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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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에서 돌아왔을 당시의 기세등등함이 사라지고 막상 뚜껑을 연다고 하니 불안· 초조했는데요.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 좋아요”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파과>에서 60대 여성 킬러 ‘조각’(들짐승의 발톱)으로 분한 이혜영의 솔직한 개봉 소감이다. 어둠의 세계에서 신성한 방역을 업으로 삼아온 ‘조각’, 그가 40여 년 만에 지켜야 할 존재가 생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에서, 이혜영은 조각의 힘의 원천이 궁금했다고 밝힌다. 이에 이혜영의 연기 원천이 무엇인지 묻자 돌아오는 답은 뜻밖에도 ‘말 안 듣기’라고. 이혜영이라는 배우를 잘 다듬어내면 좋은 연기가,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는 솔직한 답변이다. 이번에는 ‘민규동 감독이 너무 잘 조각해주었다’고 공을 돌리는 이혜영을 만났다.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배우를 하는 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파과>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성과가 좋다. 오랜만에 영화로 관객을 찾았는데 개봉 소감 한 말씀.
베를린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는 기세등등했다가, 그 기세는 다 사라지고 (웃음) 막상 뚜껑을 연다고 하니 불안하고 초조했었다. 그런데 언론시사회 이후 다행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서, 또 이렇게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는 자리도 처음이라,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60대 여성 킬러라는 소재 자체가 매우 드문데 처음 <파과>를 제안받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소설 ‘파과’의 존재를 영화를 제안받고 나서야 알았다. 민규동 감독이 이런 영화를 하려고 하니, 먼저 책을 읽어보라고 하더라. 사실 ‘이런 할머니는 하고 싶지 않은데’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게 어울릴 것 같지도 않았고, 비현실적인 것 같고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각이 지닌 ‘파워’만은 궁금했었다. 민규동 감독의 전작인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을 보고, 감독님이 매우 화려하고 버라이어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뮤지컬 영화를 하면 잘하겠다고 혼자 생각했었는데 (웃음) 과연 그의 손에서 <파과>가 어떻게 탄생할지 궁금해서 하게 됐다.
조각이 지닌 힘의 근원에 대해 의문이 풀렸나. (웃음)
사실 조각은 스승 ‘류’(김무열)에 의해 ‘손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기까지 그저 살아남기 위한 존재였다가 손톱이 되고서야 류와 함께하며 쓸모 있는 인간이 된다. 류가 죽은 후에는 살 이유가 없음에도 살아남아 자기만의 ‘방역’을 이어간다. 그녀가 상실감과 흔들림에도, 살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살고자 하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엔딩에서 류를 향해 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아직은 상실을 견디어 낼 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와 초월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그녀의 힘은 내겐 여전히 수수께기다.
류를 잃고 홀로 수십년을 보낸 조각에게 ‘강 선생’(연우진)이라는 지켜야 할 존재가 등장한다. 그녀는 왜 강 선생을 지키고자 할까.
민규동 감독이 밝힌 대로 ‘강 선생’은 여러 버전이 있었다. 조각이 강 선생에게서 류를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 두 인물 간의 관계만 보자면 다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조각이 마지막에 강 선생을 향해 깊은 절을 하지 않나. 이 행동 하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조각과 ‘투우’(김성철)의 관계는 어떻게 파악하고 접근해 갔는지.
음, 조각과 투우의 관계는 김성철이라는 배우의 힘으로 끌어갔다고 생각한다. 조각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아이를 실수로 살려둔 것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 나중에 해결하고자 할 뿐인데, 투우는 조각에게 애정이나 증오, 혹은 목표점 같은 다층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젊은 투우에서 오는 청순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성철이가 한 살만 더 나이를 먹었어도 안 나왔을 그런 힘이다. 결론은 조각과 투우의 관계성은 전적으로 성철이가 만든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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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킬러이니만큼 액션이 필수인데, 리얼하게 잘 뽑아냈더라. 힘들진 않았나.
모든 것이 힘들었다. (웃음) 대역이 있다고 하지만, 스턴트우먼이 다섯 바퀴를 구르면 내가 세 바퀴는 굴러줘야 리듬이 맞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류승완 감독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할 때 당시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한 훈련을 몸이 좀 기억하는 듯? (웃음) 당시에는 정말 눈 뜨면 감독님을 만나러 가곤 했었다. ‘미녀 삼총사’ 같은 영화를 찍는 줄 알았는데 류승완 감독이 그렇지 않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파과>는 기운을 빼되 아파도 아픈 척하지 않는 쿨한 액션을 방향성으로 갔다. 모든 지 쿨하게 하기,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렵더라. 한 프레임 안에서도 요구되는 감정이 여럿이라, 평소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세세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고.
이태원 촬영씬 때였다. 2박 3일을 잡고 찍는 일정이었는데 첫날 싱크대에 부닥치면서 갈비뼈가 부러졌고 그럼에도 촬영을 감행했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장면은 마지막 폐건물 액션씬에서 로프타고 내려오는 씬과 움직이면서 투우의 눈을 피하고자 쪼그려 앉아서 이동하는 씬이었다. 스탭들이 썰매를 만들어뒀지만, 리허설 때는 직접 액션했는데 정말 넓적다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그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많이 참여했고, 그 프리한(?) (웃음) 분위기에 익숙할 텐데 이번 민규동 감독의 현장은 또 달랐을 것 같다.
홍상수 감독님은 대본이 아예 없다. 아침에 눈곱만 떼고 나가는데 (웃음), 민규동 감독님은 그야말로 강철 콘티다. 어떨 때는 수정본이 세 개씩 쌓여 있기도. 피곤해서 대충 분위기로 상상만 하고 수정된 사항을 확인하지 않고 나간 적도 있는데 그때 감독님이 “선배님, 대본을 꼭 보시고 나오시라고, 여기 있는 100여명의 스탭들이 다 하나의 약속으로 나와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감독님과 많이 부닥쳤었다. (웃음) 그러다가 극 중 나오는 단어처럼 ‘쓸모’ 있는 배우가 되고자, 민규동 감독의 프로세스에서 살아남고자, 그 프레임 안에서 최선의 것을 찾아 나갔던 것 같다. 대역이 있지만, 마냥 꼭두각시같이 있는 것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연습하면서 찾아 나갔었다. 지금은 민규동 감독이 너무 사랑스럽다. 딸에 대한 사랑은 또 얼마나 깊은지, 정말 젠틀하고 스윗한 남자다.
시작부터 끝까지 극을 견인하는데 조각이라는 배역이 당신과 맞을까 싶었다지만, 완성본을 보고 나서는 어떤 느낌이 들었나.
글쎄, 나는 별로 한 일이 없다. 조각의 모습은 의상부터 걸음걸이까지 감독님의 머릿속에 그려진 모습이었다.(웃음) 어떤 때는 ‘너무 귀여우세요’라며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고 하고 또 어떤 때는 ‘지금 우시는 거예요?’ 하거나 ‘지금은 감정이 좀 길어요’ 하는 등 섬세한 디렉션이 있었다. 한마디로 하나하나 코칭에 의해 절제된 계산된 결과라고 할지! 중요한 건 감독님이 조각한 이혜영의 조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는 점이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촬영 일지를 기록했는데 거기 보면 감독님에 대한 원망과 현장에서의 어려움, 나를 괴롭히는 열 가지도 넘는 상황 등등을 적어 놨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원망이 감사함으로 바뀌는 절실한 열망이 생기더라.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보는데 첫 번째는 감독님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아,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싶었다.
민규동 감독이 ‘조각’을 잘 조각했지 싶다. (웃음)
그렇지. (웃음) 이혜영의 연기 원천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말 안 듣기?’ 같더라. 무슨 말이냐면 난 열심히 준비해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대략 머릿속에 상황을 그려서 나가는데 이게 (누군가) 나를 잘 자르면 좋은 그림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민규동 감독이 나를 잘 조각한 것 맞다. 누군가 능력 있고 강한 사람이 나를 통제해주길 바랐는데 이번에는 그 통제가 잘 되어 영화가 성공적으로 나왔지 싶다. 사실 늘 언제나 ‘누가 나 좀 통제 좀 해주세요’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웃음) 결혼하고 자식을 얻으며 안정된 가정 속에서 연기가 안정적이 된 부분도 있다. 굉장히 불안하고 조울증도 있었고, 병원에 다녀야 하는 사람인데 (웃음) 그나마 직업이 배우라 이해되고 용서되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연기가 나를 살게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폐가 액션씬을 다 찍은 후에 감독님 이하 모두 울었다고.
조각의 마지막 촬영이었고, 내가 울기 시작하니 성철이도 감독님도 울더라. 촬영을 마쳤다는 후련함이나 기쁨의 마음이 아닌, 이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 방향을 순간 잃으면서 허탈했던 것 같다. 자세하게 그날의 감정이 기억나진 않는데 일기를 한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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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마지막 내레이션을 통해 나이든 현재에 대한 전향적인 마음을 내비친다. 배우로서 나이듦이란 무슨 의미일까.
배우를 시작한 시절에 여자배우들의 역할은 주로 남자배우들을 서포트하는 거였다. 멜로 장르에서 욕망의 대상이거나 혹은 코믹한 롤이거나 귀신 같은 역할이 주였는데 이제는 독립적인 캐릭터로서 그 영역이 다양해졌다. 배우를 떠나서 늙든 젊든 남자든 여자든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각을 연기하면서 한 번도 특별하게 ‘늙은 여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지닌 놀라운 힘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배우라는 직업이 천성인 것 같다.
음… 나처럼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배우를 하는 것 같다. 지금껏 배우라는 직업이 사랑스럽다거나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역할이 다 고통스러웠다. (웃음)
아버지인 고 이만희 감독님으로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물려받았을 것 같은데 어떤가.
글쎄, 타고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배우로 이끈 건 어렸을 때 본 명화극장이나 TV에서 본 세상의 영향이 더 크지 않나 싶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모든 걸 던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신 분이었다. 영화 한 편을 탄생시킨다는 건, 마치 아기를 출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수십 편을 만드셨으니… 게다가 예전에는 제작 환경도 열악했고, 자기 자신을 던져서 만들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든지, 우리집에 찾아오는 수많은 배우를 보면서 그분들이 부럽다든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던 것 같다.
5월 16일부터 연극 <헤다 가블러>로 관객을 찾는데, 기대하는 이들이 많더라.
개인적으로 연극은 일회성이라 좋아한다. 아무리 연극 무대를 영상 등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그 현장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할 수는 없거든. 매번 새로운 관객과 새로운 컨디션으로 만나기 때문에 연극이야말로 젊은 청초함과 나이든 노련함이 공존하는 무대가 아닌가 한다. 또 일단 배우가 무대에 올라가면 연출이 통제 못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웃음) 영화는 그야말로 감독이 완벽하게 짜 놓은 감독의 예술이지 않나.
예전부터 함께 멜로 장르를 찍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낸 최민식 배우에 이어 한석규 배우도 함께 멜로를 찍고 싶다고 했더라. (웃음)
화답하고 싶다. (웃음) 민식 씨와는 최근에 한 디즈니+ <카지노>도 그렇고 예전에 연극을 함께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를 콜하곤 한다. 너무 따뜻하고 장난기 있는 분이라 지금까지는 나도 장난으로 대처했는데 이제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석규 씨는 워낙 사람이 좋은 분이고, 최근에는 같은 동네로 이사오기도 했다.
사진제공. NEW, 수필름
2025년 5월 21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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