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국사'에 최초의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얼마전 우리도 성공리에 치른 월드컵을 관전하면서부터이다. 그 관심은 어려서 월드컵 경기를 관전하다가 도대체 영국의 축구 대표팀은 몇 개인지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이 있고,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있는가 하면, 아일랜드 대표팀도 월드컵에 별도의 선수단을 구성해서 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일랜드'가 영국이 아니라 독립국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북아일랜드는 뭐고, 아일랜드는 뭔가? 이 나라는 도대체 축구 대표팀이 몇 개인가?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궁금증은 소위 '영국사(英國史)'에 대한 나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후 '아일랜드'라는 작은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하는 한 시초가 되었다.
영국이란 섬나라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원주민은 어느 민족인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체로 이베리아족이 그 원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켈트족이 침입하고, 케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영국을 침범하여 지금의 템즈강 하구에 론디니움(Londinium)이란 항구 도시를 건설한 것이 오늘날 런던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영국을 의미하는 브리튼(Britan)의 어원이 '몸에 색칠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라틴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영국을 침범한 로마 군대에 쫓긴 켈트(스코티)족은 습하고 기후가 좋지 않은 북부 산악지역,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쫓겨난다. 로마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로마가 브리튼섬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자 북부 지방의 켈트족이 다시 남하를 개시하면서 위기를 느낀 브리튼 남부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민족인 유럽대륙의 켈트족 일파인 앵글로족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앵글로족과 색슨족의 대대적인 영국침공이 시작된다. 이들이 건설한 국가가 오늘날 대영제국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 初夜權)
프리마 녹테, 일명 초야권이라고 하여 일반적으로 중세 시대 영주들이 평민이나 농노가 결혼할 때 첫날밤 신랑을 대신하여 신부와 성관계를 맺는 권리를 말하는데 이런 초야권은 사실 중세 장원의 소유주인 영주들에 의해 처음 실행된 것은 아니다.
이런 초야권이란 제도 자체는 세계 각지의 미개민족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습속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세의 영주 뿐만 아니라 인도의 사제계급인 브라만이나 캄보디아의 불교, 도교의 승려들에 의해 의식으로 행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일부 문명권을 비롯하여 오늘날에도 여성의 자연적인 생리주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인 몸엣것(월경)과 같이 '피(blood)'를 불운한 징조로 여기는 전통과 습속은 이어져 왔고, 그에 따라 여성의 생리와 생리혈은 감추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일부에서는 초야권을 이런 여성의 출혈에 따른 불운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거기에 더해져 원시 공동체(부족, 씨족)의 제의 속에서 신의 뜻(神意)에 따라 펼쳐지는 신분 상하 귀천 없이 행해지는 난교(亂交)의 흔적, 또는 공동체(부족·씨족)에 의한 부녀공유(婦女共有)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중세 장원의 소유주인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속하는 농노를 혼인시킬 때 신랑을 대신하여 신부와 첫날 밤을 치르는 권리로서 '초야권'을 규정해두고 실시해왔다. 중세 장원 경제는 엄격하게 규정된 폐쇄 사회로 농노의 이주는 물론 혼인 역시 영주의 승인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고, 농노는 당연히 영주의 재산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초야권'을 주장하여 행사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초야권'을 치르는 영주에게도 몇 가지 제약 사항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령 성관계를 갖더라도 사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브리튼이라는 어원에는 몸에 색칠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혹자는 스코틀랜드 전사들이 얼굴에 바른 염료가 '쪽'의 일종으로 전장에서 부상을 염려한 항생제의 기능을 대신한 것이라고 하는 데, 내가 보기에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겁주는 용도와 폼잡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 같다.(우리들도 월드컵 기간 동안 얼굴에 떡칠 많이 하지 않았는가.)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 1267~1305)
월레스는 잉글랜드의 기병대를 무찌를 비장의 무기를 얻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역시 기병대가 필요했다. 말이란 예나지금이나 부자들이나 탈 수 있는 동물이었다. 말 한 마리를 기르고 병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분오열된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기병대를 이용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도록 한다. 영화에서는 귀족들의 기병대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는데 실전에서는 그들의 측면 공격이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궁수대의 사격을 버텨내며 본진까지 돌격하는 데는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는 지형적인 조건과 단합된 지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탓에 잉글랜드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지역이었으므로 기병대를 양성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군은 보병의 맹렬한 돌진에 의한 충돌 이후 난전에 돌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법이었고, 이런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의 맹렬 돌진 전법은 평지 출신이 대부분인 잉글랜드 보병들에겐 끔찍한 경험이 되기 일쑤였다.
준비가 완료된 뒤인 1298년 잉글랜드군은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폴커크(The Battle of Falkirk) 에서 월레스를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영국측에 회유당한 귀족들이 월레스를 지원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월레스는 도주하여 일종의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으로 그려지는데(스코틀랜드 민담에는 그렇게 기술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실패한 영웅들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움직이며 전설을 이어가듯) 실제 역사에서는 폴커크에서 패한 뒤 프랑스로 탈출, 다시 세를 규합하여 저항을 계속하다가 1305년 다시 패배하여 체포된 뒤 사형당한다.
영화에서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인 이사벨 공주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병석에 누워있는 시아버지의 침상에서 사랑하는 월레스에게 자비를 간구한다. 그러나 월레스의 생존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에 저해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에드워드1세에게 거절당하자 자신이 월레스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의 아들은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07년 왕위에 올라 그후 20년간 영국을 통치한다. 어쨌든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3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한다(그렇다고 그가 윌리엄 월레스의 아들이란 뜻은 물론 아니다. 하기사 누가 알겠는가 오늘날처럼 DNA검사도 없는 시대였는데). 어쨌든 이들은 고대 켈트족의 일원으로 영국을 건설한다. 좀더 시간이 흘러 북부 게르만의 일족인 바이킹족의 남하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영국은 가벼운 배를 타고 뛰어난 항해술을 동원한 바이킹 전사들의 무자비한 약탈에 노출된다. 특히 영국 해안 지대를 자주 침공한 이들은 덴마크 지역의 바이킹들인 데인족이었는데, 이들을 격퇴한 인물인 알프레드 대왕은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왕'이란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바이킹족의 약탈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약탈에 대해 무력으로만 응수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무력보다는 혈연상으로도 자신들과 가까운 데인족들을 영국에 거주토록 하는 정책을 써서 성공한 것이었다(물론 알프레드 대왕이 그런 정책을 하기 이전에 벌써 데인족은 영국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책을 펼쳐 노르망디 지역에 그들을 거주토록 하여 달래는 데 성공한다. 1066년 기병대를 앞세운 노르망디 대공 윌리엄(훗날 정복왕 윌리엄이라고 불리우는)이 영국을 침공하여 당시 잉글랜드 헤럴드왕이 이끄는 보병간의 전투인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대승을 거두며 노르만족에 의한 영국 왕실이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대영제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 이렇게 복잡하고 긴 이름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나마 서술해보았다(좀더 자세한 것은 영화 <헨리5세>와 <롭 로이> 등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그렇게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쫓겨난 영국인들(켈트족)이 이미 노르만족이 장악한 영국 왕실에 대항하여 그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던 중에 나타난 민족 영웅 '윌리엄 월레스(Willam Wallace)'에 대한 이야기이다.
악명높은 프리마녹테(Primae Noctis, 초야권)와 스코틀랜드의 자유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뭐,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대개 할리우드 액션활극들이 그러하듯 <브레이브 하트>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할리우드식 드라마 만들기의 전형적인 구도를 갖고 있다. 우선 전제군주의 폭압적인 정치에 짓눌려있는 민중의 영웅이 봉기하여 저항하다 결국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아 자자손손 이어진다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기만 해서야 관객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다양한 관객층을 포섭하기 위해 여기에 몇 가지 재미들을 곁들이고 있다. 우선, 호주 출신의 배우로 피터 위어 감독의 <갈리폴리>, 세기말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컬트의 걸작 <매드맥스> 시리즈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멜 깁슨은 자기 조상의 뿌리가 스코틀랜드라는 장점을 살려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일대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일단 패배한 자를 위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성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 러브 스토리를 덧씌우는 당의정(糖衣錠) 기법까지 쓰고 있다. 거기에 이 시대 최고의 섹시 가이 중 하나인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주연을 맡았으니,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 촬영, 분장, 효과 및 사운드 편집, 작품 등 5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할 만 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린 월레스의 아버지가 잉글랜드의 폭정에 저항하기 위해 각 씨족 사람들과 회합을 벌이다가 잉글랜드군의 습격으로 모두 죽고 마는 사건이 벌어진다. 어린 월레스는 간신히 살아남아 인근의 월레스 씨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어린 월레스는 이웃집의 어린 소녀 머론을 만나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성장한 월레스는 다시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오지만 잉글랜드의 학정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드디어는 악명높은 프리마 녹테(初夜權)마저 부활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지만 돌아온 월레스는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자약하게 지내 도리어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아버지 월레스는 잉글랜드에 저항하다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윌리엄 월레스에 더욱 실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숙한 처녀가 된 머론(캐서린 맥코맥)은 이런 월레스를 이해하고 그를 감싸준다.
영화와 역사의 차이 - 폭군 롱생크(Longshanks)와 유능한 군주 에드워드1세
영화 속에서 악명 높은 전제 군주로 등장하는 롱생크(패트릭 맥고한)는 플랜태저넷(앙주)왕조의 5번째 왕인 에드워드 1세(Edward, 재위 기간1272-1307)를 말한다(플랜태저넷 왕조에 대해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던 '100년 전쟁'과 함께 영화 <잔다르크>와 <천일의 앤>, <로빈 후드> 등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에드워드 1세가 폭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 왕조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능한 군주이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주였다는 사실은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이전까지 영국(잉글랜드)사회를 양분하고 있던 노르만과 앵글로 색슨의 구별을 없앴고(이전까지는 노르만족의 지배우위), 정복왕 윌리엄(출신이 프랑스이고, 노르망디 대공을 겸하여 형식상 프랑스왕의 신하였다) 이후 최초로 영국식 이름을 가진 진정한 영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1세는 자신만 영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노르만 정복 이후 줄곧 하층민(장인과 농노)의 언어였던 영어를 사용하여 보편화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외에도 에드워드1세는 선대(존왕과 헨리3세)에 잃어 버린 프랑스 내 영국영토를 회복하기 보다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대브리튼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1277년 웨일즈 침공을 시작으로 1284년 웨일즈 정복을 완료한 뒤에는 웨일즈 북부의 카나번 성(Carnarfon Castle)에 체류하던 중 훗날 에드워드2세가 되는 그의 넷째 아들 에드워드의 탄생을 보게된다. 그는 웨일즈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여기 너희 웨일즈의 새로운 왕자(Prince of Wales)가 있다' 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영국의 황태자들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로 불리우게 되는 기원(현재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당연히 '찰스' 황태자이고, 그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는 'Princess of Wales'라 불렸다)이 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에드워드1세의 업적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기 직전 해인 1295년 모범의회(Model Parliment; 귀족이 아닌 지방의 평민 대표들까지 왕의 귀족회의에 참석시켰고, 이 때부터 의회가 새로운 제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다)를 소집하여 내부 결속까지 다진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웨일즈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영국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1296년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한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왕을 무찌른 에드워드 1세는 '스콘의 신성한 돌(The stone of Scone, 전설상으로는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이 천사의 꿈을 꿀 때 베고 잔 베개라고 한다)을 빼앗아 자신의 의자에 끼웠고, 오늘날에도 이 의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국왕의 대관식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영국 전토를 장악한 에드워드 1세는 영국식 법과 질서를 스코틀랜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지역 사람들과는 그 뿌리부터 다른 족속이었고, 로마의 문명세례를 거부한 채 험악한 산지를 배경으로 로마군의 공격도 물리친 경험이 있는 호전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을 지닌 민족이었다.
월레스의 봉기와 스털링 전투
다시 영화로 돌아와 윌리암 월레스는 '초야권'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머론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치르지만 머론은 읍내에 나갔다가 영국 주둔군 병사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병사의 겁탈을 피하려다 상처를 입히고 그만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까지 밝혀지고 만다. <브레이브 하트>를 보면서 약간 놀라워했던 부분은 주둔군 대장이 월레스의 부인이 된 머론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리는 장면이었다. 이 부분에서 감독 멜 깁슨은 관객의 호흡을 순간적으로 빼앗는데, 왜냐하면 관객들은 그렇게 아무 말없이 여인의 목을 단검으로 베어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많은 영화들이 가련한 여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이야기들을 하게 만든다는 점을 염두에 뒀을 때). 머론이 죽는 장면이 영화 전체를 통해 영국군의 잔혹함을 가장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머론의 죽음을 목도한 윌리엄은 그동안의 머뭇거림과는 대조적으로 영국 주둔군 부대를 순식간에 궤멸시킴으로써 반란의 봉화를 올린다. 그동안 영국의 압제에 시달려 온 스코틀랜드 민중들은 너나할 것 없이 월레스의 반란군에 합류하게 된다. 1297년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의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스털링(Stirling)에서 전투를 벌인다. 영화 속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 스코틀랜드는 지형적인 조건과 단합된 지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탓에 잉글랜드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지역이었으므로 기병대를 양성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군은 보병의 맹렬한 돌진에 의한 충돌 이후 난전에 돌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법이었고, 이런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의 맹렬 돌진 전법은 평지 출신이 대부분인 잉글랜드 보병들에겐 끔찍한 경험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보병 대 기병 전투는 인류의 오랜 전쟁사를 살펴볼 때 특별한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대개 기병을 이용한 전술의 압도적인 우위로 나타난다. 전쟁사에 기록된 고대와 중세의 전투들 중 유명한 전쟁 중 보병이 승리한 전투들이 정말 위대한 전술의 승리로 기록되는 이유도 보병이 기병을 이기기 어렵다는 전술적인 난제를 극복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엔 이런 대규모 기병전술을 경험할 일이 없기 때문에 기병의 두려움을 실감하기 어려운데, 가령 오늘날의 전차(Combat Tank)들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당시의 기병들이 수행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좀 더 자세한 내용은 영화 <헨리5세>와 <글래디에이터> 편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과 벌이는 대규모 접전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이는 부분은 장궁을 이용한 궁수대의 일제 사격과 더불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압도해 들어오는 기병대의 돌격 전술에 번번이 패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 월레스는 이런 전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알렉산더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의 장창병들을 연상케 하는 나무로 깍은 장창 바리케이드를 준비한다.
월레스는 잉글랜드의 기병대를 무찌를 비장의 무기를 얻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역시 기병대가 필요했다. 말이란 예나지금이나 부자들이나 탈 수 있는 동물이었다. 말 한 마리를 기르고 병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분오열된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기병대를 이용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도록 한다. 영화에서는 귀족들의 기병대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는데 실전에서는 그들의 측면 공격이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궁수대의 사격을 버텨내며 본진까지 돌격하는 데는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보아야 할 대목은 월레스의 기만 전술이다. 그는 장창 바리케이드를 준비한 상태에서 기병대의 돌격이 바로 코 앞에 이를 때까지 장창을 들어올리지 못하도록 한다. 흔히들 기병대의 돌격을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말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가속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질주해야만 가능하다. 만약 월레스가 조금만 일찍 장창을 들어올리도록 했다면 겁이 많은 짐승인 말의 특성상 장창에 이르기 전에 멈춰서거나 기수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되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분열과 기득권의 유지
스털링에서 대승을 거둔 월레스와 스코틀랜드 반군은 거듭하여 잉글랜드의 국경 지역을 침범한다. 영화 속에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며느리인 프랑스의 이사벨 공주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월레스를 주춤하게 만든다. 그 사이에 자신은 군비를 추스린 다음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회유하는 공작을 진행시킨다. 준비가 완료된 뒤인 1298년 잉글랜드군은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폴커크(The Battle of Falkirk) 에서 월레스를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영국측에 회유당한 귀족들이 월레스를 지원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월레스는 도주하여 일종의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으로 그려지는데(스코틀랜드 민담에는 그렇게 기술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실패한 영웅들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움직이며 전설을 이어가듯) 실제 역사에서는 폴커크에서 패한 뒤 프랑스로 탈출, 다시 세를 규합하여 저항을 계속하다가 1305년 다시 패배하여 체포된 뒤 사형당한다.
영화에서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인 이사벨 공주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병석에 누워있는 시아버지의 침상에서 사랑하는 월레스에게 자비를 간구한다. 그러나 월레스의 생존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에 저해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에드워드1세에게 거절당하자 자신이 월레스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의 아들은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07년 왕위에 올라 그후 20년간 영국을 통치한다. <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의 트림성과 잉글랜드에서 촬영되었고, 제작비만 해도 8천만불이란 막대한 금액, 3천 명의 엑스트라, 6천 벌의 의상 제작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영화였다. 영화는 영화이고, 역사는 역사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주는 교훈은 그리 만만치 않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아버지는 부족에서 비록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기는 했으나 평민이었고, 윌리엄 자신도 귀족 계급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해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털링에서의 전투에 앞서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에 대해 다른 동료들에게 명확하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단순히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고 연연해 하는 귀족들의 땅덩이를 넓혀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모두는 결국 한 번은 죽게 된다. 그러나 오늘 전장에서 이탈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뒤 살아남아 기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게 될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가슴 어딘가에서 뜨거운 기운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마치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에서 국왕 헨리가 결전을 목전에 두고 행한 '성크리스핀의 날' 연설처럼 말이다). 결국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9시 뉴스 시간에 앵커들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불러대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통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이 사용하는 대단히 긴 장검의 명칭은 원래 '츠바이핸터(Zweihander)'는 말 (독일어) 그대로 양손검을 의미한다. 13세기에 등장해서 16세기말까지 쓰였으므로,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4세기 초엽 무렵엔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칼은 매우 길어서 그 길이가 180cm에 이른다. 말을 타지 않는 보병들이 주로 이용했다(이런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빈다고 생각하면 힘이 엄청 좋아야 할 듯). 한편 다른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사용한 칼들은 장검(Long Sword)의 일종으로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칼인 클레이모어(Clatmore)를 단순한 형태로 보인다.
분노한 에드워드 1세에 의해 행해진 월레스의 처형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어 스코틀랜드인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스털링대학의 바로 남쪽 언덕에 1869년에 세워진 높이 67m, 246계단의 윌리엄 월레스 기녑탑이 있다. 이 탑은 부르스가 1314년에 승리한 스털링브리지에서 1297년 월레스가 잉글랜드 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이 탑에는 월레스가 사용한 검과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옥스포드 영국사』/ 케네스 모건 지음/ 한울/ 1997년 - 상당한 두께와 분량의 영국사 서술이다. 영국의 역사를 고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 까지 간단치 않은 레벨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다. 삽화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영국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책 구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전쟁의 역사1.2』/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책세상/ 1996년 - 가끔 영국인들의 실용적이고 검박한 기질에 놀라는 경우가 있다. 미국쪽 서술에 의하면 고집세고 매우 독단적인 인물로 받아들이기 쉬운 몽고메리 장군. 그러나 그의 전쟁사 서술인 이 책을 읽다보면 그가 매우 겸손한 인물이면서 동시에(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사에 매우 해박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도 포로로 잡힌 적장과 전술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학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전쟁사 101 장면』/ 정토웅 지음/ 가람기획/ 1997년 - 전쟁사에 대해 국내 최고의 필자 중 한 사람인 정토웅 씨가 인류사 중 101가지 전투를 끄집어 내어 간략히 다이제스트하고 있는 책이다. 이런 책의 장단점은 누누히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이다. 이 책을 재미있는 방법 한 가지는 기병에 대해 보병이 승리하기 어떤 불굴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영국이야기를 한 눈에 - 영국 여행을 비롯해서 영국 각지의 여행지 등을 소개하고 있는 매우 훌륭한 사이트이다. 게다가 우리들이 흔히 접하기 어려운 영국 왕조의 계보를 다루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이들은 읽어보기 바란다.(한글)
지오 영국 - 실제 역사 인물인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다루고 있다. 유학 문제를 비롯해서 영국의 문화와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다.(한글) 윌리엄 월레스의 죽음과 그 뒤
윌리엄 월레스를 다룬 <브레이브 하트>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배신으로 체포된 뒤 런런으로 압송된다. 영화 속에서 그는 국왕에게 반역한 죄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데 당시의 사형 방식은 군중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고, 이는 국민들에게 국왕이 베푸는 일종의 이벤트이면서 동시에 준엄한 경고였다. 웨스터민스터에서 재판을 받은 윌리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찾아온 이사벨 공주가 편안히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건네준 독약을 받아 먹는 척하다가 공주가 돌아가자 다시 뱉어 버린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기념비에는 그가 재판을 받을 때 말했다는 말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멜 깁슨의 입을 통해 그의 주장을 다시 들어볼 수 있다.
"나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에게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나의 왕이 아니다. 나는 그와 아무런 동맹관계도 없다. 그는 결코 나에게서는 신사의 예를 받을 수도 없고, 나의 생명이 이런 박해받는 육신 속에 있는 한 그는 결코 충성의 예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체포된 윌리엄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사지를 묶어 늘이는 고문 뒤에 배를 가르고, 창자를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실제로 보여줄 수 없으므로(그랬다가는 보나마나 X등급을 받을 것이므로) 난쟁이 광대를 동원해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 장면을 유추해볼 수 있도록 한다. 실제로 월레스가 이런 형벌을 집행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대 크리스트교 순교 성인 중 '성 에라스무스'는 실제로 이렇게 창자를 잡아 뽑히는 죽임을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런 공개 처형을 감상하면서 순교자의 죽음을 연상하며 그로부터 일종의 엑스터시 상태에 이르렀고, 처형당하는 이들은 죽음에 이르러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좀더 일찍 해방될 수 있었다(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르누이가 그동안 채취한 소녀의 향수를 열었을 때 사람들이 집단적인 난교와 광란에 들어서는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고문과 쉴새없이 가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월레스는 '자비(mercy)'를 구하는 대신 '자유(freedom)'를 외쳤고, 그는 죽음에 이르러 먼저 간 '머론'의 모습을 군중 속에서 발견한다. 그의 목을 잘라내기 위한 사형집행인의 커다란 도끼가 높이 들어올려지고 윌리엄 월레스는 마지막 단말마처럼 '자유'를 소리높여 외친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쥐고 있던 머론과의 혼인 징표였던 손수건이 형장 바닥에 떨어진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지 않고 다시 전장으로 향한다. 윌리엄 월레스는 처형당한 후 사지가 찢겨져 거리에 내걸리지만 그런 잔혹한 보복 조치는 자유를 갈구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그들은 월레스의 죽음에 고무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잉글랜드로의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희망했다. 윌리엄 월레스가 죽은 1305년으로부터 9년이 흐른 뒤인 1314년 스털링으로부터 3.2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배녹번(Bannockburn)에는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스코틀랜드 귀족 중 그나마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브루스는 윌리엄 월레스 못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영웅 중 한사람이었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는 월레스의 죽음 이후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베녹번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결전의 날이었던 1314년 6월 24일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베녹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다. 영화는 이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오늘날에도 스털링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항쟁의 땅'으로 그들의 기억속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후 스튜어트 왕조(스코틀랜드 출신) 시대에는 영국 왕실이 특히 애착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만약 영화의 설정대로라면 윌리엄 월레스의 아들이어야 맞겠지만)가 1328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승인한 뒤에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다가 결국 서양의 중세가 저문 뒤인 1603년에 이르러 두 나라의 왕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끝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역사 설정은 상당 부분 작위적인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부분들이 영화적 완성도를 해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고스란히 옮겨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과거의 역사를 다루되 오늘날의 적극적인 해석을 가함으로써 과거의 역사가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고, 관객의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만 역사적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영화의 독자라고 할 수 있는 관객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다루는 영화를 보고서 그냥 거짓일 뿐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사람은 영화에서도, 역사에서도 아무런 가르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윌리엄 월레스가 꿈꾸었던 '자유'가 오늘날 시민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꿈꾸는 '자유'와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심지어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적 저항 혹은 개인의 저항 폭력마저도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움직임(최근 계간지 『당대비평』 편집주간 문부식의 <조선일보> 인터뷰와 관련하여)마저 있는 상황에서 월레스의 저항은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일 미친 사람이 베를린의 번화한 거리에서 인도 위로 차를 몰고 달린다면, 나는 목사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내가 만일 그 장소에 있다면 차에 뛰어 들어 그 미친 운전사가 더 이상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결국 양심을 가장한 또 하나의 파시즘 이론이다. 한 개인에게 자발적인 양심의 가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사회학 이론이나 정치학이 해야 할 담론이 아니라 종교나 도덕이 가로 맡아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너희들 중 죄없는 자가 저 여인을 치라"는 설교를 늘어놓는다면 나는 우선 이렇게 되묻겠다. "니가 신(神)이냐?" 나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 주장하는 바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협소한 개념이다. 그런 협소한 개념을 사회의 모든 분야에 들이대는 방식은 도덕을 가장한 폭력이며,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저의를 의심한다.
(출처 : '브레이브 하트( BRAVEHEART, 1995 )'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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