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12년 차 뮤지컬 배우 이해준의 별명은 일명 ‘재모남’, 재연을 모르는 남자라는 의미다. 특별히 재연하지 않은 이유가 있기보다 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던 덕분이다. 매번 새로운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런 그가 처음으로 대형 무대에 선 작품은 대중에게 친숙한 <엘리자벳>이다. 그것도 국내 초연 10주년 기념으로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로 영화화까지 된 기념비적인 무대였다. 뮤지컬의 여제라 불리는 옥주현과 호흡을 맞춘 이해준은 의인화된 캐릭터인 ‘죽음’을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였다. 스모키 화장과 염색한 머리 등 화려하고 중성적인 분위기로, 엘리자벳에게 아름다워 보이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엘리자벳과 죽음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영화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는 뮤지컬 <엘리자벳> 10주년 기념 공연(2022)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대형 화면으로 만나니 어떻든가.
얼굴 표정이 크게 잡혀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한결 높아지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죽음’(토드)의 엘리자벳에 대한 감정이 그렇다. 자기를 거부하는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어떤 감정을 느끼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엘리자벳이 죽은 후에 죽음이 자기 가슴을 만지는데, 자기에게 심장이 있는지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때의 표정과 감정이 영화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더라. 또 공연할 때는 무대에 집중하느라 잘 몰랐는데, 영화로 보니 그 움직임이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었다. 카메라, 음향, 편집 작업을 통해 이런 동작을 비롯해 공연을 잘 반영하려고 많은 분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게 역력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공연에서 자세히 살피지 못한 부분을 영화적으로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다. 또 돌비애트모스 음향 도입으로 그만큼 현장성이 높아진 것 같다.
<엘리자벳>(2022)으로 대극장 데뷔했는데 어떻게 인연이 된 건가.
뮤지컬 <아몬드> 초연 중일 때 오디션을 제안받았다. <아몬드> 이성준 작곡가 겸 음악 감독님과 친분 있는 제작사(EMK 뮤지컬 컴퍼니) 관계자가 공연을 보러 왔는데, ‘죽음’ 캐릭터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 사실 합격할 거로 기대조차 안 했는데 캐스팅되어 놀랍기도 했고 그만큼 기쁘기도 했다.
관념이 의인화된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접근했는지. 카리스마와 무대 장악력이 필요한 캐릭터인데.
그간 각자의 해석이 달랐지만, 10주년 기념 공연의 뉴캐스트로서 나만의 캐릭터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죽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엘리자벳과 죽음의 관계성에 포커싱했다. 죽음이 유독 그녀의 곁을 맴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등에 관해 말이다. 엘리자벳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녀는 매우 불행하고 처연한 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죽음이 그녀를 데려가려 한 것은 엘리자벳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비록 자기 감정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혹은 질투인지 그 감정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녀 곁에 있고 싶어하는데 결국 그 끝은 (둘의) 자유가 아닐까 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힘들어하거나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항상 나타나 유혹하는 약간은 집착남처럼 보이게끔 한 면도 있다.
외형적으로 차별화를 둔 부분이 있을까.
‘죽음’이라고 하니까, 보통 검은 색 의상을 많이 착장하는데 꼭 죽음이라고 어두워 보여야 하나 싶었다. 저승사자 같은 모습은 너무 일차원적이라, 일단 엘리자벳에게 죽음이 아름다워 보이길 바랐다. 그녀가 평생 아름다움을 추구한 인물이라 더 그렇다. 아이돌 같은 스타일의 글리터 화장으로 화려하면서 중성적인 매력, 또 퇴페미를 갖춘 모습으로 그녀에 어필하려 했다. 외국 프로덕션의 경우, 아주 여성적인 죽음도 또 상남자 같은 죽음도 그 모습이 다양 해서, 이러한 소스를 참고삼아, 내 걸로 체화했던 것 같다.
이번 토드의 가창 스타일은 ‘락 음악’이 기본이라고.
대학로에서 뮤지컬 <아몬드> 공연할 때의 발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마도 이런 부분을 보고 오디션 제안을 주시지 않았나 싶기도. 대본에 ‘락 스타’ 같은 느낌이라고 써 있기도 했다. 그런데 대형 화면(스크린)으로 보니, 캐릭터적으로는 노래할 때의 거친 느낌이 잘 살았는데 노래 자체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현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인 것 같다. 그래도 뮤지컬을 봤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추억 여행이나 ‘아, 이렇게 표현한 거였구나!’ 하고 좀 더 디테일하게 볼 기회가 될 것 같고, 한편으로는 영화보고 뮤지컬에 매력을 느껴 공연 쪽으로 유입되는 관객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일석이조가 될 것 같다. (웃음)
10주년 기념이자 오연(다섯 번째 공연)으로, 이번 프로덕션의 마지막 공연이기도 하다. 초연부터 늘 엘리자벳을 맡아온 옥주현 배우와 파트너로 함께한 것도 의미가 크겠다.
말씀한 것처럼 초연부터 ‘엘리자벳’을 만들어 온 누나(옥주현)와 한다는 점에 크게 감사했다. 누나는 여러 버전의 ‘죽음’과 그 디벨롭 과정을 봐온 터라, 소스를 많이 주었고 나만의 죽음이 되게끔 많은 도움을 주셨다. 호흡을 맞추면서 뭘 해도 편하게 받아주겠다는 느낌을 받았고 덕분에 대극장 무대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당시 일주일에 한두 번 혼자 연습하고 또 <엘리자벳> 만하다 보니 외로움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누나와 함께라서 이런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아주 즐겁게 지방공연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의 명장면을 꼽는다면.
명장면은 마지막 부분 엘리자벨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다. 카메라 감독님이 마치 흰 슈트를 입은 천사처럼 잡아주셨다. 공연에서는 포착하기 힘든 부분인데, 죽음 뒤로 사이드 조명을 쏴서 후광을 비춰줘서 마치 찬란한 죽음으로 걸어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조명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한 장면이기도 하다.
2013년 뮤지컬 <웨딩싱어>로 데뷔했다. <엘리자벳>이 뮤지컬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겠다. 오디션 준비는 어떻게 했나.
정말 그랬다. 당시 소극장 활동을 2년 동안 쉬지 않고 하던 터라, 눈 뜨자마자 연습과 공연의 매일매일이었다. 대극장 오디션을 준비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소극장 쪽이 나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에 받은 오디션 제안이었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시기였던 것 같다. 오디션 영상은 검은 정장에 스모키 화장 등 외모적으로 소름 끼치는 컨셉으로 갔었다. (웃음)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로 활동 영역을 확장할 생각은 없나.
뮤지컬 무대가 좋아서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가 온다면 할 의향이 있다. 내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어떤 단계라고 할지, 스텝별로 밟아 가는 흐름이었는데 요즘에는 무대와 영상의 경계가 흐려진 것 같다. 약해졌다고 할지 영역을 허물면서 활동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나. 오히려 영상 연기가 공연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서로 시너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해서 유연하게 대응해 나가고자 한다.
빼어난 퇴폐미로, 담배가 매우 잘 어울리는 배우로 꼽히던데. (웃음) 지난 무대를 돌아본다면. 또 팬들과 소통을 활발히 하기로 유명하더라.
하하, 그런가. 이제 12년 차인데, 재연을 한 적이 없다. 팬들은 엄청 서운해하며 ‘재모남’(재연을 모르는 남자)이라고 부르기도! (웃음) 재연하지 않는 이유가 딱히 특별한 건 아니고, 새로운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 가령 ‘이번에는 얘 뭐지?’ 이런 느낌을 주고 싶다고 할지. 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다. 어려운 캐릭터를 하나하나 해낼 때의 기쁨이 큰 만큼 앞으로도 팬들이 생각지도 못한 캐릭터를 하는 것이 목표 중 하나다. 소극장 활동할 때는 대면으로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코로나 시기 때 뵙기도 힘들고 해서 그 이후로는, SNS나 공카 등에 소식을 전하고 있다.
‘재모남’이면 그만큼 여러 캐릭터를 만났을 텐데 특히 애착 하는 캐릭터를 꼽는다면.
어려운데… <엘리자벳>의 ‘죽음’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웃음) 인생적으로 또 작품적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만난 캐릭터라 그렇다. 뮤지컬 <아몬드>에서 아버지에게 대드는 상처받은 고등학생 역할을 했는데, 공연 기간에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공연 중 아들이 아버지한테 쏟아내는 장면을 연기하는데 실제의 내 감정이 들어가서 힘들더라. 그러던 중 <엘리자벳> 오디션을 제안받았는데 마치 아버지의 선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곧 따내고 싶었던 캐릭터였다. (웃음) 의인화된 ‘죽음’을 진짜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지난 10월 막을 내린 뮤지컬 <베르사이유 장미>에서는 ‘앙드레’ 역을 했지 않나. 앙드레 캐릭터는 어떤가. 정말 유명한 원작 아닌가.
원체 많은 사랑을 받는 유명한 작품이라 부담되는 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배우로서 그만큼 결의를 다지게 한 작품이라 좋았다. 원작은 보지 않았고, 대본으로 처음 접했었다. 연출자님이 공연에 담아내고 싶은 방향에 초점을 맞춰 파악했던 것 같다. 대본 연구를 중심으로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나름의 변주를 주었는데, 이번에 초연인 작품이라, 비교 대상이 없어서 나를 더 잘 녹일 수 있었다. 또 다른 캐스트들과 연습하며 그들의 해석을 참고할 수 있어 좋았다. 관객들은 멀티캐스트로 인해 여러 색의 앙드레를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롭지 않았을까 한다.
가벼운 질문이다. 뮤지컬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했을 것 같나.
음…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예전에 노래방 가는 것도 좋아했었다. 아마도 가수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준비 중인 공연(작품) 소개를 부탁한다.
뮤지컬 <틱틱붐> 연습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11월부터 6주 정도 공연할 것 같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동명 영화가 넷플릭스에 있어서 참고로 보기도 했었다.
사진제공. EMK 엔터테인먼트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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