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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목]모든 것은 빵의 존재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혹은 논쟁. 피아니스트
rose777 2003-01-04 오후 1:56:28 4820   [33]
로만폴란스키감독의 피아니스트는 깐느의 신중한 선택에 다시한번 감격하게 만드는 순간이며 환희이다. 우리가 진정 수십년을 살아내면서 이토록 깊은 진정성과 감격의 순간을 말없이 조용히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개미가 대서양을 무리없이 건널수 있는 확률과 맞먹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과 같다. 그렇기에 피아니스트의 국내개봉은 소중한 순간이며 놓쳐서는 안될 기회다. 피아니스트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필름영화 역사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며 우리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혹은 과거를 잊고는 현재를 살아낼수 없는 가장 정확한 사유의 근원이 되어준다.

주인공 블라리슬라프 스필만의 생존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인간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 숭고한 질문이며 생의 귀중함앞에서 인간을 가장 참혹하지 않게 가장 고귀하게 만들어 낸 로만폴란스키가 만들어낸 기적의 선물이다.
혹자는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 대한 비판을 "신파"라고 혹평했으나 세계2차대전의 잔학상과 비극을 그려낸 여타의 전쟁영화와 다른 드라마틱하지 않은 객관적 관찰자시점의 영화라는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신파"를 뛰어넘은 "감격"의 순간을 창조해내고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 담담한 시선으로 피아니스트의 생존기를 다루어낸다. 그는 예정대로(?) 가족과 헤어지고 국가를 잃고 친구를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이부분에서조차 감독은 신파조의 드라마트루기를 무시한 멋쩍은 연애담을 다큐적으로 멋지게 그려낸다. 이색적인 시선.) 그리고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 피아노를 치기위해서 아니 그이전에 인간이기에 생명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지켜내야만하는 것이다.
영화는 스필만의 동선구조를 따라다니며 황폐해진 전쟁잔상을 보여주며 혹은 독일군의 무차별적인 살인행각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삶과죽음이 너무나 끔찍하게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는 자유를 원하기 이전에 생존해야 하며 생존한후에는 자유를 원할 것이다. 그는 피아노를 치고 싶을것이며 헤어진 가족과 만나고 싶을 것이다. 물론 그의 소망이 쉽게 이루어질수는 없다. 극한 현실에 처한 피아니스트 슬라브가 갇혀있는 좁은 공간은(이공간은 의도된바 대로 계속 이동하며 그 형태를 달리한다.)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해주며 의도적인 위치에 배치된다.(독일군 혹은 경찰과 근접해있는 위치에 주인공은 존재한다. 아이러닉한 잔상들.) 적이되어있는 독일군의 존재는 그에게 그순간만큼은 보호자이며 적이 아닌 동지이다. 그는 안전한 상태에서 숨어있길 원하며 어떤방법으로건 굶주린 배를 움켜잡으며 다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로만폴란스키의 카메라는 유려하다 못해 자극적이다.
황폐해진 길위에 놓여진 시체들의 행렬 태워지는 시신들 옆에서 담배를 물어대는 독일군군사들의 표정은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잔상이며 잔혹한 인간심리를 들여다 내보이는 명료한 관찰자의 시점의 포착이다. 피아니스트는 1939년 폴란드바르샤바에서 인정받던 천재피아니스트의 생존기를 다루었으나 그의 화려한 연주생활 관심과 사랑을 받던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피아니스트이기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기때문에라는 매우 보편적인 명제를 관객에게 들이미는 현명함이 돋보이는 수작중에 수작이다.
영화는 역사를 기억하고 관객은 역사를 조명하는 카메라를 통하여 현재를 역사위에 반추한다. 영화는 이야기의 개연성 그리고 드라마틱한 플롯에 집중하는 드라마의 기본구조를 살며시 비틀며 다만 "생존의 중요성과 위대함"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함으로써, 극화된 드라마구조에서 느낄수 없는 다큐적구성에서만 느낄수 있는 사실성을 강조한다.

영화속 가장 드라마틱한 구성부분인 독일군 장교와 스필만의 만남의 계기는(이부분은 전체적인 스토리와 조금은 이질감있게 느껴지지만, 냉소적인 다큐적인 구성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그 역전의 순간에 운명에 대한 로만폴란스키의 자조적인 늬앙스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처절한 죽음의 순간에서도 희망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낼수 있는 강한 의지가 충분히 있음을 감독은 조용히 자꾸만 반복해낸다.
그러나 감독의 반복된 어조는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그 교훈을 받아들이기에 감독이 보여주는 세상과 인물들의 모습은 너무나 황폐하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이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고 싶다.)

"I was a pianist"

라고 대답하는 슬라브의 대사는 심장을 관통한다. 독일군장교의 의아한 시선과 함께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슬라브가 내뱉은 힘겨운 대사는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집약하고 포용한다. 예전의 피아니스트는 지금의 피아니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예전의 피아니스트였고 지금은 깡통하나를 열어야만 말라버린 몸과 메마른 입술을 적실수 있는 간절한 생존에 급급한 학살대상의 유태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운명의 반전과 삶의 우연성을 포함한다. 과거는 현재를 조명하고 현재는 미래를 예견할수 있는 도구와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의 자신의 앞에 일어날 운명을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의 운명을 불운한 목소리로

"I was a pianist"

라고 내뱉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사가 직절화법으로 과거를 되뇌인것이라면 , 주인공 슬라브 동생의 “찌르면 피가 나고 간지르면 웃음이 난다. 독을 먹이면 죽고… 학대엔 복수해야 한다”는 대사는 간접화법으로 지금의 현실을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너무나 비통하게 되뇌인 명대사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의 한 구절을 인용한 이 대사의 화법은 상투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치명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는커녕 생존의 가능성마저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이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외부의 압력에 육체적으로 정직하게 반응하는것밖에 더있겠느냐는 비통한 심정을 표현한다. 로만폴란스키는 이외에도 셀 수 없는 명대사와 명장면으로 대작의 그늘을 멋지게 드리워낸다. 인물들의 심리묘사는 직접적이지도 간접적이지도 않게 세상을 통해 그안에 아주 조그마한 먼지 혹은 점으로 존재하면서도 심중의 존재감을 퍼뜨리는 대단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피아노만은 치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주인공의 절규가 존재하지 않아도 그의 처절함과 절실함은 충분히 전해진다. 영화는 꿈과 자유를 갈급하는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를 넘어선 생존에 대한 중요성에 집중한다.
피아노연주는 그가 가장 잘할수 있는것이며 끝내 그를 살린 결정적인 계기역시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었으나 영화는 피아노보다는 흘러내리지 않는 수도꼭지와 열리지 않는 캔을 부각시킴으로써 여타의 꿈과 자유를 추종하는 신파극과의 명확한 차별화를 선언한다.

피아니스트는 잊기 힘든 명작이다.
끔직한 전쟁의 기억을 다룬 새롭지 않은 소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색다른 관찰자 시점을 통한, 신파와 드라마를 뛰어넘은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은 드라마 그이상에 도달하고 있어 감격의 순간을 새로이 창조해낸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빵만으로 살순 없다고 외치지만 어쩌면 빵이 사라진후에 빵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빵의 존재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혹은, 논쟁이다. 로만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생존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인 동시에 인간존엄성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대작이라는 면에서 로베르토베니니의 "인생은아름다워"와 정반대의 위치(비드라마와 드라마)에 서있는 잊을수 없는 또한번의 감격의 순간이다.

영화역사는 "차이나타운"과 함께 "피아니스트"를 "로만폴란스키"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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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2002, The P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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