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들 여기와서 본행 말 좀 들어보시오. 윤제균 감독 나으리가 돌아왔소.. 그가 다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줄 여행들의 후끈한 몸매를 한 아름 한지에 담아 가지고 왔으니 어서들 와서 구경들 하시오..
평범해 보여도 평범하지 않은 우리 민초들의 모습을 짝짓기 부지깽이와 접목해서 웃음과 감동을 표현한 윤제균 감독이 <색즉시공>을 내놓은지 1년만에 <낭만자객>이라는 영화를 들고 찾아왔수이다..
활동사진의 접선지대가 억압과 썩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서당도 아니고 음탕한 짝짓기 유머가 난무하는 향교, 서원이 아니라 뒷간 냄새 구수하게 나는 조선시대이니 가히 엉뚱하다 아니 할 수 없소. 그러나 자지러지는 <낭만자객> 예고편을 본 행자들은 알겠지만 '액션', '로맨스', '웃음'의 3박자가 있는 본 영화가 추억의 뒷간 냄새만 풍기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 것이라 믿소. 본행 오늘 이 서면을 빌려 <낭만자객>의 진귀함을 아뢰오니 경청들 하시오.
요즘 유행하는 "하오"체로 글의 서두를 열었지만 솔직히 곤욕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많은 지인들이 윤제균의 <낭만자객>에 대해 불경스러운 입담을 자랑하고 있기에, 이 영화의 가치를 다른 곳에서 느낀 나로서는 그들의 입담 앞에서 또렷한 소리로 그렇지 않다라는 볼멘 소리를 한번도 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낭만자객>은 일명 화장실무비이다. 감독이 보여주는 다양한 웃음의 행태는 비소를 머금게 해주는 저질의 유치한 싸구려 유머이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작가주의의 의식 있는 명품 영화에 입맛이 길들여진 자칭 영화 매니아들이 본다면 저질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명품을 한 개도 소유하지 못한 보통의 여인네고 고상한 유머보다 음탕한 뜻을 품고 있는 단어들의 조합에 경박하게 웃어 재끼는 저잣거리의 아낙네에 심성을 소유했기에 윤제균의 <낭만자객>은 나에게 딱 맞는 동대문표 맞춤옷이 되었다.
윤제균 감독은 <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이라는 코미디 영화에 엉뚱하게도 사회적 의식있는 문제들을 곁들여 감동의 눈물 한 방울을 떨구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두 영화는 유치한 싸구려 코미디라는 약점을 흥행이라는 상업성으로 성공 시켰는지도 모른다.
영화<낭만자객>은 <색즉시공>의 팀을 고스란히 출연시킨 것도 모자라 전작인 두 편의 영화들을 교묘하게 짬뽕해서 재탕하는 행실을 보이고 있다. 감독의 창의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다분히 보이는 이 외형상의 난관은 분명 큰 장애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보여지는 연기자들의 연기는 욕과 바보스러움으로 무장한 것에 머물 뿐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창출하지 못하니 스토리의 끈김 현상은 당연스런 결과로까지 보인다.
조선시대가 무대지만 알 수 없는 시대적 연출 상황도 오뎅국물에서 오뎅 찾는 식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재치를 관객의 웃음으로 끌어내지 못한 연출력은 감독의 영화적 의식마저 의심하게 만드니 말이다.
처녀귀신의 한풀이 <낭만자객>은 이렇듯 불만의 여지가 많은 영화로 보인다. 막말로 김민종이라는 흥행과는 인연이 없는 배우에게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 억지로 출연시켜서 또 다시 패배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분명 김민종(요이)의 주연으로 알고 있던 영화는 최성국(예랑)에 더 많은 부분 의지하면서 김민종이라는 배우에게 어부지리로 흥행의 단맛을 맛보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윤제균의 <낭만자객>은 이렇게 비난의 소리가 나올 것 알면서도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 잡초 같은 감독의 뚝심에 나는 열광한다. 화장실 유머로 가득한 저질이 싸구려 영화 안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소리를 끝까지 하는 그의 오만의 좋다. 미군 장갑차에 죽은 어린 영혼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싸구려 영화 안에 담아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는 그의 고집이 좋다.
저잣거리 아낙네의 단순함을 소유한 나로서는 고급스럽게 포장한 심각한 이야기들은 그리 와 닿지 않는다.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그의 사고방식이 더 쉽게 다가오기 때문에 남들이 비웃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콧물을 훌쩍거려는 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픔이 작가적 필터현상을 거치지 않고 고스란히 화면에 쏟아내는 그의 미련함이 좋아 보였다.
다시 "하오"체로 <낭만자객>에 대한 썰을 풀어보겠소
예랑(최성국)이 죽은(?) 향이를 그리워하면서 뒷간에서 오열하는 씬은 과히 압권이라 아니 할 수 없소. 화장지 대신 쓰여지는 새끼줄의 용도를 확인하면서 민초들의 상식을 바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감독 나으리의 재치와 배려에 존경의 웃음으로 화답했으니 쏠쏠하게 미천한 백성들의 상식마저 챙겨주는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을 뒤 닦고 버리는 휴지라고 치부하지 말지어다. 요이와 예랑의 장렬한 입 박치기를 보면서 우리 가락의 구성진 소리를 바로 짝짓기 용으로 효과적으로 쓰는 그의 뚫린 사고방식을 주시하며 보기를 바라오. 임권택의 <춘향뎐>을 보면서도 느끼지 못한 우리 소리의 효과적 사용을 윤제균의 <낭만자객>에서 봤으니 가히 충격이라 할 수 있소.
남들은 여인네들의 성 노리개화에 대한 감독의 윤리문제로 모함 아닌 모함하는데 그건 반역이라 본행은 생각하오. 뒷방에서 쑥덕대는 향촌문화에 양반네들의 고상함보다 주막에 앉아서 탁주를 들이키면 세월의 시름을 아낙네의 계곡에서 잊으려는 민초들의 우둔함이 나는 좋소. 그래서 윤제균 나으리의 판소리 한마당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웃고 했소이다. 나랏님도 제대로 말 못하는 만백성의 그 원성을 통렬하게 풀어 제끼는 이 저잣거리가 정겨우니 어쩌란 말이오. 본행의 손에 울릉도 호박엿만 들려 있으면 그것만으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소?
오늘들은 윤제균 나으리의 판소리 한마당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떠하리오. 어차피 다른 저잣거리에서 판소리의 둘러치기 성격에 의해서 같은 얘기라도 다르게 한바탕 펼쳐 보일 것인데 말이오. 허술한 오늘의 윤제균 나으리의 판소리는 다른 저잣거리에서 더 구성지게 울려 퍼질 것이니 본행은 그의 판소리가 단지 세 마당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진정 윤제균 나으리는 혼탁한 이 시대의 풍기문란 랑.만.자.객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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