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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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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12 오후 4:3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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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마틴스콜세지를 존경한다. 사소하게 시작된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은 <좋은 친구들>에서 절정으로 달했다가, 쿤둔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하여 비로소, <갱스오브뉴욕>으로 인해 위대한 존경심에 안착했다. 리얼리즘계의 영화에 심취하는 나의 개인적 성향때문일까. 마틴스콜세지의 영화는 나에게 늘 심각한 심경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수십번을 되감아 보게 되는 그의 영화들이 풍기는 마력의 원동력이 "죄의식"이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멀지 않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지나친(?) 애정의 근간이다. 마틴스콜세지는 빌리와일더에게 깊은 애정이 담긴 헌사를 바친바 있다. 빌리와일더의 <썬셋대로>에서 그려낸 헐리우드의 잔상에 깊이 공감하는 마틴스콜세지의 매우 개인적인 세계관에 나는 진지하게 동의한다. <썬셋대로>는 진정 공포스러운 영화다. 헐리우드의 썬셋대로위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여배우의 생존 열망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은 비정하기까지 하다. 그녀가 결코, 놓을 수 없었던 끈은 미국이며 헐리우드이며 명예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결국 빌리와일더의 영화세계에 열광하는 마틴스콜세지의 영화의 (결코, 판타지일수 없는) 근거지가 잔혹한 현실이어야 만 하는 합당한 사유는 <썬셋대로>의 여배우가 포기하지 못했던 생존권과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죄의식"은 <갱스오브뉴욕>의 가장 큰 원동력을 대변하는 압축된 단어이며 에너지이다. 그는 뉴욕에 대한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주인공 암스테르담 발론(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역)의 복수극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뉘앙스이며 정확히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의 묶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단어로 정의되는데, 마틴스콜세지의 사적인 죄의식과 책임감이 <갱스오브뉴욕>이라는 이 거대한 작업에 30년간 매달릴수 있게 한 뿌리였다는 사실은, 관객에게도 이중적인 책임을 전가한다.
<갱스오브뉴욕>은 한 개인의 매우 사적인 염원에서 출발하여 미국인의 정체성확인과 인종편견을 재차 되묻는 비판과 자숙의 시간으로 끝나는, 지금까지 헐리웃에서 제작되어온 그저그런 블록버스터사극의 전형과는 전혀 다른 포맷의 영화이다. 영화는 초호화캐스팅과 마틴스콜세지라는 외형적인 브랜드의 가치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상으로 높여줄(마치 스콜세지의 지금까지의 행로는 전부, 이영화를 위한 준비작업의 과정처럼 보일정도다.)미국의 역사가 혹은 세계의 영화역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영화작업으로 기억될것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영화는 역사를 재 창조 하고 개인의 역사에서 시작한 야릇한 감정과 복수의 번뇌를 외형적으로 단단히 장치해두었으나 시종일관 개인의 복수극(따위)을 뛰어넘는 미국인들과 이민자들 사이의 피가 역동하는 검붉은 혈전에 주목한다. 지키려는 자와 넘어오려는 자사, 그들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혈전의 근간이 된 "미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반드시 되물어야 한다고 시종일관 강조한다.
1860년대 파이브포인츠라는 뉴욕의 유명한 슬럼가는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는 거의 단 한시도 파이브포인츠를 벗어나지 않는데, 주인공 암스테르담이 뉴욕 힐게이트교도소에서 다시 파이브포인츠로 돌아오는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으로 비춰진다. 즉, 그는 파이브포인츠에서 태어나고 길러졌지만, 대기근에 시달려 뉴욕으로 대량 이민 오는 아일랜드이민자와 동일시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이후의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암스테르담은 아일랜드이민자로 취급받게 되는데(그것은 암스테르담의 거역할수 없는 선택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다. 즉, 아일랜드이민자들의 파이브포인츠라는 결코 부유하지 못한 이 슬럼가에서 쓰레기취급을 받으면서도 끝내 미국땅에서 안주하고 싶어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아일랜드이민자로 위장할 수밖에 없는 암스테르담의 불안정한 모습을 동시에 그려내가는 이중적인 드라마구조는 결국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과론적 구조다. 결국 도착한자와 지키려는 자란 무엇인가? 파이브포인츠에서 부모를 잃고 수년간 감옥에서 유년시기를 보내야만 했던 미국인 암스테르담에게 파이브포인츠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느껴지는 똑같은 낯설음. 부정해야만 하는 지역인 것이다. 그가 알고 있었던 그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아저씨...그의 아버지를 지켰던 인물들은 암스테르담이 죽여야만 하는 빌더부쳐(다니엘데이루이스역)에게 돈을 헌납하고 그의 끈나풀이 되어 파이브포인츠에서 기생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인간들 그가 기억하고 있던 장소들은 이제 이민자들과 토박이들간의 피튀기는 혈전의 장소이며 누군가의 목을 따내야만 하는 복수의 근거지일뿐이다. 그것은 미국이라는것과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되묻는 것을 일순간에 전혀 무의미하게 만드는 비정한 사유의 근거지일뿐이다. 결국 영화는 시종일관 이민자들과 토박이들간의 무시무시한 혈전을 비쥬얼로 조명하지만 동시에 드라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자문의 반복인가.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 뉴욕의 근간이 될 수 있는것인가? 미국의 역사가 인종의 편견과 이민자들의 뒤통수에 내리꽂은 낫 끝에 달려있는 잔인무도한 칼날의 핏설움에 근간한다면 결국 현재의 미국인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이 땅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오는 것이다.
빌더부쳐는 자신에게 상납하는 모든 파이브포인츠구역 인들에게 "나에게 상납하는 것은 당연해, 큰 파도는 내가 다 막아주니까" 라고 되뇌이는데 이것은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는 대사다. 결국, 빌더부쳐는 악역으로 영화속에서 존재하지만 개인주의가 무시된 전체주의 즉 민족주의자로서의 책임의식에 충실한 그는 공적인 선행자이며 개인적인 구제자인셈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민자들을 내몰고 미국을 지키려고 피를 부르는 빌더부쳐의 고행(?)은 현재 미국을 지켜내고 있는 아둔한 역사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역설적 반복학습이다.
영화는 크게 두줄기로 이루어진다. 이민자와 토박이들간의 끝없는 사투. 그리고 후반부에서 집중하는 징집문제를 큰 줄기로 한 없는자와 가진자들의 사투. 결국 영화가 조명하는 이 큰 두줄기의 역사적인 고증방식은 서사적인 구조로 진행되지만, 그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복수로 불타오르는 암스테르담의 슬픈운명론은 드라마가 결국은 서사적으로 움직여주어야만 하는 책임의식에 순순히 따르고 있지 않아 영화를 더욱 차별화 시킨다. 관객의 예상에 순순히 따르는 마틴스콜세지의 영화를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차갑고 비정한 자본주의에 침을 뱉으며 인간심연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잔인함과 냉정함을 부추기는 마틴스콜세지의 영화답게 영화는 암스테르담이 빌더부쳐에게 충실하게 만든다. 이상하리만치 빌더부쳐(원한의 대상)의 보호와 그늘안에 존재할 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암스테르담의 나래이션은 감독이 정확하게 찔러내고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비열함을 여과없이 드러낸다.(마틴스콜세지! 마틴스콜세지!) 자신의 목적의식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여내야 하는 암스테르담에게 감독은 완벽한 복수의 계단과 계략을 넣어주지 않는다.(보통의 감독들이라면 그러한 서사적이고 일반적인 구조를 따른다.) 대신, 감독은 보호와 비보호의 경계선이 너무나 뚜렷한 파이브포인츠의 시대적배경속에서 생존해나가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미국인일수도 아일랜드인일수도 없는 암스테르담의 인간적 고뇌에 보다 솔직하게 접근해나간다. 이러한 순간의 감독의 통찰력에 어찌 열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결국, 영화는 보통의 헐리우드에서 생산된 전통사극의 외형속에서 마틴스콜세지만의 뛰어난 통찰력과 냉정함으로 온통 채색되어 있는 감독의 필생의 역작이 갖추어야 할 모든 영화적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추어 낸 셈이다. 30년이라는 한 개인의 염원이 작품으로 완성되는 순간을 아무런 노력없이 그저 즐겨내기만 하면 되는 우리 관객들에게 <갱스오브뉴욕>의 관람은 열광의 3시간이며 감사의 3시간이다. 그는 말했다.25년간 써내려온 시나리오가 어찌3시간안에 압축될수 있는가. 결국 제작사와 마틴스콜세지는 1시간을 들어내는 작업에 동의하고 3시간의 러닝타임으로 합의의 종지부를 찍었다.(이제 우리는 갱스오브뉴욕의 DVD 출시일자를 기다리는일에 열광할차례다!) 영화가 암스테르담의 동공에서 시작하여 동공에서 끝나는것처럼 , 줄곧 이어지는 암스테르담의 나래이션처럼 결국, 영화는 매우 중립적인 인물인(운명적으로 그는 중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암스테르담의 시선에 의한 플롯에 철저히 따르면서 결코 지나친 감정의 과잉이나, 작위적인 서사적 구조 혹은 빤한 인물캐릭터(마틴 스콜세지는 암스테르담의 러브스토리조차 작위적인 결과를 비텨나간다. 암스테르담의 제니는 여타의 사극에서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과감히 탈피하여. 생존하려고 한다. 끝내 혼자 캘리포니아행 티켓을 끊는다.)를 설정해나가지 않는다. 거대한 헐리웃의 엄청난 자본이 한 씨네아스트의 30년간의 염원으로 완성되는 이 환희의 순간은 실로 기적이다. (그 엄청난 물량이 위대한 예술가 마틴스콜세지 필생의 작업에 쓰였다는 것이 나로서는 기대이상의 만족감을 느끼게 만든다.) 레오가 마틴스콜세지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수년전 소속사를 바꾸고 천재적영감의 소유자 다니엘데이루이스가(아! 정말 그는 멋지다!) 수년간 멈춰온 영화출연을 과감하게 결정하게 된 모든 선택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다니엘데이루이스의 연기를 본다는 것...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다.
<갱스오브뉴욕>은 프란시스포드코폴라의 <대부>와 함께 거론될만한 대작이다. <대부>를 이루는 근간이 호흡과 같이 중요시되는 가족애였다면 <갱스오브뉴욕>의 근간은 개인의 "생존권"이다. 결국 마틴스콜세지는 전체를 비웃고 개인을 조명하는데, 그 전체를 이루어 낸 역사의 추한 뒷모습을 반추하고 전체에 짓밟혀서 살아남고자 했던 개인들의 (그것이 깨끗하던 깨끗하지 않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욕망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욕망은 장소와 시기의 구분안에서 논란이 되어서도 안되고 정의되어서도 안된다. 생존권에 대한 개인의 욕망은 늘 그렇듯 현재 진행중이다. 9.11테러로 사라진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없는 미국으로 이민하고자 하는 지구촌 희망자들의 염원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한 그 불쾌하고 복잡한 법적 절차는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마틴스콜세지의 <갱스오브뉴욕>은 과거뉴욕을 재현해냈다는 의미만으로 회자되는데 그쳐서는 결코 안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수많은 (현재의 미국과 이어지는)시의적 난제들, 개인정체성에 대한 끊이지 않는 자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너무나 가치있기 때문이다. 마틴스콜세지의 영화작업이 여기서 끝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너무나 큰 상실감에 젖어버릴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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