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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건, 그 시간을 지나간다는 것 <철들 무렵> 정승오 감독
2026년 9월 18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이장>(2019)에서 아버지의 묘를 옮기기 위해 막내 남동생을 찾아 나선 누나들의 해프닝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를 들여다본 정승오 감독이 다시 가족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일이 한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떤 무게를 지우는지를 묻는다.

<철들 무렵>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버지 ‘철택’(기주봉)과 배우의 꿈을 좇는 딸 ‘정미’(하윤경), 홀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노모를 책임져야 할 상황에 놓인 ‘현숙’(양말복),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구순의 노모 ‘옥남’(원미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극이다. 돌봄과 책임, 희생과 욕망이 뒤엉킨 가족의 풍경을 정승오 감독 특유의 현실적인 시선과 해학으로 그렸다.

출발점에는 감독 자신의 시간이 있었다. 2021년 <경아의 딸> 프로듀서로 촬영을 마무리하던 무렵 아버지가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외아들이었던 그는 생계와 영화 작업, 아버지의 병간호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를 미워하고 자신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감정까지 쌓여갔다. “이걸 계속 품고 가다가는 내가 무너지겠다”는 생각에 일기처럼 적기 시작한 기록이 <철들 무렵>의 씨앗이 됐다.

정미 역의 하윤경과도 <경아의 딸>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또래였던 두 사람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연락을 이어가며 부모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정 감독은 <철들 무렵>을 쓰면서 당시 하윤경과 나눈 대화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감독 자신의 간병 경험과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포개지면서 사적인 기록은 부모와 자식, 세대를 거듭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돌봄의 시간’으로 확장됐다.

정승오 감독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견디고 책임질 줄 아는 완성된 어른이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꼭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해야만 성장하고 철이 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견뎌내고 지나가고,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 시간 속에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철드는 시간을 감당하고 있는 거다. 예상하지 못한 폭풍이 다가왔을 때 그 소용돌이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고 철드는 게 아닐까.”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개인의 행복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간을 지나 비로소 ‘철이 들어가는’ 걸까.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4세대 가족의 이야기로 확장한 정승오 감독을 만나 <철들 무렵>의 시작과 그가 생각하는 가족, 돌봄 그리고 ‘철드는 시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아버지를 미워하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간병의 시간에서 시작된 영화

<철들 무렵>은 애초부터 가족영화로 기획된 작품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쌓여가는 감정을 견디기 위해 정승오 감독이 써 내려간 기록에서 시작됐다. 20년 넘게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와 좁은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야 했고, 처음 겪는 간병 앞에서 아버지도 아들도 두렵고 긴장됐다.

“처음에는 잘 조절하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았다. 당시 코로나 초기라 영화판도 많이 주저앉았고 준비하던 프로젝트도 하나둘 엎어지고 생계도 어려워졌다.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애먼 쪽으로 표현되더라. 괜히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고,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됐다. 이걸 계속 품고 가면 내가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일기처럼 그 시간을 기록했다.”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발전시키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가족 안에서 과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 감독에게는 아버지를 간병하는 아들의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있었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결혼한 뒤에는 또 다른 가족 안에서 남편으로 살아가야 했다.

“내게 간병인이나 아들로서의 역할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사회적인 역할도 있고 결혼해서 만든 가정 안에서의 역할도 있다. 그 모든 역할 속에서 오롯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시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들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영화로 해보고 싶었다.”

동시에 자신이 겪은 일이 자신에게만 찾아온 특별한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부모 세대도, 할머니 세대도 겪었고 앞으로 또 다른 세대가 겪게 될 시간이었다. 그래서 <철들 무렵>은 한 아들과 아버지의 간병기를 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족이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는 돌봄의 문제로 뻗어나갔다. “과거라는 틀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영화 속 철택의 병 역시 실제 아버지의 투병에서 가져왔다. 아버지는 영화 속 철택과 같은 희귀암인 흉선암으로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항암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첫 수술 당시에는 서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등했지만, 두 번째 수술에서는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라 서로 두렵고 긴장되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싸웠던 것 같다. 20년 넘게 떨어져 살다가 작은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둘이 있으려니 정말 죽겠더라. 영화처럼 서로에게 모든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참으면서 쌓인 울분과 분노가 있었다. 그걸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안에 다 녹여내고 싶었다.”

두 번째 수술 때는 “내가 뭘 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감독은 이를 “근육이 생겼다”고 표현했다. 돌봄에 익숙해졌다는 말보다 훨씬 <철들 무렵>다운 표현이다. 가족이라고 처음부터 서로를 돌볼 줄 아는 것은 아니며, 갈등하고 실패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거리와 각자의 ‘룸’을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영화가 말하는 성장에 가깝다.

◆ “철이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끝없이 반복되는 가족의 시간

<철들 무렵>이라는 제목 역시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초고의 제목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책과 시집을 뒤적이던 감독의 눈에 장폴 사르트르의 소설 ‘자유의 길’ 한국어 번역본 1장의 제목인 ‘철들 무렵’이 들어왔다.

“보는 순간 그냥 느낌이 탁 왔다. 왜 이렇게 직관적으로 끌렸을까 생각해봤는데, 이 영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시간은 계속 반복되고 순환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철이 든다’는 것도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계절이 바뀌듯 계속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제목의 ‘철’은 아버지 철택 한 사람의 성장을 가리키지 않는다. 철택과 정미, 현숙과 옥남, 그리고 가장 어린 동민까지 저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을 지나간다. 누군가는 그것을 마주하고, 누군가는 응시하며, 때로는 회피한다.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완벽하게 극복했느냐가 아니다. 그 안을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다.

가장 어린 동민은 그런 순환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인물이다. 어른들이 싸우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아이에게는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도 투영됐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어른들의 풍경과 지금 일곱, 여덟 살 아이가 바라보는 풍경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저래서 그랬구나’ 하게 되지 않나. 동민은 누군가를 책임지게 될 그 발을 내딛기 직전의 아이라고 생각했다.”

동민이 다가오는 모래폭풍을 바라보는 장면에도 같은 의미를 담았다. 감독은 이를 “동민에게 다가올 미래를 응시하는 시선”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어른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동민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와 책임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에 식물을 책임지고 이를 일기에 기록하는 모습까지 더해지며, 영화는 동민을 통해 돌봄과 책임의 시간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옥남, “이제 내 미래를 그려야겠다”

<철들 무렵>이 가족의 돌봄을 무조건적인 미덕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은 구순의 옥남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과 반공, 민주화의 시간을 통과한 옥남은 영화 속 가족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까지 바라보는 인물이다.

옥남의 내레이션에는 박완서의 글이 사용됐다. 정승오 감독은 굴곡진 현대사를 통과하면서도 가족 안에서 개인의 은밀한 욕망을 써 내려간 박완서의 글과 옥남을 결합했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혼인하고, 징병을 앞두고 대를 이어야 했던 시대부터 이념과 신념 때문에 가족이 무너지는 시대까지, 옥남의 개인사는 곧 한국 현대사의 가족사와 포개진다.

“옥남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고 개인주의화된 지금에 와서는 ‘나도 내 삶을 찾아볼 수 있는 일말의 여지와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족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과거다. 나도 이제 내 미래를 그려야겠다’고 독립을 선언하는 거다.”

옥남에게는 감독의 친할머니도 투영됐다. 영화에서 철택이 기도하는 영정사진은 실제 정승오 감독 친할머니의 사진이며 ‘옥남’이라는 이름 역시 할머니에게서 가져왔다. 감독에게 할머니는 평생 아들과 남편을 돌보다 정작 자신을 위한 삶은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끝까지 자기는 없고 항상 아들을 돌보고 할아버지를 돌보다가 가셨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옥남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투영했다.”

그렇기에 옥남의 황혼 독립은 영화가 처음 던진 ‘가족 안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답이 된다. 가족을 버리거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평생 가족의 이름으로 살아온 한 개인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다.

반대로 중년의 현숙에게는 감독의 어머니가 일부 반영됐다. 실제 어머니는 “미리미리 준비해서 홀로 설 수 있는 인간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감독 자신도 “멋있고 내가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다만 영화가 블랙코미디의 외피를 두른 만큼 그 특징을 현숙에게 조금 더 과장해 옮겼다. 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현숙조차 노모의 돌봄 문제 앞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철들 무렵>에서 어느 세대도 돌봄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하고 보니 공포영화 같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각자의 답 찾기

정승오 감독에게 <철들 무렵>은 유독 사적인 영화다. 그는 이 작품을 “목구멍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감정을 해소하고 배설하기 위해 시작한 영화”라고 표현했다. “이걸 만들지 않으면 내가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니 어떻게 보면 “내가 살기 위해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그가 사적인 경험을 굳이 영화로 옮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백지 위의 활자가 배우의 연기와 조명, 음향, 음악, 수많은 스태프의 기술을 만나 자신만의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가 되는 순간에서 그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무에서 하나씩 살을 붙여 하나의 생명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수준으로 만들어가는 거잖나. 내가 그린 이미지와 활자가 연기, 조명, 음향, 음악, 기술 같은 여러 요소와 결합되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융합되는 걸 보는 자체가 경이롭다. 특히 내 사적인 영역과 개인의 시간이 투영된 결과물이 큰 극장의 스크린에 걸리고 관객과 호흡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래서 계속 영화를 놓지 못하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렇게 완성된 <철들 무렵>을 다시 바라보며 그가 느낀 감정은 따뜻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다”고 웃는 감독이다. 영화의 톤은 어둡지 않고 곳곳에서 피식 웃음이 터지며 마지막에는 희망도 남긴다. 그럼에도 돌봄이라는 현실 자체가 갈수록 개인화되는 다음 세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남았다.

“정미와 동민의 세대를 생각했다. 점점 개인화되고 자신이 중요해지는 시대인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부모 가정이나 외동도 많아지는 시대이지 않나. 시간이 누적될수록 이걸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어린 딸이 있으니 그 아이까지 생각하면 조금 공포감이 들었다.”

그래서 감독은 <철들 무렵>이 가족에 관한 정답을 내리는 영화이기보다 가족끼리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시작하게 만드는 영화이길 바란다. 누군가는 정미처럼 가족을 돌볼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철택처럼 자식에게 자신의 돌봄을 요구하는 부모 역시 존재한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할 수 없는 문제다.

“영화를 피식피식 웃으면서 본 뒤에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너무 무겁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해봤으면 좋겠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점점 다가오고 있고 누군가는 이미 겪고 있는 문제다. 영화를 보면서 각자 자기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극장에서! (웃음)”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2026년 9월 18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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