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안 되면 우짜지....’
이 말을 수없이 되뇌일 만큼 후달리는 왁자한 환경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류승완 감독, 확실히 변했다. 그만의 진심이 오릇이 담긴, 건들건들 파이팅적 기질은 여전히 고수하면서.
서대원 기자(이하 ‘서’)뭐 사실 영화는 평단이나 언론보다 관객이 얼마나 알아주고 그들에게 먹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도 일단 본 기자를 포함해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주먹이 운다>에 대해 찬사를 날리고 있는 분위긴데 기분 좋으시겠다.
류승완 감독(이하 ‘류’)그러냐?, 정말 그러냐.....?
서: 그럼 본 기자가 농담하겠나? 정말이다. 당장은 그렇다.
류: 음.....하지만 난 여전히 양분된 시선을 느낀다. 다른 연출자에 비해 나한테 기대하는 것들이 다른 지점에 있는 거 같다. 이를테면 나의 데뷔작이 요란하게 등장했고, 거기에 맞춰 류승완이라는 연출자를 확실히 뜨게 만든 일에 대해 언론과 비평계가 함께 만들었다. 그러니까 공모해 이룬 결과다, 뭐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기대치들이 조금씩 다르게 발전됨과 동시에 나한테 바라는 게 좀 크다. 리얼리스트로서의 류승완과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류승완, 이렇게 나뉘어 기대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언론계와 비평계가 분열을 일으키는 거 같기도 하고...나도 잘 모르겠다.
서: 이젠 그런 거에 관계없이 내 작업에 일로매진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류: 사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아라한 장풍 대작전> 때는 이상하게 오해되어지는 부분들이 있어 속상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다른 시선들이 존재하는 거에 대해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해서 그런지 크게 신경이 안 쓰인다. 그게 오히려 정상적인 거라 볼 수도 있고 말이다.
서: 여튼, 뭔가 훌훌 털어낸 거 같아 보기 좋다. 이젠 개봉만을 남기고 있는데 .홍보차 인터뷰를 하는 일 외에 뭘 하고 지내나? 분위기로 봐서는 간만에 빡센 인터뷰를 하느라 여유 시간이 남지 않을 듯한데.
류: 많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그 전에도 인터뷰 많이 했다.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일정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분들 오다가다 만나고 그 외에는 주로 집에서 DVD로 영화 보고 책 본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서 언제부턴가 꺼려지더라. 또 얼마 전부터 TV를 아예 안 본다. TV 안테나를 아예 빼버렸다. 그래서 시간을 좀 벌었다. 물론, 아이들하고도 시간을 보낸다.
● <주먹이 운다> vs <달콤한 인생>, 사실 무지하게 걱정 된다.
서: 기자 시사 후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뭔가?
류: “반응 어떠냐?” “잘 됐으면 좋겠다.” 이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박찬욱 감독님은 걱정이 하도 많이 되는지 연락을 자주 한다. “어떻게 돼 가냐?”고.
많이들 걱정해주고 신경을 써주니까 고마울 따름이다.
근데, 걱정은 이거다. <달콤한 인생>과 공교롭게 같은 날 개봉한다는 거.
류: 은근히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게 걱정된다. 방금 전에도 김지운 감독님이랑 통화했다. “분위기 좋다면서...”
서: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절친한 사인데
류: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신경을 안 쓸 텐데...서로 너무 친하고 좋아하는 사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서: 배급이 그렇게 잡혀서리..
류: 그러게 말이다. 둘이 아주 난리가 났다. 하루에 막 열통 넘게 문자 보내고 그런다. 악몽을 꾸지 않나...ㅎㅎ..
서: 혹 서로의 영화는 봤나?
류: 아직 둘 다 서로의 영화를 못 봤다. 원래 김지운 감독은 오늘 <주먹이 운다> VIP 시사에 참가해 보려고 했는데 인터뷰 때문에 못 온다고 하더라. 그리고 난 일반시사를 통해 <달콤한 인생>을 볼 계획이다.
서: 그래도 뭐 막상 부담이 되긴 해도 자기 영화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나?
류: 뭐 사람이니까 당연 그런 건 있다.(웃음)
바람이 있다면 두 영화 모두 잘 돼서 좀 건강한 시장 풍토가 형성됐으면 한다. 둘이 비슷한 장르라면 모를까 장르적으로나 연출패턴으로나 다 다르니까 각 영화의 성과들이 뚜렷이 있었으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리고 난 여전히 천만 드는 영화 한편보다는 삼백만 영화 두 편이 존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 쓸데없는 멋과 테크닉을 부리려 하지 않았다
서: 9월부터 시작돼 총 54회차로 4개월간의 촬영을 끝냈다. 스케줄보다 촬영 회차가 줄었다고 들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아마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때처럼 현장에서의 분위기나 작업이 꽤 자유롭고 소박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 거 같은데
류: 62회차에서 좀 줄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서기자가 말한 대로 즉흥적인, 돌발적인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꽤 자연스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떤 신은 흐른 날 찍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날을 기다려야만 한다.’ 이런 식의 성격을 가진 영화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시나리오가 완전 열려있는 상태였다는 거다. 꽉 짜여 있는 설계도면이라기보다는 기초설계도면이라고나 할까? 현장에서 삭제한 것도 많고 추가한 것도 많고 그러다보니 그랬다.
또 요즘 취향이 바뀐 게 작용하기도 했다. 미니멀한 영화들 아주 경제적인 영화들, 예를 들어 브레송 영화들을 보면 샷이 아주 경제적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그렇고.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이번에 그렇게 해보자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라지지 않는 기질, 역시도 끓어 넘치는 과잉의 이미지로 삭제한 장면이 은근히 많다. ㅎㅎㅎ. 어쨌건, 현장에서의 의도는 그런 거였다.
서: 기자회견에서 전한 “쓸데없는 멋과 테크닉을 부리려 하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류: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류승완의 <주먹이 운다>보다 <주먹이 운다> 그 자체로 보이길 원하는 작품이다. 난 그냥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류승완을 드러내서 완성하기보다 <주먹이 운다>가 요구하는 것을 채우는 방식을 택했다. 말장난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취향이 여전히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 권투장면도 그렇고 편집패턴이나 액션의 프레임이나 카메라 이동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취향이 드러난다. 정서가 다르고 방식이 바꿨을 뿐이지 대놓고 나의 영화를 패러디한 장면도 있다.
서: 어떤 영화?
류: 이를테면, 상환이가 일수 영감을 주차장에서 공격하는 장면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현대인’에서 질펀한 싸움을 펼치는 주차장신을 다시금 살린 거다. 폭력의 지난함, 지리멸렬함 그런 거를 흡사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서: 어떤 극에 달한 인간의 처절함을 보이고 싶었다?
류: 그렇다. 그 장면은 상환이 애들 삥 뜯으며 동네양아치들처럼 행동하는 것과 달리 진짜 실질적인 대형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다. 근데, 애가 실제로 그런 무지막지한 범죄행동에 돌입하니까 전이랑 달리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마구 생기는 거다. 자기도 어쩔 줄 모르는 난처함에 처한 꼬마의 정서가 표출된다는 거다.
서: 그런 인간의 처절함을 가족을 통해 많이 끌어들인 거 같다.
류: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전작과 많이 달라진 점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든 장편들은 가족에 대한 코드가 은연중에 강력하게 배어있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엔딩 대사가 역시 “씨바..형!........”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이혜영도 딸을 찾으러 가기 위해 돈을 강탈하는 여자고, 전도연이 분한 수진도 자신의 가족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벗어나려고 했던 캐릭터다. 또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경우도 대체 가족을 이야기 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결국, <주먹이 운다>가 전작에 비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강하게 드러내서 그렇지 가족은 이전부터 나에겐 중요한 화두였다.
서: 아까 던지 질문과 관련해 다시 묻겠다. 촬영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처럼 돌아가서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진행됐다. 왜 그 당시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었는가? 기존의 현장이 부담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작품은 그렇게 나가야만 해서 그런 건가?
류: 두 가지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아라한..> 세트 촬영을 진행시키면서 너무 힘들었다. 뭔가를 만들어서 찍어야 하는 게 너무 부담됐다. 류승범과 정두홍 무술감독이 맞장을 뜨는 엔딩 신의 세트 경우 짓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그것과 더불어 감독이 책임져야 될 부분이 너무나 많다고 느꼈다.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공동 작업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고, 에너지가 풍부한 현장이 상당히 그리웠다.
그리고 길거리 촬영을 하다보면 이상한 파이팅이 생긴다.
뭐야 하면, 그날 찍어야 되는 분량이 32컷인 데 한 컷이 너무 열악하다. 근데 이 현장은 오늘 이후로는 들어올 수 없다. 그럼 그날 하루 종일 어떻게 찍고 가장 효율적으로 카메라 셋업을 해서 진행을 해나갈지... 나한테 주어진 환경을 돌파해나간다는 이상한 쾌감이 생긴다는 거다. 즉흥적인 아이디어에 의해서 돌파해나가는 쾌감들이 아주 즐겁다. 먼지 쌓인 도시락을 먹으며 스탭들과 엉켜 노력하는 그것들, 정말 하고 싶었다.
서: 그렇지만 아무리 그러한 현장이라도 걱정거리가 없을 리는 만무했을 거다.
류: 음...........아무래도 기술적인 부분에서 많은 문제꺼리가 있었다. 특히 사운드에서 골치 썩을 일이 적잖이 존재했다. 현장에서 촬영하다보니 소음이 불가피하게 잡히고, 녹음팀이 아주 고생했다. 촬영감독 역시 여러 모로 힘들었을 거고.
서: 어떤 면에서 그런가?
류: 영화의 컨셉상 생짜의 이미지를 포착해야 했기 때문에 집중도가 상당히 요구됐다. 한데, 실제로 촬영하다보면 아무래도 현장에서 발생하는 돌발적인 상황들이 있어 본의 아니게 집중력이 분산되곤 했다. 여튼, 스텝들의 몸 고생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나저나 담배 피우면서 인터뷰해도 될지 모르겠다.
● 이번 영화는 '진담'이다
서: 뭐 먹는 거 드신다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맘껏 때우시라! <주먹이 운다>는 좀 기왕의 작품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상당히 진지해졌다 볼 수 있다. 역동하는 시각적 쾌감의 재미를 전작들이 줬다면 이번엔 삶을 성찰하는 내면의 정서를 포착했다고나 할까! 노선을 변경한 이유를 듣고 싶다.
류: 내면의 정서를 포착....그게 바로 이 영화의 힘이었고 <주먹이 운다>가 요구하는 거였다. 배우와 스텝의 힘이기도 하고.
근데 참 웃기는 건 영화의 엔딩 장면인 신인왕전 결승전은 내가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도 역동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장면은 실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서: 말마따나 합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찍었다고 들었다.
류: 맞다. 봐서 알겠지만 실제로 얻어맞고 몸이 출렁이는 게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니까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건 맞은데 시각적 쾌감의 스타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런 생각은 했다. 전작들의 과도한 테크닉이 영화의 본질을 흐리는 게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 근데 이 영화는 최소한 그런 게 없는 거 같다. 나만의 스타일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일종의 페인트가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거다. 결국, 전적으로 노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숏을 분할해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등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바뀌기는 했지만.
또, 여전히 액션영화에서의 좋은 장면은 액션이 벌어지기 전 긴장을 만들어내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주먹이 운다>는 액션영화가 아니라고 공언을 하고 출발했지만, 내가 찍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더욱 액션영화다운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서: 두 인물 태식과 상환은 마지막 대결 신 이외에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엇갈려 교차편집으로 보여 줄 뿐이다. 류승완 감독이 배우로도 등장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현대인이 자연스레 포개졌다. 하지만 ‘현대인’은 형사와 깍두기가 죽어라 싸우는 중간 중간 그네들의 처지를 그들 자신이 말하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 줬기에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쳤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줄곧 상환과 태식의 인생역정을 이분화시켜 보여줄 뿐이었다. 이건 자칫 밋밋하고 단순하게 비춰질 수 있는 리스크가 많은 구성이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을 굳이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류: 처음엔 무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애초의 시놉시스는 교차방식이 아니었다. 한쪽의 이야기가 1시간 진행되고 다른 쪽 이야기가 또 1시간 진행되고 그러고 나서 결승전이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그 플롯이 위험했던 건, 그 둘의 무게를 같이 바라볼 수 없다는 거였다. 뒷사람한테 더 몰입이 된다는 거다. 순서를 바꿔도 마찬가지고.
서: 음....듣고 보니 그게 더 위험한 구성인 거 같다.(웃음)
류: 그래서 선택한 게 교차방식이다. 그건데 그거 역시 그리 탐탁지 않았다. 가장 낡은 방식이고 많이 써먹었던 방식이니까. 또 그러한 방식을 택할 경우 어떤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무척 싫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다.
서: 음......줏대 없긴 하지만 듣고 보니 그거 역시 또 그렇다.
류: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른 스타일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거. 기교를 부린다 해서 잘 표현되는 영화도 아니고 기교를 위한 기교로 남을 뿐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결국 이들의 정서, 그들의 진심이 중요하다고 결정 내렸다.
전의 영화들이 농담을 했다고 치면, 이번 영화는 진담을 하는 거라고 봤다.
그래서 무모함이나 위험 그런 부분에 대한 우려들을 무릎 쓰고 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나중에 확실히 인지하게 됐다.
서: 많은 분들이 상환 태식이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신인왕전 결승전을 최고의 장면으로 뽑던데, 감독 개인적으로 가장 죽여주는 장면을 말한다면.
류: 감독으로서 너무나 좋아하는 장면은 엔딩 컷이다. 얼굴이 일그러진 두 남자가 웃고 있는 한 컷, 정말 찍어보고 싶었던 이미지고,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을 위해 달려온 거라 볼 수 있다.
개인 류승완으로서는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나문희)가 상환을 못 알아보니까 상환이 오열하는 장면이다. 배우가 힘들면 힘들었지 찍기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신인데도 그날 하루 종일 우울하고 힘들었다. 개인적인 정서가 녹아나 있는 장면이기에 그런 거 같다.
서: 역으로 무지하게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 있다면, 들어낸 장면이라도 상관없다.
류: 내가 전의 영화들을 만들면서 늘 하는 얘기가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라는 말이다. 실제로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고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 영화가 별로 라고 말한다면 나의 역량 부족이다.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근데, 이 영화는 그 아쉬움조차 안 남더라. 그리고 영화를 찍고 나서 이렇게 홀가분한 적도 없다.
서: 결국 없다는 말인데... 그럼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되는가
류: 아까 한 말이랑 비슷한데 이 영화는 진담을 했기 때문에....정말 하고 싶은 말을 진실로 담아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서: 필자 개인적으로는 류승범의 머리 쓸어올리기가 인상적이었다.
류: 그건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순전히 배우 류승범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최민식 선배의 연기가 즉흥적으로 진행된 측면이 많고 류승범의 연기가 치밀하게 계산된 부분이 적잖이 있는 거 같다.
● 싸움? 정말 못한다. 맞고만 다녔다
서: 복싱을 소재로 한 점이나 신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가공할 만한 정서로 길어 올려 감동의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는 점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주먹이 운다>는 관조적으로 그린 <밀리언 달러..>와는 달리 거리 영화라 표방한 말답게 생동감이 넘쳐흐르지만 말이다. 여튼,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을 거 같은데 어떤가?
류: 질문을 받는 거까지는 좋은데 평단이 리뷰를 쓰면서 <밀리언..>와 이런저런 비교를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건 몰상식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간략한 비교차원을 넘어 오버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다. 안 그래도 전작들이 숱하게 비교를 당했는데....그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 그런 말은 전에도 많이 언급했던 거 같다.
류: 두 영화다 권투를 소재로 했지만 스포츠영화가 아니다. 나 역시 그 영화를 <주먹이 운다>기자 시사날 아침에 봤다. 되게 재밌더라. 하지만 그런 각본을 가지고 나보고 <밀리언...> 를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내 각본을 가지고 <주먹이 운다> 같은 영화를 찍으라고 하면 못 만든다. 이런 영화들은 각자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고 살아온 만큼의 무게감을 싣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거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보다 다른 것은 가족에 대한 입장인데 <밀리언...>는 정신적인, 대체가족에 안에서 희망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고, <주먹이 운다>는 정작 친구보다 가족에 대해 더 모르는 게 많은데 징글징글한 피붙이 혈육이라는 이런 거 하나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 그런 한국적인 가족을 말한다 볼 수 있다. 사회문화적인 풍토로 인한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서: 상환의 남루한 개인사가 실제 류승완 승범 형제의 지난날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것이라 들었다.
류: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개인사는 별로.......ㅎㅎ
서: 그래도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묻겠다. 그러한 지난한 인생사가 지금 여기에 있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만들기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는지
류: 내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 속의 캐릭터에는 나한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다 들어있다. 사회생활을 일찍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산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서: 이왕 말이 나왔으니 요거는 짚고 넘어가자.(웃음) 본인이 직접 무술지도도 했고, 시연도 하고, 그쪽에 빠삭한 영화광이다 보니 왕년에 싸움을 존나게 잘했을 거 같다...........라고 많은 네티즌들이 입을 모은다.
류: 진짜 못했다. 진짜... 진짜...못했다......
서: 그렇다면 풍문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류: 맞고만 다녔다.(웃음)
난 기본적으로 폭력에 대한 공포가 있다. 비폭력주의자다.
서: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라크 파병 문제로 광화문 앞에서 영화인들과 함께 반대성명을 낼 때 잠깐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때 어느 정도는 알았다.
류: 그때도 같은 말을 했겠지만 난 폭력을 증오하고 싫어한다. 뭐 언어폭력은 일상화돼 있지만서도....(웃음) 난 사람들이 싸우는 걸 참 싫어한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영화로 분출되는 거 같다.
어쨌든, 싸움 잘한다는 소문은 정말 오해다............하하하
● 과도한 찬사가 건강에 해롭다는 걸 알게 됐다
서: 모두에서 비스무리하게 잠깐 언급됐지만 솔직히 무비스트를 포함 언론에 적잖이 불만이 있을 게다.
류: 이제는 뭐. 그냥 뒷담화로 해소하곤 한다. (웃음)
심지어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한 거 같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신작을 보면 마치 전 영화를 봤던 거 마냥 접근한다.
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현상들이 한동안 너무 재밌었다. “아~ 운 때가 풀리려면 이렇게도 풀리는 거구나” 그랬는데 그게 안 좋다는 걸 나중에 느꼈다.
메인스트림에서 찍어보니까 장난이 아닌 거다. 과도한 찬사가 건강에 해롭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너무나 많은 짐을 나한테 한 번에 짊어지게 하는 게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의 활로, 대안 이런 것들의 한축이 되길 바라더라! 나한테. 근데 그건 개인이 책임지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비겁한 말일지라도...
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영화도 곧 나올 거고 조만간 단편영화도 만들 거 같다. 나름대로 뭔가 하고 있기는 한데 그런 문화적 풍토 문제를 예술가 한명한테 짐을 주는 건 문제라고 본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고, 나 혼자 잘 돼 가지고 싹 바르자 이런 거는 아니지만...(웃음) 정작 과도한 기대들이 오히려 내가 만드는 영화들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답답한 상황으로 몰더라.
서: 그래서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깨보고자 내놓은 영화가 <다찌마와 리>가 아닌가? “난 작가도 아니고 이런 놈이에요.”
류: 그렇다. 바로 그거다. 그걸 좀 쇄신해보고자 내놓은 영화였다. 근데, 그게 오히려 더 부채질한 결과로 작용했다. “애가 정말 뭘 하려고 그러는 구나. 대단한 놈이네..” 뭐, 이런 식의 반응이 나왔다. (웃음)
서: 그게 원래 좀 그렇다. 언론의 속성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소싯적 연기학원에도 다녔고 <오아시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배우로 출연했는데 앞으로도 감독이 아닌 배우로 출연할 계획이 있는가
류: 당연하다. 무엇보다 배우하는 일이 재밌으니까. 그런데 연기력이 딸려서리 늘 걱정이 된다.그나저나 남들 다 출연하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배역을 안 준다.(웃음)
서: 그래서 주먹이 우는가! 농담이고 류승완 감독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정말 주먹이 우는가?
류: 최근엔 독도문제!
그러니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괴롭힐 때 개인과 개인 문제든 국가 대 국가 문제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자꾸만 누르고 압박할 때 주먹이 운다. 또 희망이 없어질 때 그렇다. 영화 속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나!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 실제 노숙자들이 단체로 뭐라고 하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노숙자들을 늘상 술 먹고 꼬장부리는 그런 인간으로만 등장시키더라!” 아주 난리가 났었다. 순간적으로 막 화가 났다. 왜 다들 능력 있고 몸 건강한데 저러고들 있는지.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긴 하지만 그분들 역시 같이 이야기를 해보면 다들 천사 같고 그렇다.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적으로 분배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거다.
사실 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다. 단, 모든 일에 있어 상식적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 기사를 보니까 박근혜 대표가 스크린쿼터문제를 거론하면서 그것 때문에 한미협정에 지장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던데 난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스크린쿼터문제를 영화판의 문제라 한정한다 치더라도 소수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런 권익을 보호해달라고 우리가 국회에 내보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니 정말 싫다.
영화관계자: 지송한데 윗층으로 이동해 인터뷰 계속 하면 안 되겠냐. 왔다리갔다리 하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리.....
서: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도 왁자한 환경 때문에 초긴장 상태다. 소음이 많아 녹음 제대로 안 될까봐 무지하게 후달리며 인터뷰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이런 일 생길까봐 녹취기 두 개 준비한 거다.
류: “아이 사람들이 예의가 없어....정말 주먹이 우네”ㅎㅎㅎ
● 작은 미소를 가지고 나간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좀 정리된 거 같다. 시간 없으니 담 질문으로 바로 들어가겠다. 이런 감독으로 만큼은 대중에게 남지 않고 싶다.
류: 아 그거 어려운 질문이네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서: 그럼 앞으로 좀 생각해보시고 역으로 이런 감독으로 인식되고 싶다.
류: 뭐, 사실 초기에는 누군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컸다. 이를 테면 너무 좋아하는 성룡 오우삼이 되고 싶었고 마틴 스콜세지가 되고 싶었고 그랬다. 지금 와서는 영화를 만들어 보니까 내가 누가 될 수가 없더라. 난 류승완이지.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가 될 수 없는 거다. 아무리 내가 키튼 영화를 좋아해도. 키튼이 안 된다. 그래서 그냥 류승완이고 싶은데 그게 아직 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더 해봐야 알 거 같다.
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부족하다. 더 보충해달라!
류: 그렇게는 되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평생을 영화를 만들면서 살고 싶다. 예전에 키노잡지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묘비명에 무슨 말을 새기고 싶냐?는 질문에 ‘액션의 마에스트로’라는 칭호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장르에 대한 관심이 예전과 상당히 많이 변했다. 그냥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말이야 쉬운 거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거대한 희망이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는 임권택 감독님밖에 없지 않나!
서: 차기작은 만땅 100%의 액션활극이라 들었다.
류: 장르 밖으로 많이 나왔으니까 장르 중심으로 들어가야지. 제목은 <짝패>다.
지금 말할 수 있는 힌트는 주인공들이 충청도 사람이라는 점과 말은 웃기게 하는데 행동은 아주 난폭한 인물들이라는 정도. 80년대 홍금보가 연출했던 성룡의 액션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그 과격한 흥분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당장은 생각한다.
서: 언제쯤 촬영에 돌입할 예정인가
류: 초고가 나온 상태라 적어도 초가을쯤에는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서: 마지막으로 예나 지금이나 당신을 좋아하는 남녀노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류: 너무 과도한 기대는 하시지 마시고...하하..............
하여튼, 저한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저에 대해서 이뤄지고 있는 조금 과열된 이야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많이 하셨으면 좋겠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거다. 그러니까 영화를 아껴주시면 고마울 거 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영화를 만들 테니 실수 하거나 딴 길로 잠시 새도 좀 길게 봐주시고 격려해주시길 바란다.
서: 진짜 마지막으로 묻겠다. 관객들이 <주먹이 운다>를 본 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극장을 나섰으면 하는가
류: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어이부 밴드가 부르는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가 나온다. 가급적이면 그 노래를 끝까지 듣고 나가주셨으며 한다.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라면 조금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희망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마음껏 카타르시스도 느꼈으면 좋겠고. 아! 그리고 작은 미소를 가지고 나가신다면 나로선 더 바랄 바가 없다.
서: 연배도 비슷하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자리를 가는 것도 좋을 듯싶다. 우좌지간, 수고 많으셨고 <주먹이 운다> 잘 되길 바란다
류: 아~~ 물론이다. 화이팅!!!
서: 뭐 어색하지만서도 나도 화이링! 이다.
인터뷰: 서대원 기자
사진촬영: 이한욱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