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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변명입니다! 붉은 달
kharismania 2006-10-13 오전 3:48:15 1107   [13]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땅에 축복같은 날이지만 현해탄 건너 섬나라에는 제삿날같은 비극이었다. 패전국의 멍에를 지고 식민지의 주인행세를 하던 일본인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면죄부는 될 수 없다. 타민족에게 행한 긴 억압의 시간동안 그들이 긴 향락을 누렸음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국가와 민족이라는 규모적 자발성의 괴리감 사이에서 바라보이는 시선의 공백에 놓여진 책임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게이샤의 노래'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나카니시 레이가 자신의 어머니의 과거경험담을 토대로 써낸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이작품은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2시간여의 시간안에 압축한다. 그리고 그 압축의 집행자는 '호타루'와 '철도원'을 만든 일본의 노장감독 후루하타 야스오다. 일본의 노장은 '호타루'를 통해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빚어내는 민족적 반성을 드러내기도 했고 최근 장이모우 감독의 '천리주단기'를 통해 민족간의 감정적 상처의 치유를 은연중에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두 작품의 중간지대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역사적인 현실안에서 헤매는 개인적 감성의 번민이 안착하는 지점은 역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자기 위안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그 두 방점의 균형이 적절한 무게감으로 수평을 유지하거나 어느 한쪽의 지점으로 기울었을 때 그것이 적절한 태도를 견지하느냐다.

 

 시작부터 영화는 관객에게 모호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군인들이 양조장으로 들이닥치고 이윽고 러시아 여인을 스파이 혐의로 즉결처형한다. 전시라는 상황의 인지. 그리고 그 와중에 둘러싸인 인물들간의 감정적 긴밀함의 근거가 될 사연에 대한 의문. 무미건조한 감성을 강압하듯 흑백과도 같이 톤이 낮은 무채색의 화면으로 채워지는 스크린은 물음표와 느낌표의 방점이 나란히 세워진다.

 

 일단 이 영화의 축을 이루는 것은 나미코(도카와 다카코)라는 여인이다. 남편인 모리타(가가와 데루유키 역)와 함께 만주로 건너와 남편의 양조장 사업을 성공적으로 뒷바라지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첫사랑이던 관동군 장교 오스기(호테이 도모야스 역)와의 연정을 되새기기도 하고 젊은 히무로(이세야 유스케 역)에게 애정을 품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 여자를 중심으로 한 개인이 역사에 휘둘리며 겪게 되는 풍파끝의 인생여담을 펼친다. 그리고 그 인생여담은 역사적 현실과 뭉뚱그려지며 과거에 대한 묘한 세태적 회상으로 연결된다. 그 와중에 묻게 되는 것은 주체자들의 인식이다.

 

 과연 일본제국의 식민주의정책의 책임은 누구한테 물어야 하는가. 단지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며 살아온 일본인들은 그들의 정부가 추진한 이민정책의 피해자인가. 물론 패망국의 칼을 쓰고 본국으로 달아나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식민제국의 비호아래 타민족의 불행을 발판삼아 향락을 누리던 그들의 모습에 면죄부가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들의 국가가 내세운 정책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그들이니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공범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물론 영화에서 히무로는 죄책감으로 자신을 경멸하고 그 죄값을 받으려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은 변명에 불과해보인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죄책감을 떨쳐내려는 수단에 불과할 뿐 진실한 사죄로 다가오지 않는다. 또한 전선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관동군 중좌 오스기의 최후도 그들의 그릇된 과거를 비장함으로 포장하려는 허구적 진실에 가깝다. 또한 포로로써 노동에 징집되길 자처하는 모리타의 모습 역시 결과적으로는 애국심으로 위장한 그릇된 국가적 신념에 대한 옹호와도 같다.

 

 개인적인 감성안에서 이 영화는 '글루미 선데이'가 연상되기도 하고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는 나미코라는 캐릭터로부터 발산되는 고전적이면서도 매혹적인 기운떄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변화의 흐름은 다소 빈약하다. 역사적 현실 안에서 희극과 비극적인 삶을 반목하는 캐릭터의 강인함과 지혜로움보다는 지극히 욕망적인 개인의 감정적 고뇌만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과거를 미화해버리는 결말부의 그녀는 마치 자신들의 잘못조차도 시간이라는 흐름안에 희석시키고 변질시켜버리는 거부감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역사적인 진실함도 개인적인 감성적 설득력도 빈약하다.

 

 영화의 풍광은 이채롭다. 잿빛같은 무채색 풍광은 영화의 시대배경만큼이나 오래묵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실로 암담하다. 잿빛같은 풍광만큼이나 영화의 끝머리에 남는 감상조차도 잿빛같은 암담함이 감돈다. 일본의 노장감독이 풀어내는 비겁한 변명같은 과거담의 우회론은 다소 씁쓸할 따름이다. 적어도 '호타루'의 결말적 반성은 진솔했다. 하지만 만주를 노스텔지어의 대륙으로 결론짓는 나미코의 모습으로부터 수없이 탄압받은 식민지인들의 처참한 현실이 무시된 것만 같다면 그것은 필자가 아직도 단순한 과거사에 지나치게 감정적인 탓일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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