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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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을 한글 그대로 생각해봤어요.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보이는 빛 같달까요. 인생에 녹록지 않은 위기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찾아와도 그 안에서 빛을 보자, 찾자는 의미로 다가왔어요.” 영화 <미쓰백>으로 주목받은 이지원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비광>은 한순간에 무너진 가족이 다시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류승룡이 연기한 ‘황중구’는 슬럼프와 방출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프로야구 스타로, 톱스타 ‘남미’(하지원)와 결혼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뜻밖의 스캔들에 휘말린 데 이어, 존재도 몰랐던 딸 ‘동주’(김시아)가 나타나면서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진다. 저마다 상처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에서, 위기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빛을 봤다는 류승룡이다. “밀도 높은 클래식한 영화”라고 소개하는 <비광>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촬영을 마친 지 약 5년 만에 <비광>을 관객에게 선보이게 됐다.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봤나.
촬영이 끝난 뒤 러프하게 편집된 버전을 보고 완성본은 시사회에서 처음 봤다. 그래서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 볼 수 있었다. 요즘에는 볼거리 많은 작품도 많고 기술도 많이 발전하지 않았나. 그런데 오랜만에 날것 같으면서도 밀도 있는 작품을 본 것 같았다. 보면서 ‘아, 맞아. 저 장면을 저때 저렇게 찍었지’ 하는 기억도 새록새록 나더라. 마치 세포가 깨어나는 것처럼 당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배우와 스태프들이 같은 목적과 갈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하나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지원 씨와 감독님이 서로 끌어안고 울더라. 스태프들도 서로 끌어안고 인사했다.
완성된 <비광>을 두고 ‘4D 같다’고 표현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냄새나 감촉 같은 오감을 터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전반부에는 습기와 거친 질감이 느껴진다. 시각적으로뿐 아니라 후각적으로도 국밥 냄새, 깍두기 냄새, 향 냄새, 오래된 집의 꿉꿉한 냄새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면 비로소 가족들의 얼굴이 뽀송뽀송하고 말갛게 보인다. 뭔가 해결되고 해소된 느낌이다. 마치 봄볕에 이불을 말린 것처럼 뽀송한 장면이 나온다. 감독님이 이런 느낌을 위해 전반부를 그렇게 배치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부분까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지원 감독과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오랜 시간 지켜봐 온 감독과 <비광>을 함께해 보니 어떤 분이든가.
감독님이 <번지점프를 하다>(2001) 연출부 출신이고, 영화를 왜 하고 싶은지 또 영화를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은 바 있었다. 신림동 고시원에서 6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는데, 당시의 치열하고 처절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그 근처에 가면 호흡이 가빠진다고 할 정도다. 무언가를 하면 끝을 보는 분이다. 현장에서도 무엇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배우들의 의상부터 신발, 질감, 색감, 문양 하나하나까지 직접 확인했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 안에서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렇게 최선을 다해 쏟아부은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더라.
처음에는 출연을 망설였다고. 결국 이지원 감독이 보낸 다섯 장짜리 편지가 마음을 돌렸는데, 무엇이 그렇게 크게 와닿았나.
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뒤로 소문이 났는지 편지를 자주 받는다. 앞으로 편지는 사절이다.(웃음) 당시에는 우는 연기와 아버지 역할을 계속하고 있어서 ‘이제는 조금 다른 챕터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데 감독님이 ‘이번에는 좀 다르다’고 하셨고, 대본을 읽어보니 정말 달랐다.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하게 됐다. 그렇게 나를 붙잡아주신 감독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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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상처와 결핍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가족처럼 보인다. 당신에게 <비광> 속 가족은 어떻게 다가왔나.
개개인으로 보면 약간의 우울감이 있고 어딘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족들이 모이면 투닥거리고 서로 원망하고 짜증을 내면서도 그 안에 웃음이 있다. 인간 냄새가 난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경찰서 장면이나 마지막 엔딩, 두부를 먹이는 장면, 차 안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그렇지. 저게 가족이지’ 하면서 미소를 짓게 되더라. 캐스팅도 정말 잘 맞았다고 생각했다. 실제 핏줄은 아닌데 어느 순간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분위기를 너무 잘 표현한 것 같다. 동주로 인해 가족이 위기를 맞고 파경에 이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아이로 인해 다시 하나가 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비광’이라는 제목도 영화 속 가족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는 힘이 없지만 오광으로 모이면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패인데, ‘비광’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더라. 비광은 혼자 있을 때는 힘이 없다가 오광이 됐을 때 비로소 힘을 낸다. 화투 한 장의 그림 안에도 여러 의미가 있다. 비가 와서 홍수가 나는데 개구리가 계속 점프해서 무언가를 붙잡고 올라가는 모습도 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희망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비광’이라는 말을 한글 그대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보이는 빛 같은 느낌이다. 인생의 녹록지 않은 위기나 예상하지 못한 여러 변수 속에서도 빛을 보자, 찾자는 의미로 다가왔다.
중구에게 가장 어려운 감정은 7년 만에 나타난 동주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 것 같다. 중구의 마음을 이해하게 한 결정적인 순간을 꼽는다면.
그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기대했던 아이가 아니지 않나. 그런 아이를 7년 만에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나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어서 처음에는 감정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게 플래시백의 라면 장면에서 해소됐다. 중구가 동주에게 10만 원을 주고 라면을 사오라고 한다. 사실은 제발 도망갔으면 하는 마음인데,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까치발까지 들고 라면을 끓인다. 그 작은 뒷모습이 중구를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갈 곳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와서 저렇게 살아보려고 할까.’ 그런 측은지심에서 ‘내가 큰 우산이 되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
그 마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곽창기’(유재명)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 같다.
작품마다 넘어야 하는 큰 산 같은 장면이 있다. <비광>에서는 무릎을 꿇는 장면과 동주의 손에 묻은 피를 닦고 함께 뛰는 장면, 하지원 씨와 치고받는 장면이 그랬다. 시나리오에 설계가 워낙 잘돼 있어서 읽을 때부터 마치 홀로그램처럼 장면과 공간이 보였다. 특히 무릎 꿇는 씬의 경우, 중구는 동주가 아니었다면 절대 무릎을 꿇지 않았을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 최고의 수모를 감내한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상대가 그것을 즐기게 해준다. 그래야 일이 풀린다는 것을 아니까.
영화에서 야구를 두고 ‘홈으로 돌아가야 끝나는 게임’이라고 말한다. 결국 <비광> 역시 중구와 가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한 줄이 정말 좋았다. “중구 씨에게 야구란 뭐예요?”라고 묻자, “공 때리는 것” 이라고 대답했다가 다시 돌아가서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야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임이고, 집으로 가야 끝난다. 그 말이 이 작품을 한 줄로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집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다. 동시에 그 집을 깨뜨리는 여러 요인도 있다. 인물마다 사정과 전사가 있고 아픔과 오해가 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켜켜이 쌓여 있는 보이지 않는 진심도 있다.
남미를 연기한 하지원과는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이 함께 무너져가는 부부를 표현해야 했는데, 가까이서 본 하지원의 작업 방식은 어땠나.
칭찬을 하도 많이 해서 입이 부르텄다.(웃음) 정말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다. 평소 현장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원래 웃기는 걸 좋아하지만, 일부러 더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최대한 자중했다.(웃음) 한번 감정과 분위기가 날아가면 다시 잡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니까 모두가 그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 안에서 하지원 씨는 감독님과 정말 깊게 작업했다. 이지원 감독님이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예쁜 배우에게서 날것, 밑바닥에 있는 것을 꺼내는 작업을 잘하시지 않나.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텐데 하지원 씨는 굉장히 넉넉하게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집중하더라. 리액션도 정말 좋은 배우다.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유머에도 잘 웃어주고 연기할 때도 상대가 작은 액션을 주면 굉장히 솔직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무언가 하나를 하면 끝까지 하더라. 그림 그리는 것도 그렇고, 아마 얼마전 시작한 유튜브도 10년 이상 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김시아와의 부녀 호흡도 중요했다. 촬영 당시 어린 배우였던 김시아와 연기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5년 만에 다시 만난 느낌도 궁금하다.
정말 많이 컸더라. 그런데 나도 그 사이에 0.5cm 컸다. (웃음) 시아 배우는 지금의 모습을 정말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겠다. 어린 친구인데도 촬영할 때 항상 몰입해 있었고 계속 고민했다. 평상시에는 정말 과묵하고 수줍음도 많다. 시사회 때도 “삼촌, 너무 긴장돼요” 하면서 계속 떨더라. 그런데 연기에 들어가면 어떻게 그렇게 필요한 만큼 정확하게 쏟아내는지 모르겠다. ‘67%만 해’라고 하면 정말 딱 67%가 나온다. 입력값이 정확하다. 나는 67%를 하려고 해도 95%까지 가서 혼나기도 하는데.(웃음) 시아 배우는 딱 그만큼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사실 우리 둘째 아들과 동갑이기도 하다. 시아는 동생이 셋이고 우리 아들은 막내긴 하지만, 촬영할 때 시아를 보고 집에 가서 아들을 보면, 참… ‘시아는 벌써 자기 일을 이렇게 하는데…’ 하면서 아들과 비교도 많이 했다.(웃음) 아들도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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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인물과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졌나.
그런 것 같다. 생긴 건 이렇게 생겼지만, 꽃을 받으면 좋다.(웃음) 요즘 호르몬에 변화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점점 거친 것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작품에 마음이 가는 것 같다. 이왕이면 작품을 찍는 동안에도 내가 무언가 하나를 배우고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 작품을 통해 깨닫고 배우는 것이 굉장히 많다. <인생은 아름다워>(2022)를 하면서도 그런 것을 느꼈다. ‘아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만, 없다고 생각하면’ 하며 새삼 소중했는데, 그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일상과 늘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작품하면서 많이 느낀다. <비광>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느닷없이 무언가가 찾아왔을 때 그것이 꼭 악수나 나쁜 패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좋은 기운으로 바뀔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찾아왔을 때 꼭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을 다시 느꼈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로 제62회 백상예술대상 TV(방송)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 오랜 배우 생활을 거쳐 큰 성취를 이룬 뒤에도 흥행이나 성공 자체를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바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매체 연기를 늦게 시작했고 그동안 정말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잘될 때는 그렇게까지 잘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안 될 때는 또 그렇게까지 안 될 줄 몰랐다. 인생이 그렇더라. 영화 <극한직업>(2019) 때도 원래 4주 차까지 무대인사를 하자고 했는데 2주 차에 내가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른 영화들도 있는데, 우리만 잘 된다고 계속 좋아하는 모습만 보이면 괜히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 이빨 보이지 말자. 90도로 인사하자”고 서로 다짐하곤 했었다.(웃음) 다행히 동료 배우들이 그런 부분을 좋게 봐줬고, 지금도 그런 태도가 하나의 루틴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무렵 내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대본도 안 보고 결정한 작품인 <자산어보>(2021)도 했다. 이준익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는데 바로 “할게요”라고 했다. 감독님이 “대본 보내줄게”라고 하셨는데 “대본 안 봐도 할게요”라고 했다. 조은지 감독의 <장르만 로맨스>(2021)도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을 재미있고 유니크하게 그린다는 점이 좋았다. 상업영화라고 해서 500만, 1000만 관객을 바라보는 큰 영화는 아니지만 그런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흥행을 최후의 보루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흥행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춘 작품만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도 그렇고. 얼마나 재미있나.(웃음)
5년의 시간을 건너 관객에게 도착한 <비광>은 당신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 것 같나.
밀도 있는 클래식한 영화로 남을 것 같다. 요즘은 기술도 많이 발전했고 이야기도 훨씬 풍성해졌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디즈니+ 시리즈 <무빙2>처럼 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는 작품도 있고, <비광>처럼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 앞으로는 이런 기술의 도움이 덜한 이야기에도 더 관심을 갖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유행은 돌고 돌지 않나. 빈티지가 다시 돌아오고 10대들이 레코드판, LP에 열광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가 정말 좋다면 그런 클래식한 방식의 작품도 계속하고 싶다.
사진제공. ㈜플레이그램
2026년 9월 4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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