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뭐,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대개 할리우드 액션활극들이 그러하듯 <브레이브 하트>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할리우드식 드라마 만들기의 전형적인 구도를 갖고 있다. 우선 전제군주의 폭압적인 정치에 짓눌려있는 민중의 영웅이 봉기하여 저항하다 결국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아 자자손손 이어진다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기만 해서야 관객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다양한 관객층을 포섭하기 위해 여기에 몇 가지 재미들을 곁들이고 있다. 우선, 호주 출신의 배우로 피터 위어 감독의 <갈리폴리>, 세기말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컬트의 걸작 <매드맥스> 시리즈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멜 깁슨은 자기 조상의 뿌리가 스코틀랜드라는 장점을 살려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일대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일단 패배한 자를 위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성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 러브 스토리를 덧씌우는 당의정(糖衣錠) 기법까지 쓰고 있다. 거기에 이 시대 최고의 섹시 가이 중 하나인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주연을 맡았으니,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 촬영, 분장, 효과 및 사운드 편집, 작품 등 5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할 만 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린 월레스의 아버지가 잉글랜드의 폭정에 저항하기 위해 각 씨족 사람들과 회합을 벌이다가 잉글랜드군의 습격으로 모두 죽고 마는 사건이 벌어진다. 어린 월레스는 간신히 살아남아 인근의 월레스 씨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어린 월레스는 이웃집의 어린 소녀 머론을 만나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성장한 월레스는 다시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오지만 잉글랜드의 학정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드디어는 악명높은 프리마 녹테(初夜權)마저 부활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지만 돌아온 월레스는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자약하게 지내 도리어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아버지 월레스는 잉글랜드에 저항하다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윌리엄 월레스에 더욱 실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숙한 처녀가 된 머론(캐서린 맥코맥)은 이런 월레스를 이해하고 그를 감싸준다.
영화와 역사의 차이 - 폭군 롱생크(Longshanks)와 유능한 군주 에드워드1세
영화 속에서 악명 높은 전제 군주로 등장하는 롱생크(패트릭 맥고한)는 플랜태저넷(앙주)왕조의 5번째 왕인 에드워드 1세(Edward, 재위 기간1272-1307)를 말한다(플랜태저넷 왕조에 대해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던 '100년 전쟁'과 함께 영화 <잔다르크>와 <천일의 앤>, <로빈 후드> 등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에드워드 1세가 폭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 왕조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능한 군주이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주였다는 사실은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이전까지 영국(잉글랜드)사회를 양분하고 있던 노르만과 앵글로 색슨의 구별을 없앴고(이전까지는 노르만족의 지배우위), 정복왕 윌리엄(출신이 프랑스이고, 노르망디 대공을 겸하여 형식상 프랑스왕의 신하였다) 이후 최초로 영국식 이름을 가진 진정한 영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1세는 자신만 영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노르만 정복 이후 줄곧 하층민(장인과 농노)의 언어였던 영어를 사용하여 보편화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외에도 에드워드1세는 선대(존왕과 헨리3세)에 잃어 버린 프랑스 내 영국영토를 회복하기 보다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대브리튼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1277년 웨일즈 침공을 시작으로 1284년 웨일즈 정복을 완료한 뒤에는 웨일즈 북부의 카나번 성(Carnarfon Castle)에 체류하던 중 훗날 에드워드2세가 되는 그의 넷째 아들 에드워드의 탄생을 보게된다. 그는 웨일즈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여기 너희 웨일즈의 새로운 왕자(Prince of Wales)가 있다' 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영국의 황태자들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로 불리우게 되는 기원(현재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당연히 '찰스' 황태자이고, 그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는 'Princess of Wales'라 불렸다)이 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에드워드1세의 업적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기 직전 해인 1295년 모범의회(Model Parliment; 귀족이 아닌 지방의 평민 대표들까지 왕의 귀족회의에 참석시켰고, 이 때부터 의회가 새로운 제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다)를 소집하여 내부 결속까지 다진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웨일즈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영국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1296년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한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왕을 무찌른 에드워드 1세는 '스콘의 신성한 돌(The stone of Scone, 전설상으로는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이 천사의 꿈을 꿀 때 베고 잔 베개라고 한다)을 빼앗아 자신의 의자에 끼웠고, 오늘날에도 이 의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국왕의 대관식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영국 전토를 장악한 에드워드 1세는 영국식 법과 질서를 스코틀랜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지역 사람들과는 그 뿌리부터 다른 족속이었고, 로마의 문명세례를 거부한 채 험악한 산지를 배경으로 로마군의 공격도 물리친 경험이 있는 호전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을 지닌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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