜻한 정서를 빚어낸 김종관 감독이 2020년 한국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새롭게 연출했다. 원작이 지닌 달콤쌉싸름한 청춘의 분위기보다 한 단계쯤 차분한 <조제>는 ‘조제’(한지민)와 ‘영석’(남주혁)의 감정만을 오롯한 눈길로 바라보는 운치 있는 멜로다. 김종관 감독은 그런 <조제>가 지금 시기의 관객을 꽤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일 거라고 말한다. 고생스럽고 불편한 외부적 요인을 모두 떼어 두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게 멜로 영화의 좋은 기능이라는 말과 함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했다. 원작 주인공은 발랄하고 도발적인 매력이 있는 편인데 <조제>의 ‘조제’의 성격은 다소 어두워 보인다. 상대역 ‘영석’보다 연상이라는 설정도 새롭다.
원작은 너무 좋은 작품이지만, 비슷한 느낌을 주는 배우를 캐스팅해서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건 배우에게도 내게도 관객에게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관점, 내 방식 안에서 만들어야 했다. <조제>의 ‘조제’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긴 세월 자신을 고립시킨 채로 살아간 사람이다. 원작에서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춘이지만 <조제>의 ‘조제’와 ‘영석’(남주혁)은 나이 차이가 있다는 점도 다르다.
장애가 있는 ‘조제’가 생활하는 특별한 집을 포함해 허름하게 보일 수 있는 공간을 정성 들여 아름답게 비춘다는 인상을 받았다.
‘조제’ 집의 디테일을 구상할 때는 내 개인적인 추억을 많이 활용했다.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부분에 관련된 오브제들이 많다. 쓸쓸하게 버려진 공간의 현실성을 살리면서도 그곳을 조명하는 순간 가장 인상 깊고 아름다운 찰나처럼 보이도록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싶었다. 미술, 조명, 사운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영화에 따뜻한 느낌이 묻어나길 바랐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에서 느낀 특유의 애틋한 영상미가 이번에도 도드라진다.
무대 위로 어떤 공간을 옮겨 놓고 그 자리를 소중하게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영화가 줄 수 있는 여러 재미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 방법으로 감동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하루>에서도 그 하루 동안 주인공에게 벌어진 일이 너무 수치스럽거나 기분 나쁜 기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럴 수 있어’하는 느낌으로 남았으면 했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낭만을 줄 수 있는 영화도 필요한 것 같다. <조제>도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나 한다.
현실적인 이유와 감정으로 이별을 택하는 원작과 달리 <조제>에서는 ‘5년 뒤’라는 자막 이후의 상황을 보여줄 뿐, 구체적인 이별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우리 영화는 서로 만나 사랑을 쌓는 과정이 길다. 반면 헤어지는 과정은 굉장히 함축적이다. 운이 좋아서 큰 이별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 사이에는 너무 다양한 이별이 있기 때문에 이미 관객은 그들의 이별 과정을 다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순간을 잘 묘사하는 것만으로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원작과 우리 영화의 다른 방향이기도 하다. 이별에 ‘왜’를 말하거나 혹은 어떤 인물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관객이 그들이 사랑했던 과정과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좀 더 생각해보기를 바랐다.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게 됐나. 국내에서 워낙 잘 알려졌고 사랑도 많이 받은 원작이라 선택까지 고민이 있었을 법한데.
<최악의 하루> 후반 작업 건으로 일본에 갔다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피디님을 만났다. 일본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리메이크했는데 한국에서는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하지 않느냐고, 또 가장 유명한 일본 영화는 뭐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러브레터>가 유명하다고 했더니 둘 중 꼭 리메이크를 해야 한다면 뭘 하겠느냐고 물으셨다.(웃음) 두 작품 모두 쉽게 리메이크하기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좋은 영화라고 했는데, 그래도 골라보라기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면 그때의 일본과 지금의 한국 분위기가 다른 만큼 내 식대로 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리메이크를 확정하고 한지민, 남주혁을 캐스팅했는데.
남주혁을 먼저 캐스팅했다. 그가 지닌 선한 성질을 이용해서 휴머니즘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개의 계절을 함께하면서 그가 ‘영석’ 역에 첨벙 들어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주혁이 빛의 영역이었다면, 한지민은 그림자 영역에 가까웠다. 연약하지만 강하고, 쓸쓸하지만 단단한 느낌이 있어야 했다.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연기였는데 한지민이 똑똑하고 깊이 있게 맡아줬다. 두 배우의 질감이 표현되면서 영화가 좀 더 개성을 갖게 된 것 같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로 함께 작업해서 그런지 서로 믿음과 호의를 지닌 것 같았다. 만남을 시작하고 사랑이 조금씩 쌓이는 완만한 곡선 끝에 하나의 큰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마음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관계 같았다.
개봉 일정을 확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확산세가 매섭다. 관객이 물리적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부담이 전혀 없는 넷플릭스에서 <페르소나>(2019)의 ‘밤을 걷다’편을 공개한 경험이 이미 있는 만큼, 창작물을 선보이는 창구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졌을 것 같은데.
극장이라는 플랫폼만 고집하지는 않는 편이고 극장, 넷플릭스, 유튜브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영화, 뮤직비디오, 연극을 만들었고 글도 썼다. 내게는 다양한 플랫폼을 찾고, 창작의 루트를 여러 갈래로 유지하면서 창작자로서 계속해서 자신을 연마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극장이 줄 수 있는 게 뭔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 이전의 수단만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권력 있는 창작자는 아닌 것 같다.(웃음)
권력 있는 창작자라…(웃음)
무성영화계에서 유성영화계로 먼저 이동한 건 대부분 새로운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무성영화계에서 이미 거장이었던 이들은 그보다 더 늦게 유성영화계로 넘어간 거로 안다. 필름 카메라 시대가 디지털카메라 시대로 변화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여전히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건 그의 영화적 권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웃음)
그런 중에 극장 개봉하는 <조제>가 당신에게, 관객에게 어떤 영화로 남길 바라나.
코로나19라는 격랑의 한복판에서 개봉하기 때문에 모든 게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 긴장 상태다. 시간이 지나봐야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 작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내 삶에 좋은 변화를 주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있다. 관객에게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주게 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게 멜로 영화의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기의 관객이 크게 만족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음…
없다고 말하지는 말아달라.(웃음)
(웃음) 항상 다음 작품을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조제>는 작업 과정도 그렇고 지금의 개봉 과정도 그렇고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긴장감이 높았던 것 같다. 사실은 지금의 내 마음이 아주 멀쩡하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고 빨리 안정을 찾아 다시 창작을 할 수 있는 평정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내 외로운 책상 앞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상상을 한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사진 제공_(주)워너브러더스 코리아
2020년 12월 7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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