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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에 기초한 유머, 냉소는 안 된다”<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갑작스러운 해고로 삶의 터전을 잃은 ‘만수’(이병헌). 재취업을 위해 결국 라이벌을 ‘살인’으로 제거하는 길을 택한다. “어쩔수가없다”는 말을 되뇌며 연쇄살인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순간 “집이라도 팔지” 하고 비난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게 한다. 바로 그 모순된 감정을 박찬욱 감독은 의도했다. 감독이 말하는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하다. 가족을 지키려는 선택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 세 번의 살인 끝에 결국 재취업에 성공한 만수는, 집을 지켰고, 반려견들은 돌아왔으며, 딸은 처음으로 첼로연주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다 회복된 듯 보이는 순간, 감독은 조용히 묻는다. “정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걸까?” 그 답은 끝내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박찬욱 감독은 ‘제지업’이라는 외길 인생을 고집하는 ‘만수’나 ‘범모’가 영화만 해온 자신과 한편으로는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영화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으냐’고, 이제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싶다고 말한다. 모든 걸 쏟아내는 삶이 아니라, 조금 더 현명하게 사는 삶을 바란다 한다. 그리고 감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인생을 총체적으로 묘사하려면 반드시 유머가 필요하고,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연민에 기초한 유머여야 한다”고. 이러한 철학 위에서 태어난 영화, 블랙 코미디 <어쩔수가 없다>다.

손예진은 ‘감독님은 현장에서 매우 고요하시다’고 하던데 작품의 격렬함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노력해서 되는 부분은 아니고, 원래 천성이 그런 것 같다. 덕분에 떨리거나 긴장한 경험이 별로 없다. ‘잘해야겠다’는 강박이나 ‘잘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 때는 기를 쓰고 잘하려고 하지만 말이다. (웃음) 다만 남들의 평가 같은 것에는 덤덤한 편이다.

인물을 상상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
그 인물의 상황과 심리를 상상한다. 스스로를 많이 담아내는 배우형 감독이라기보다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한다.

이번 <어쩔수가없다>에는 노골적인 유머가 많이 담겨있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연상되기도 한다. ‘고추잠자리 씬’이나 부부싸움 장면이 대표적이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고, 인물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예를 들어 음악을 크게 틀면 대화하려고 고함을 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면 에너지가 고양되기 마련이다. 또 영화가 사회시스템 속에서 망가지는 노동자 얘기라 찰리 채플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고, 그 시대부터 내려온 몸 개그로 이어진 것 같다.

각본을 쓰면서 점점 ‘미쳐가는 듯한’ 피지컬 코미디가 자연스럽게 추가됐다. 원작을 보면서 ‘내가 더 웃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었다. 공동 각본가들과 함께 쓰면서 그 방향성이 더 커졌다. 그래서 이병헌 배우가 ‘웃겨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길래, 오히려 웃길수록 좋다고 했다. (웃음) 병헌 배우가 너무 잘 하더라. 범모의 집 뒷동산에서 내려올 때 쭉 미끄러지고, 뱀이 무서워서 지팡이를 짚고 가면서 화들짝 놀라는 뒷모습 등 정말 감탄했다.

언급한 대로 ‘사회시스템 속 망가지는 노동자’라는 주제 의식이 명확한데 블랙 코미디 장르로 풀어낸 까닭은.
이 영화는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저마다 다 ‘어쩔수가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웃기면서도 슬픈, 슬프면서도 웃긴 이야기라 하겠다. 블랙코미디로 웃기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슬픔을 자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총체적으로 묘사하려면 반드시 유머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연민에 기초한 유머여야 한다. <어쩔수가없다>도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다.

각색 과정에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의 붕괴라는 역설이다. 만수는 가족을 지키려 살인을 택하지만, 결국 그 행동 때문에 가족이 망가진다. 아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내 미리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작과 다른 점이고,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은 초반부터 살인이 시작되는데, <어쩔수가없다>는 가족 이야기로 출발한다.
관객이 차분하게 만수를 따라가도록 하고 싶었다. 행복의 절정, 전락, 결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주면서, 관객이 만수에게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했다. 관객과 만수의 관계가 계속 변하게끔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병헌 배우의 호소력이 필요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이 그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응원하다가도, ‘왜 응원하지?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감정을 오가도록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에 AI 요소도 등장하는데 원작이 1970년대 출간된 소설인만큼 동시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추가한 설정일까. 공장에서 홀로 일하는 만수를 비추는 엔딩은 여러 질문을 던지더라.
시대성을 반영하려 한 의도도 있고, 사실 그 장면은 제작 과정에서 계속 수정하고 추가하며 완성한 장면이다. 그 공장 내부 모습은 전부 VFX로 작업했는데, 만수가 공장을 돌며 불을 켜는 설정이라든가 또 마지막에 AI가 불을 하나씩 끄는 장면은 촬영 막판에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을 채운 어두움 그 심리적 암흑을 보여주고 싶었다. 엔딩은 베니스영화제 심사 버전에는 없던 장면으로, 한밤중에 가능하냐고 전화해서 넣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직업을 바꾸지 않고 종이 기술자라는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이유는.
촬영 허가가 힘들어서 제지공장을 벗어나 보려고도 했으나 대신할 산업을 못 찾았다. 한편으로는 종이는 우리 생활과 밀착하고 또 종이를 누가 만드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분야기도 해서 그냥 가져간 이유가 더 크다.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여겨지는 종이가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일 수 있지 않나. ‘범모’(이성민)는 첫 키스를 하고 나서도 종이를 떠올리고, 시조(차승원)는 ‘흰 종이를 뜨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대체할 산업을 찾을 수 없었다. 또 흔히 제지 산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배우 캐스팅에 있어 나이를 고려한 건가.
일부러 연령을 맞춘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세 배우가 모두 70년대생이다. 만수의 라이벌 범모는 만수의 분신 같은 존재라서 비슷한 연배가 필요했다.

만수를 비롯해 그의 제거 대상자가 모두 주택에 사는 점도 특이하다. ‘고시조’를 제외하고!
만수는 온실에서 식물을 키우는 인물이라 자연환경과 계절의 변화를 시각적 이미지의 핵심으로 삼았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단풍을 꼭 담자’고 제안해서, 단풍과 낙엽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가을 전, 가장 잎이 무성한 여름의 절정에서 시작해, 낙엽이 지는 겨울의 초입에서 비가 오면서 끝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집의 형태는 사실 우리나라는 아파트가 보편적이지만, (말했듯이) 위와 같은 이유로 주택으로 했다. ‘고시조’의 집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아파트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아파트에 사는 희생자가 있었는데, 만수가 세 명을 죽이는 것과 네 명을 죽이는 건 달라서, (네 명까지 가면) 차마 좋게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명은 줄였다.

분재, 치아 등 상징적인 장치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얼까.
분재는 너무 일본적이지 않냐고 하니, 류성희 감독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며 전혀 아니라고,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간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좀 알아보니 정말 기기묘묘했다. 우주의 축소판 같았다. 인위적인 힘으로 모양을 잡아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자연 속에서 죽을 수 있는 식물을 애지중지 돌봐 장수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 양면성이 좋았다. 분재로 처리한 고시조의 시체가 너무 아름다운 이미지라 포스터로 쓰고 싶을 정도였다.

썩은 이를 뽑는 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0)의 오마주이기도 하고, ‘취직하면 치과 간다’는 만수의 고지식한 똥고집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만수의 몇 가지 특징의 하나로 어리석은 고집이 있거든. 오프닝을 잘 보면 정원에서 고기를 굽던 만수가 와인 냄새를 맡으며 미리의 눈치를 보는 장면이 있다.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났는데 그런 그가 ‘선출’(박희순)과 폭탄주를 마시면서 썩은 이를 뽑아낼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무너지고 마는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다.

딸 ‘리원’이 마지막에 첼로 연주를 완곡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리원의 첼로 연주는 매우 단순하게 드라마적인 필요에 의해 배치한 장면이다. 시작은 반려견들이 돌아온 환영 콘서트였다. 좀 더 생각해 보자면, 엄마 아빠가 없을 때 리원은 개들 앞에서 연주를 자주 했을 수도 있다. 또 리원이 연주하는 자리에 가족 중 만수만 없으니 혹시 아빠의 배제라고 볼 수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만수-범모-아라가 뒤엉켜 싸우는 고추잠자리 씬, 미리가 포카혼타스 옷을 입은 채 벌이는 부부 싸움 씬을 좋아한다. 단일 이미지로는 엔딩에서 불 꺼지는 장면이 제일 인상 깊다. 또 다 해결한 만수와 미리가 소파에 앉아 카운트하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전진과 후진이 어우러지는 순간도 마음에 든다.

만수에게 제지일이 목숨과 같듯, 당신에게 영화는 어떤 의미인가
만수나 범모가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반성도 된다. ‘영화를 못 만들면 나는 죽은 목숨인가’ 싶기도 하고. (웃음) 영화인이 다 그렇듯이 영화 작업이 삶의 대부분인데 조금씩 줄여 나가려 한다. 너무 모든 걸 쏟아붓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살고 싶다.

감독으로서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지.
늘 말하듯이 감독은 배우들과의 만남이 제일 기억되고 중요하다. <공동경비구역 JSA>(2002) 이후 25년 동안 말로만 같이하자고 해오던 병헌 배우와 드디어 만났고, 또 그간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한 배우들과 만났다는 데 의미가 크다.

‘박찬욱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데, 시대의 흐름과 소통하는 창이 있다면.
특별한 방법은 없다. 일단 젊은 딸이 있고, 또 늘 20~30대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제작부나 젊은 스태프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이어가게 된다.

조용필 ‘고추잠자리’, 산울림 ‘그래 걷자’를 비롯해 80년대 한국 가요를 많이 사용했다. 음악과 영상 모두 아날로그 감성과 향수가 느껴지더라.
현실적으로 디지털이 편리하지만, 사실 필름으로 찍고 싶었다. 그렇게는 못 했지만 DI 작업에서 보정을 통해 필름 질감을 구현했다. 아마도 보정된 화면을 정보 없이 본다면 필름으로 찍은 줄 알 거다. 똑같은 조명에서 똑같은 피사체를 찍어서 디지털과 필름을 비교하여 구체적인 필름 룩이 무엇인지 파악했거든. ‘고추잠자리’의 경우, 80년대의 유행가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곡들이 장면과 가사가 잘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영화의 분위기를 더했다고 생각한다.



사진제공. CJ ENM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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