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등장했을 땐 ‘앗! 정우성이다!’라는 말이 탄성처럼 흘러나왔던 장혁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장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점점 더 진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내면 풍경이 그대로 반영된다는 말을 증명하듯, 그렇게 달라진 얼굴이 된, 그의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기자는 무척이나 궁금한 마음으로 장혁을 만났다.
<여친소> 개봉을 앞둔 심정은요?
글쎄요, 굉장히 떨리지도 않고요, 그냥 좀 편한 느낌인 것 같아요.
영화 보시니 어떠세요?
재미있게 봤어요. 물론 객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만들때 느낌을 체크하는 기분이 있었기 때문에 기분좋게 본 거 같아요.
흠, 보시니 본인의 연기는 마음에 드시나요? 전지현씨보다 잘하신 거 같아요? 못하신 거 같아요? (농담삼아 던진 질문이지만, 장혁이 너무나 진지하기 대답했기 때문에, 기자는 땀이 살짝 흘렀다. 역시 농담도 하던 사람이 해야 하는 것! --;)
보는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다르게 때문에 그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현장에서 오케이 사인이 날때까지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감독님을 비롯한 적잖은 스태프들과 의견도 나누면서 나오게 된 최선의 장면들을 연결한 것인데…나름대로 ‘뭔가 해보려고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은 들지만 ‘정말 잘했다’라는 의견같은 건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또 전지현씨하고는 서로 상황이 다른 캐릭터다 보니까 비교할 순 없는 거 같아요. 전지현씨 가 자신이 맡은 역할이 추구하는 느낌을 최대한 살려야되는 식이라면, 저는 제 나름대로의 역할 안에서 그 느낌을 최대한 살려야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잘했다, 못했다 그런 것보다는, 영화라는 건 앙상블이 중요한 거잖아요.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전지현씨랑 저는 연인관계로 나오기 때문에 서로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해보려고 했구나 하는 느낌은 있어요.
전지현씨하고는 영화로는 처음 호흡을 맞추신 거죠? 어떠셨어요?
저희 영화에서 연인관계는 친구같은 관계에요. 그러다 보니 훨씬 편하더라구요. 예전부터 지현씨랑은 사적인 친분도 있고, 여동생같은 편안함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여친소>에선 뭐랄까. 뭔가 특별히 하지 않으려해도 편안한 느낌이 나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다른 여배우를 만나면, 얼굴은 알지만 서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기간 동안 좀 어색한 느낌이 있거든요. 하지만 지현씨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편안한 동생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어색한 느낌을 많이 단축해서 촬영하지 않았나 싶어요.
전지현씨가 권총쏘는 시늉을 하는 귀엽고 멋진 장면이 있잖아요(사실 개인적으론 없지 않아 닭살이 돋았지만…^^;) 장혁씨는 왜 그런 트레이드마크식의 행동이 없나요?
글쎄요. 트레이드마크 식의 행동을 꼭 요하는 느낌의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제 캐릭터는요.
기존에 맡았던 역할과 비교해, 이미지 변신을 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시나요?
(기자를 보고 웃으면서) 제가 기존에 보여준 이미지는 어떤 건가요?
(무척이나 당황하며) 뭔가 좀 건들거리면서 귀엽고 푼수같고…음…그러면서도 굉장히 순수하구요.
(다행히 별다른 반박없이) 아마 그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순수하다, 양아치같다, 반항적이다라는 느낌은 작품을 해가면서 만들어지는 거죠. <여친소>안에는 곽재용 감독님이 연출하셨던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과 같은 영화들에서 보여진 느낌들이 모두 담겨 있지만, 그것과는 또다른 느낌이 가미가 된 새로운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지현씨도 <시월애>라든가 <화이트 발렌타인> 등에서 보여준 느낌, 저도 <영어완전정복>, <화산고>, <정글쥬스> 등에서 보여준 느낌들이 있을 것 같구요. 말하자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미지가 정말 확 변했다기보다 예전해 했던 느낌들이 쌓인 상태에서 또다른 느낌이 가미되고, 그러면서 새로운 느낌을 형성하는 거죠. 어느 정도 그대로 있는 면이 있지만, 또 어느 정도는 달라진 느낌이 있다고 하는게 제일 맞는 말일 것 같아요.
제가 <여친소>에 호감을 가진 이유는 시나리오는 되게 평면적인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누군가 입체적인 느낌의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데,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가 제가 볼 땐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곽재용 감독님은 어떻게 만드느냐라는 방법적인 부분을 배우와 감독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방식, 그런 여백을 굉장히 많이 주셨어요.
2000년을 넘어서면서 정말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들이 많은 것 같아요. 뭐랄까? 반전도 있고, 이성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논리정연한 영화들이요. 그런 영화들을 일종의 디지털적인 감성의 영화라고 한다면, <여친소>는 약간 아날로그식의 느낌이 묻어나는 영화거든요. 사실 그런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영화들이 많진 않잖아요.
감독님이랑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이 영화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많이 요구되는 영화구나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처음에 호감을 가지게 됐어요. 또, 감독님이랑 대화하면서 공통적인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정말 좋았었구요.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는 동안 감독님에 대한 어떤 신뢰가 두텁게 형성된거죠.
감독님이 <여친소>를 처음 찍으면서, 이런 얘길 하셨어요. (저는 준비를 많이 하는 스타일인데) 준비를 많이 하지 말고 당신이랑 같이 얘기했던 느낌만 가지고 현장에 와라. 그래서 그래서 그 느낌대로, 또 생각나는 대로 한번 해봐라. 그런 감독님의 주문대로 하다 보니까 일차원적인 딱딱한 느낌보다 더 자연스러운 캐릭터가 돼갔죠. 그러면서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쌓여졌구요.
장혁 씨는 실제 성격이 어떠세요? 왠지 <여친소>에서 맡은 명우와 비슷한 면이 많을 것 같아요.
<영어완전정복>을 할땐 ‘박문수’라는 역할과 실제 성격이 비슷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영화든 개봉 뒤엔, 제 손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그 전까지는 저는 영화가 끝났다고 보지 않거든요. 제가 맡은 캐릭터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 캐릭터에 대한 느낌이 없는 상태에서 얘기할 수는 없죠.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의 느낌이 많이 묻어나오는 것 같은데…캐릭터라는건 저라고도 할 수 있고, 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캐릭터라는건 친한 친구를 누군가에게 소개시켜 준다라는 개념을 전 갖고 있어요. 내가 이 사람이랑 친하지 않으면, 상대방한테 소개를 시켜줄때 되게 딱딱하게 소개시켜줘요. 근데 이 사람과 내가 정말 친하다면, 추상적으로 소개하더라도 보통 이 사람에 대해 듣는 사람들은 정말 편안하게 여기거든요. 그런게 제가 캐릭터를 표현하는 제 나름의 방식이에요.
촬영할 때 술자리는 많이 가지셨나요?
거의 감독님이랑 가졌어요. 그날 촬영이 끝나면,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 있잖아요. 감독님도 그런 면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한잔하면서, 오늘 찍었던 장면이나 내일 찍을 장면 얘기를 했어요. 물론 그런 일적인 얘기말고 사적인 얘기도 했구요.
술은 잘 드세요?
잘 못먹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저랑 술을 마시면 좋아하시는데, 일어나야될때를 아니깐요. 전 정말 주량이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먹고 나면 감독님한테 그랬어요. “감독님, 저 이제부터 정신력이에요.”라구.
얼마나 드시는데요?
백세주 한병이요.
(정말 놀라며) 백세주 한병이요? 다른 술은 못하시고요?
예전엔 다른 술도 먹었는데, 백세주를 마시다보니깐 거기에 적응이 되더라구요.
전지현씨는 술을 많이 드세요?
지현씨는 술을 아예 못해요(이것 또한 놀란 기자!).
장혁씨는 영화감상과 시나리오 읽는 걸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거든요. 만약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여친소>도 분명 좋아할 것 같다는 영화들을 추천해 주신다면요?
글쎄요. 예전에 어떤 신문사에서 배우들이 권하는 ‘DVD 타이틀’을 써달라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제가 뭐라고 썼냐면은 ‘DVD 클리너’라고 썼어요. (웃음) 왜 그렇게 썼냐면 누군가 소개해줘서 보는 영화도 재미있지만, 자기가 직접 보고 싶다거나 예전에 흘려보냈지만,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를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고른 작품을 DVD 클리너로 깨끗이 닦아서 보는 게 전 의미있는 일 같아요. (웃음)
지현씨랑은 어렸을때부터 정말 오빠 동생같은 관계로 지속해왔지만, 일적인 마인드는 다른 것 같아요. 지현씨는 지현씨 나름대로 추구하는 느낌이 있고, 저도 제 나름대로 추구하는 바가 있다 보니까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생긴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 추구하는 바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맞물리면서 만나게 된 것 같아요.
그럼 장혁씨가 그동안 추구했던 건 뭔가요?
의도성은 없어요. 영화 데뷔작이 98년도에 나온 <짱>이라는 영화였는데, 그때 그 느낌이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 <짱>이라는 영화를 다시 재구성해서 하라고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건 테크닉적인 면의 연기에요.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그때를 못 따라갈 것 같아요. 그 나이때 좋아했던 어떤 문화, 사람들, 상황, 느낌 등이 있어서 연기는 서툴렀을 지언정 진실성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또다른 일을 하게 되고, 또 취미생활이 달라지다 보니 추구하는게 어느 순간 달라지고 말았어요.
그러다보니 지금은 그때랑 다른 느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게 어떤 의도성을 가진 건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겐 영화의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편안한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제가 편해야지 소개시켜주지, 정말 불편하고 꼭 해야만 한다는 식의 느낌을 가지고 연기한 캐릭터라면 아마 딱딱한 느낌이 나거나, 단순히 ‘일’이라는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면 그 현장에 있는 시간도 힘들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진 제가 정말 좋아할 수 있을 만한 느낌을 받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연기해 왔다고 생각해요.
장혁씨가 <여친소>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요?
‘명우’라는 캐릭터는 ‘경진’이라는 여자한테 굉장히 헌신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보는 사람 입장에선 착하고 순박한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지죠. 어떻게 보면 좀 우유부단한 성격도 있구요. 근데 어떤 한 씬만 우유부단하지 않게 딱 정확한 행동을 취하고, 매섭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씬이 있어요. 그 씬을 저는 좋아해요. 그 사람의 다른 이면이라서 그런지 저는 그 씬이 참 좋더라고요.
촬영할 때 제일 재밌었던 에피소드가 뭐였나요?
재밌다기보다 묘한 경험을 했었어요. 극중에서 명우가 죽잖아요. 근데 그 장면을 촬영하는 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왜냐면 제가 아침에 집에서 미역국을 먹고, 저녁에는 스태프들이 케이크를 잘라줬는데, 극중에선 그날 죽는 씬을 촬영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제 생일날 죽은거죠. 그 느낌이란….
그리고 <여친소>를 보게 되는 관객들은 말하자면 ‘추억의 연인’을 보는 거거든요. ‘죽기 전’과 ‘죽은 후’라는 상반되는 상황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어요. ‘아, 이건 추억이긴 하지만 현장에서 사람들이 보는건 현실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듯한 느낌으로 가는게 맞을꺼다’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가 또, ‘아, 지금 회상이구나. 난 죽었었는데 이런 장면에 대한 걸 다시 과거로 가서 찍을 수 있는 거지’라는 느낌을 가지고 영화를 찍으니 기분이 이상해지더라구요.
흥행에 대한 부담이 있으신가요?
매 영화마다 부담스럽죠. 배우들은 상업성과 자신이 추구하려는 주관성을 분명히 공존한채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무조건 잘 돼야 돼’, 혹은 ‘잘 안 돼도 내 느낌만 맞으면 돼’ 이런 흑백 논리로 가는 배우는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어떤 배우라도 우리 영화는 망할 거지만 그래도 한번 열심히 해보자라고 생각하며 찍는 사람은 없는 거죠. 한편으론 잘 됐으면 하는 부담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영화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을 품어요. 거기서 생성되는 어떤 편안함같은 것이 부담감과 공존하는 겁니다.
취재: 심수진 기자
촬영: 이기성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