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우 1,2 편에 이어 그 동안 궁금했던 실마리들과 스토리상의 맥락, 시간상을
대략 가늠할수 있는 접합점을 만들어 놓은 <쏘우3> 의 매력은 치명적인 중독성을
자랑할만하다. 대런 린 보우즈만 감독은 치밀한 시나리오의 매력처럼 쏘우시리즈에서
직쏘의 역활을 맡은 토빈 벨을 비롯한 쏘우2편부터 모습을 드러내었던 아만다역의
샤니 스미스의 배우로서의 연기력을 최대한 드러나도록 하는 시나리오로 돌아왔다.
심지어 쏘우 1편조차도 아만다가 관계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트릭의 장면을 준비하는
과정의 삽입은 감독으로서의 기발한 상관관계와 접합접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드는
탁월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쏘우에서 보여주는 가장 스릴러적인 요소는 반전을
만들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예상을 깨트리는 탁월한 지적 스릴러적 영상미에
있다. 하지만 <쏘우3> 가 보여주는 것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 강하다는데 있다.
정의와 악이라는 심판자적 입장의 직쏘가 강요하는 것은 삶과 죽음에서의 선택권을
강요하는 것인데 쏘우1, 2 편에서는 나름대로의 그에 합당한 정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쏘우3에서 보여주는 반전이라고 보여지는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몰아세우는 과정에서의 희생자들에 대한 정의는 과연 무엇이였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제프(앤거스 맥파디언)의 아들의 생명을 앗아갔는데 방관하고 직접적으로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의 희생을 <용서> 라는 키워드로 구하라고 늘어 놓는 부분의
허점은 실로 클수 밖에 없다. 선택을 강요한기 위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영화 데스노트를 연상시킨다. 제프에게 선택권이 놓여졌다고 하지만 전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면 희생자들에게도 최소한의 선택권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직쏘의 행동에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버린 영화의 전개라고 할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만다가 직쏘가 될수 없다고 하면서 영화상 아만다와 직쏘의
반전적 게임의 결말을 이끌어 가기전까지 나오는 부분에 눈쌀을 찌프릴수 밖에
없었다. 아만다와 직쏘의 차이점은 없었다. 단지 강약의 차이뿐 결국 선택권을
주지만 거의 불가능한 결정으로 인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살인자에 불과하다.
둘 모두 똑같은 심판자적 역활을 했을뿐인데 무엇이 다르다고 외치는 것일까?
단지 연결고리와 시나리오를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요소로서 만들어진 것
뿐이라는 생각에 씁쓸한 생각이 번진다. 신선함은 보여줄순 없어도 맥락을
절묘하게 맞추면서도 결국에는 모순적인 결함을 보여준 쏘우3의 내용에는
솔직히 지적 스릴러라기 보다는 슬래셔 무비를 연상시키는 잔인한 장면의
추가가 영화의 느낌을 혼동스럽게 한다. 뇌에 관한 전문의사인 린(바하수멕)
이 직쏘를 살리기 위해 두개골을 여는 장면등이나 처음에 보여주는 쇠사슬에
걸린 희생자의 장면이나 갈빗대에 고정시킨 살인작동장치등으로 업그레이드
된 잔인함에 솔직히 지적스릴러라는 말은 뒤로 빠져야 할때가 왔음을 느꼈다.
결국 스릴러적인 요소는 뒤로 한채 이제 남는 것은 얼마나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의 시선을 끄느냐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느낌이
씁쓸하게 드는 것은 쏘우가 상업적인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변해가는 영화시리즈중 괜찮은 연결 맥락을 보였음에도 결국 그 과정에서
보여준 상업적인 뉘앙스의 본질적인 느낌의 변천은 영화에 대한 느낌을
좋게 볼수 없게 만들었다. 차라리 쏘우1, 2편에서 보여주었던 느낌이 더
탁월한 지적 스릴러로서의 느낌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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