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만 명중 한 명인 나로서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는지 이해하기 힘들고 연구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란 기본적으로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친구는 이런 메시지를 거의 주지 못하고 있다.
친구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의리와 우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친구에서 의리는 1천만원 짜리 수표와 칼로 정의되고 있다. 교도소를 출감한 장동건은 1천만원 짜리 수표를 주며 이것이 의리라고 말하는 보스의 말을 듣고 불알친구 유오성과 경쟁하는 조직에 들어간다. 그것도 친구 유오성이 어린애들한테 까지 마약을 파는 양아치라며 강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상관 없다며" 총총히 떠나 버린다. 이것이 최근 만연하고 있는 황금만능주의를 묘사한 것이고, 관객들이 이것에 공감했다면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다.
친구는 소위 건달들의 의리가 주요 내용 중 하나다. 하지만 장동건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큰형님을 경찰에 팔아 넘기는 배신을 하고 결국 큰형님의 부하들에게 난자 당해 죽는다. 건달 세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조직과 상사를 배신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나쁜 행위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친구에서 배신을 한 장동건은 무슨 대단한 영웅에게나 어울리는 듯한 장엄한 음악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과연 상식적인 사회 윤리를 거스르는 행위가 아닌 지 영화제작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만 하면 된다는 최근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더욱 우려되는 점이다.
친구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을 주요한 컨셉으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 전반에 복고 열풍을 불러왔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지난 날의 추억이 집단 패싸움을 하고, 여자나 꼬시고, 부모와 선생에게 대드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뭔가 인간적인 감동이 진하게 풍기는 장면을 누구나 한 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인데 친구는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관객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향수는 교복 윗단추나 풀고, 삐딱하게 모자를 쓰고 폼만 잡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선생님들은 우리를 그렇게 무식하게 패기만 했는가 ?
건달세계를 묘사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는 지는 명확하지 않고 단순히 건설입찰 비리, 협박, 공갈, 폭력만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고 진한 사랑의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캐릭터가 불분명한 상택이 집이 부자이고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목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가치관이다.
아버지의 직업이 싫다며 아버지를 무시하고, 그렇게 좋은 직업도 아닌 일을 하며 좋지 않은 일로 번 돈을 아버지에게 던져 주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하나.
600만 명이 선택한 영화를 너무 혹평한다고 말할 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할 것이 분명한 불후의 명작(?)에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다.
종합예술이고 대중예술인 영화는 단순히 있는 사실만을 담아서는 안된다. 그것도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단순히 영상에 담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더욱 안된다. 특히 좋은 영하일수록 더욱 이런 점에 신경을 써야 한다. 관객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감히 말하건 데 친구의 메시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좀더 진한 감동을 주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며 친구에 대한 거친 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