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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꿈의 실현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유수연 감독
2025년 3월 17일 월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열여섯, 영화를 마음에 품었다. 그 후 34년 드디어 개봉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를 연출한 유수연 감독의 이야기다. <수궁>에 이어 두 번째 연출작인 이 영화는 여성국극 3세대 박수빈, 황지영과 1세대 여성국극인 조영숙이 함께 ‘레전드 춘향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담는다. 75년 맥을 잇고 있는,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신념이 신체로 발화되는 여성 예술인들에 대한 유수연 감독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16살 때부터 오직 영화였어요”라고 영화 사랑을 고백하는 감독.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20대,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30대를 지나 가슴에 묻어둔 꿈을 세상에 펼쳐 보인 이 영화로 드디어 전국의 관객을 찾아가게 되었다. 여성국극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유수연 감독을 만났다. 여성국극의 가치는 자신을 낮추는 ‘하심’(마음을 아래로 향하는 것으로 자신을 낮추는 행위)에 있다고. 힘든 시기에는 행복한 결말을, 어려운 소리는 듣기 쉽게, 관객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즐거움을 선사해 왔다고 전한다.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는 3세대 여성국극인 박수빈과 황지영이,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 주인공인 1세대 여성국극인 조영숙과 함께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1세대 조영숙 선생님을 비롯해 2세대 분들의 소리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짱짱해서 놀랐다.
소리는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30년은 해야 ‘조금 한다’ 소리를 듣는다. 나이 듦이 벼슬이 되는 유일한 분야가 판소리가 아닌가 한다. 1세대, 2세대 분들은 기본적으로 70년 이상 하신 분들이니 그만큼 농익은 소리가 나온다. 이 공명을 최대한 영화에 담고 싶었으나, 고스란히 전달하기는 어렵더라. 현장에서 실제로 들으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다.

드라마 <정년이>로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어느 정도 제고되지 않았나 싶다.
여성국극인들의 첫 번째 과제가 ‘여성국극’을 대중에 인지시키는 것이었는데 <정년이> 이후 이 단계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23년 2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촬영했고 당시 빨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고령인 데다 드라마가 10월에 나온다고 해서, 동시기에 개봉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편집 기간이 너무 짧았고 서둘러서 하느니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고자 했다. 지난해 <정년이> 방영 당시 3세대 예인이자 우리 영화의 주인공인 박수빈, 황지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당시 인터뷰를 100번도 넘게 한 걸로 알고 있다.

전작 <수궁>의 인연으로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가 시작됐다고 들었다.
결혼 전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또 영화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었다. 학교(동국대)에서 극영화 베이스로 석박사를 따기도 했고. 그러다가 2019년에 다큐멘터리를 제안받았다. 이렇게 힘들 줄 모르고 쉽게 접근했다가 3년이 걸렸다. 전작 <수궁>은 정의진 소리꾼이 주인공으로, 판소리 다큐멘터리가 없어서 내가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정의진 선생은 4대 국창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등 많은 힘듦을 겪었고 결혼 후에는 30년 경력이 단절된 분이었다. 그러다가 20여년 전 60살이 넘는 나이에 다시 재기하신 분이다. 이분의 역사가 우리나라 여성 소리꾼의 역사이고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소리가 이어져 온 것이다. 판소리의 미학과 가치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때 정의진 선생을 재기하도록 이끈 분이 조영숙 선생님이셨고, 그 재기 무대가 여성국극이었다. 또 14살의 박수빈이 군졸(병사)로 처음 무대에 섰기도 했다.

정의진 선생을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이렇게까지 (판소리를 위한) 완벽한 환경에 태어났지만, 여성이라서 그만둬야 했던 그 서사에 관심이 가더라. 게다가 경력 단절 30년을 이겨내고 다시 소리를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20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하며 소리는 점점 좋아지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당신이 소리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못하는 거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자식들이 알까 봐 걱정하고. 강남에 살고 있는 부자시다. (웃음) 그런데 왜 숨길까? 호기심이 생겼고, 그게 <수궁>의 시작이었다.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합동 공연 기획은 어떻게 성사되었나.
사실 처음에는 조영숙 선생을 위주로 한 영화를 생각한 터였다. 그런데 조영숙 선생을 만날 때마다 수빈, 지영 두 분이 항상 같이 있더라. (웃음) 한 번은 수빈 씨한테 전화가 왔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세대부터 3세대가 같이 하는 무대를 올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다면 그 역사적 순간을 영화에 담아보자,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 함께 많이 뛰었다. *

황지영, 박수빈 모두 어렸을 때 판소리를 배우다가 여성국극에 입문했는데 그 사정을 좀 더 알려 달라.
지영 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판소리를 들었고 그때 강사가 조영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보기에도 너무 잘하고, 원석 같은 아이라 제자로 욕심이 나셨겠지. 그는 13살 때 (춘향가) 완창을 한, 모짜르트 같은 천재과다. 수빈 씨는 14살 때 TV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너무 멋있게 판소리하는 걸 보고, 스승을 직접 찾아간 케이스다. 그 스승이 여성국극을 하는 분이셨고 마침 조영숙 선생과도 친해서 그렇게 세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까 말했듯이 수빈 씨는 14살 때부터 무대에 서면서 1세대 분들을 다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여성국극의 남녀 ‘니마이’(여성국극에서 주인공)로 여성 역할은 지영 씨가, 남성 역할은 수빈 씨가 맡고 있다. 두 사람의 뜻을 같이한 수십년 간의 동행이 한편으로는 놀랍더라.
두 분 다 1세대 연기를 직접 지켜봤고, 거기서 엄청난 매력을 느껴서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영 씨는 조영숙 선생님이 직접 제자로 선택하셨고, 수빈 씨의 경우는 선생님에게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해서 세 분의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개인적으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지영 씨는 선생님의 숨소리조차 멋있다고 할 정도로 조영숙 선생과 밀착한 관계이다. 한편으론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두 사람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다. 수빈 씨 같은 경우는 자기가 스스로 찾아왔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그때 이미 중학생이라 나름의 자의식이 형성되었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다. 바로 관객의 혼을 빼서 쥐락펴락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조영숙 선생이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대상이자, 인정받았으면 하는 스승이었고, 나아가 끝끝내 넘어야 할 산 같은 존재라 하겠다.

다큐멘터리를 제안했을 때 수빈 씨와 지영 씨 반응은.
<수궁>의 경우 허락을 구하기까지 2년이 걸려서, 수빈 씨와 지영 씨가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굉장히 반기더라. 조영숙 선생님 이야기라면 무조건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선생이 여성 ‘삼마이’ (여성국극에서 조연 배우)라는 이유로 조명을 덜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부분에서 안타까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또 조영숙 선생이나 수빈 씨, 지영 씨나 여성국극을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까, 그때는 드라마 <정년이>가 나오기 전이라 ‘여성국극’이 무엇인지 알리는 데만도 많은 시간을 써야 했거든.

지방 공연이 많아 캠핑카로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그때마다 동행한 건가.
카메라 감독과 함께 수빈 씨, 지영 씨와 거의 같이 다녔다. 캠핑카에서 같이 자기도 하고 밤새도록 술 먹기도 하고. (웃음) 덕분에 두 분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도 담을 수 있었다.

국극제작소의 방향성에 대해 수빈, 지영 씨의 생각에 차이가 있어 보이기도 하던데.
둘은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지영 씨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틀에 박힌 모든 것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빈 씨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마치 정반합의 원리처럼 새로운 것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국극제작소의 설립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성국극을 대중에 알리는 것이었는데, 웹툰과 드라마 덕분에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 이후에는 시대가 원하는 것, 관객이 원하는 것과 그 가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여성국극의 중요한 가치는 흔들리지 않은 채 항상 세련되게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영, 수빈 씨는 매우 전통적인 것부터 퓨전까지 변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성국극의 중요한 가치란 무얼까.
‘하심’이라는 불교 용어로 설명하고 싶다. 마음을 아래로 향하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여성국극은 지금까지 대중의 요구와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힘든 시기면 화려한 해피엔드의 무대를, 또 대중이 소리를 듣기 어려워하면 듣기 좋게, 이렇듯 대중에 맞추어 왔다고 생각한다.

영화 말미에서 보여준 공연에서 여성 니마이 였던 지영 씨가 남성 삼마이, 남성 니마이였던 수빈 씨가 여성 삼마이로, 다시 말해 지영 씨가 춘향에서 방자로, 수빈 씨가 이도령에서 향단이를 연기한 것도 그 변화의 일환이 아닌가 한다.
한마디로 경계를 허물었다 하겠다. 수빈 씨는 처음 데뷔할 때 딱 한 번을 빼고는 여성 역할을 한 적이 없고, 여성 역할 전문인 지영 씨 역시 마찬가지로 남성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여성국극은 원래 경계가 없는 장르로 모든 것의 최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도 한국적인 민요를 베이스로 서양 음악을 섞었고, 지영 씨의 소리는 판소리 같기도 민요 같기도 또 오페라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지영 씨와 수빈 씨의 방자와 향단이는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삼바이, 조영숙 선생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타이틀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는 여성국극의 현실인 동시에 미래의 염원을 담은 것 같거든. 수빈, 지영 씨 모두 여성국극인 이유를 ‘좋아서’라고 하는데, 그렇게 무언가에 미칠 수 있다는 데 한편으로는 경외심도 일더라.
여성국극이 각광받던 당시도 배우들은 국극에 미친 사람이었다. 지영, 수빈씨도, 조영숙 선생도 그리고 나도 미친 사람이라 (웃음)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열심히 하고, 이런 나를 보면서 그분들도 더 열심히 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나 역시 수빈, 지영 씨 둘 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어린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너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한다.

당신은 무엇에 미쳤나. (웃음)
<수궁>을 찍은 후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여성국극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 역시 여성국극에 미치게 되었다. 여성국극은 떼창, 군무 등 모든 것의 시초라 할 수 있고, 지금 불리는 민요의 30% 정도가 여성국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수궁>은 제작지원을 일부라도 받았지만,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는 전혀 지원 없이 사비로 시작했다. 도중에 어려움이 있어도 나의 동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촬영을 계속하게 되더라. 여성국극을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국극을 위해서 사비를 털고 대출을 받고 하는 일 등을 주저하지 않는다.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등 여성국극에 대한 공적지원은 없는지.
여성국극이 탄생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하나의 예술장르로서 대중에게 사랑받았지만, 끝까지 인정받지 못함에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지금도 그런 상황의 연장이라 하겠다. 가치 폄하되고 그 어떤 제도적 지원도 없다. 수빈 씨가 이끄는 ‘국극제작소’가 안산문화재단에 입주한 것이 제도권으로 들어간 최초의 사례라 하겠다.

영화 말미에 안산문화재단에 입주하면서, 단원도 뽑는 등 여건이 조금은 나아진 듯해 내가 다 기쁘더라. (웃음)
재정적으로 8,000만원의 지원금이 주어지고, 의무적으로 1년에 두 번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두 작품 중 한 작품은 반드시 신작이어야 한다. 공연을 올리는 데는 부족한 예산이지만,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는 데 의미가 크다. 또한 커다란 연습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전까지는 사비로 공간을 빌렸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비용도 부담됐었거든.

당신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남을까.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 외는 관심이 없었다. 30년 이상 내 영화가 극장에 걸렸으면 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러면서도 직접 연출하겠다는 생각은 못 했었다. 20대 때는 시나리오 집필하고 영화사에 근무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학교로 돌아가 영화를 전공하기도 했는데 연출은 꿈도 못 꾸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수궁>으로 첫 영화를 만들었지만, <수궁>은 개봉까지 하지는 못했다. 이번 영화로 지난 34년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여성국극을 더 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진제공. 시네마달/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2025년 3월 17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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