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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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생활을 돌아보며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클라이맥스>를 끝내고 나니 연기가 더 재미있어졌죠. 지금의 전 마치 신인이 된 기분이에요.” 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 퀸이자 로코의 여왕 하지원이 서늘하고도 처절한 욕망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지원 감독의 신작 드라마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맡은 ‘추상아’는 화려한 톱스타의 명성 뒤에 가려진 불안과 생존 본능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인물이다. 영화 <비광>에 이어 다시 한번 이지원 감독과 손을 잡고, 파격적인 동성애 코드부터 44사이즈가 남아돌도록 감량하는 투혼을 발휘한 하지원. 오랜만에 시청자 곁을 찾은 그를 만나 ‘시들어가는 것보다 부서지는 게 낫다’는 추상아라는 괴물이 되어야 했던 치열한 기록을 들어봤다.
영화 <비광>에 이어 이지원 감독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오랜만에 드라마로 복귀하며 <클라이맥스>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영화 <비광>을 끝내고 감독님이 <클라이맥스> 대본을 주셨다.(기자 주: <비광>은 아직 개봉 전) <비광> 때 워낙 호흡이 잘 맞았고 재미있게 촬영했던 기억이 있어서 감독님의 제안만으로도 반가웠다. 무엇보다 대본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고, ‘추상아’라는 캐릭터가 가진 묘한 매력에 이끌려 망설임 없이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현장이 유독 즐거웠다고 들었다.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배우로서 느낀 구체적인 재미는 무엇이었나.
단순히 ‘하하호호’ 웃으며 찍어서 재미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클라이맥스> 안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상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촘촘하게 관계를 맺고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전개가 요동치는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추상아’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하나하나 빚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큰 희열이었다.
추상아는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정치, 재계, 연예계가 얽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상아는 단순히 착하고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다. 자기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이 파국을 몰고 오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사회가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셈인데, 우리가 놓인 이 사회 구조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표현해보고 싶어 궁금증을 가지고 접근했다.
정재계와 연예계를 다룬 드라마는 기존에도 있었는데, <클라이맥스>만이 가진 매력이나 차별점은 무엇일까.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다 입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점이 가장 재미있는 것 같다. 매 에피소드마다 서사가 무거우면서도 그 안에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재미가 크다. 특히 상아의 욕망에 대해 묻는다면, 극 중 상아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시들어가는 것보다 부서지는 게 낫다” 이 한 문장이 상아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라는 직업은 늘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좋은 작품으로 흥행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면에서 추상아라는 인물도 여배우로서의 생존, 즉 끝까지 아름다운 여배우로 사랑받고 살아가기 위해 서슴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무언가를 더 가지려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깝다.
사실 나 역시 배우를 시작하면서 늘 스스로와 싸워왔던 것 같다. 양옆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어릴 때 "누가 경쟁 상대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나에게는 늘 '어제의 나'가 경쟁 상대였다. 누군가를 질투한다거나 할 여유 없이 오로지 내가 갈 길만 가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달렸던 것 같다. 물론 흥행하는 작품도,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겠지만 그건 오로지 내 선택이기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 몫이다. 그럴 땐 더 열심히 일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대중을 만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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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나나(황정원 역)와의 파격적인 설정이 화제다. 동성애 혹은 양성애 코드로 읽히기도 하는데, 배우로서 이 관계를 어떻게 해석했나?
추상아에게 ‘한지수’(한동희)라는 인물은 마치 쌍둥이자 거울 같은 존재다. 대사 중에 “지수가 죽었을 때 나는 죽었어”라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이다. 그런 지수의 잔상이 투영된 인물이 정원이다. 감독님은 한지수라는 존재를 통해 동성애 코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원하셨다. 나는 이 관계를 이성애냐 동성애냐를 떠나,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결핍’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연기했다.
나나와의 키스신 등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 한편으로는 주지훈과의 로맨스를 기대한 팬들도 있는데.
반응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주지훈 씨와의 러브스토리를 기대했다는 리뷰는 봤다. 아쉬워하는 시청자분들께는 다음 작품으로 꼭 보답해드리고 싶다(웃음).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순한 로맨스보다는 권력과 욕망 사이에 놓인 인물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설키는지 그 관계의 포커싱에 집중해서 봐주셨으면 좋겠다.
극 중 남편 ‘방태섭’(주지훈)과의 관계가 미묘하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웃음) 주지훈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극 중 두 사람의 결혼은 철저한 이해관계 속에서 시작된 관계다. 이 설정 자체가 드라마의 중요한 장치였다. 주지훈 씨,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아는 이 관계를 ‘동지애’로 느끼고, 방태섭은 상아를 ‘사랑’했다고 정리했다. 그래서 사랑과 이해관계, 동질감이 뒤섞인 복합적인 부부라고 생각한다. 연기 호흡은 정말 좋았다. 주지훈 씨가 약간 상남자 스타일인데, 서로 봐주는 것 없이 각자 하고 싶은 걸 100% 쏟아냈다. 내가 무언가를 던지면 더 강하게 되돌려주는 식이라 연기하는 재미가 컸다. 강속구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현장 분위기도 굉장히 유쾌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수다도 많이 떨고, 워낙 쾌활한 성격이라 촬영장이 늘 밝았다. 덕분에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다.
여배우가 여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이 묘했을 것 같다. 대본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상아의 선택들을 이해해야 연기할 수 있는데, 대본을 다 읽고 나니 그냥 눈물이 났다. 대중의 사랑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행하는 선택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무너지고 불안정해지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다 보니 모든 장면이 심리적으로 힘들고 쉽지 않았다.
실제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해온 입장에서, 작품 속 어두운 이면과의 갭은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드라마 시작 전 ‘사실과 다르다’는 문구가 뜨지 않나. 연예계 생활을 하며 문득문득 들리는 소문들은 있지만, 내가 직접 팩트 체크를 한 게 아니라 명확히 말하긴 어렵다. 워낙 예민한 문제라 감독님이 수위를 잘 조절해서 쓰셨을 거라 믿는다.
기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장 연기하기 힘들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박재상에게 “나 네 여자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신이다. 박재상은 상아의 말을 진심으로 믿어야 하고, 그 안에서 상아는 철저히 연기를 해야 하는 ‘연기 속의 연기’였다. 마지막 촬영 날이었는데 테이크를 정말 많이 갔다. 감독님이 이 정도면 됐다고 하셨지만, 내가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아 끝까지 가서 완성한 신이다. 주변 반응도 재밌다. 엄마는 방송을 보더니 “무섭다”며 방으로 들어가셨고, 친구들은 “평소에 화 안 나게 해서 다행이다”라고 하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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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 이양미 역의 차주영과 맞대결 하는 장면은 매번 흥미롭더라. 계란 맞는 신도 힘들었겠던데 호흡은 어땠나.
주영이는 원래 성격이 되게 착하고 순하다. 그래서 같이 촬영하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사실 극 중에서는 서로 날 선 대화를 주고받지만, 연기할 때는 마치 서로 칼을 들고 무술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신들은 찍으면서 배우로서 되게 짜릿하다. 앞으로 극 후반부에 가면 우리 둘의 롱샷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정말 재미있을 거다. 기대하셔도 좋다. 계란 맞는 신의 경우, 실제 촬영 장소에 고가의 비싼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어서, 계란이 어떻게 튈지 모르는 상황이라 무조건 한 번에 오케이(OK)를 받아야 하는 신이었다. 어느 각도로 계란이 튀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상아가 더 모멸감을 느끼게 보일지를 다각도로 의논했고 결국 한 번에 성공했다. 촬영 후에 계란이 얼굴 위에서 팩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계속 물을 뿌려가며 촬영해야 했다. 나보다도 스태프분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신 장면이다.
운동과 식이로 건강하게 감량했다고 들었다.
외양적으로도 전작들과는 좀 다른 지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아는 직업이 배우이고, 무엇보다 추상아와 하지원은 아예 다른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평소 표정이나 말투, 웃는 모습이 상아에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감독님이 요구하신 스타일은 몸의 쉐입 같은 것들이 좀 더 날카로운 이미지로, 상아가 나이가 어느 정도 있지만, 관리가 아주 잘 된 인물로 비춰지길 원하셨다. 보통 피팅을 할 때 슬립 속옷 등을 입어보게 되는데, 감독님은 그 슬립이 몸에 딱 붙기보다 좀 더 여유 있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감독님이 머릿속에 그리신 특유의 룩이 확고했던 것 같다. 그 결과 한 5kg 정도를 감량해서 44사이즈 의상을 줄여서 입을 정도로 만들었다. 그런 외형적인 날카로움이 상아라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큰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26학번 신입생'으로 활동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26학번 신입생으로 생활해보라는 제안이 너무 좋았다. 예능 경험은 부족하지만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젠지(Gen Z) 친구들의 꿈과 삶을 알고 싶어 시작했는데, 막상 입학해보니 20살의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라 뭉클했다. 동기들이 나를 ‘범접할 수 없는 선배’가 아니라 진짜 선배처럼 잘 알려줘서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가고 있다. 벌써 축제에서 비어팀으로 활동할 준비에 바쁘다.
액션부터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해왔다.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영화 <비광> 개봉이 밀리면서 스스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누구인지, 왜 배우를 하고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제 배우 인생을 돌아보면 롤러코스터 같았다. 흥행도 하고 상도 받으며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부족한 부분에 대한 연기적 고민도 컸다. ‘연기를 그만둘까’ 생각할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클라이맥스>는 신인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그런 고민 끝에 만난 작품이라 책임감도 훨씬 커졌다. 혼자 그림을 그리면 취미일 수 있지만 전시를 하게 되면 책임이 따르듯, 이제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 내가 맡은 캐릭터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만드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전과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클라이맥스’의 남은 후반부 관전 포인트를 짚어준다면. 제목처럼 끝까지 매화 클라이맥스가 이어진다. 지금의 관계들이 한 번 더 뒤집히는 강력한 반전들이 몰아칠 예정이다. 성숙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내 연기적 갈증이 잘 전달되길 바란다. 앞으로 액션이나 더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상아의 처절한 생존기를 흥미롭게 지켜봐 달라.
사진제공. 해와달엔터테인먼트
2026년 4월 24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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