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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08 오전 11: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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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스코트의 현란한 카메라 아래 대가리가 깨지도록 통박을 굴리고 눈치를 살피는 멋진 레드포드 아저씨를 보느라 두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극히 낭만적인 구식 스파이물입니다. 자 여러분, 혹시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아무거나 한번 떠올려 보세요. 정의감 넘치는 신출내기 주인공이 있고, 전설적인 고수였지만 지금은 X도 아닌 남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나는 너처럼 안산다며 한바탕 열을 내고... 그러다 주인공의 고군분투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본 남자는 정신을 차려서 예전의 고수로 돌아옵니다. 만화가게에서 자리를 잡고 한 두 시간 뒤져보면 이런 스토리를 가진 작품을 여러 편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오랜 역사를 갖춘 구식 이야기에 극히 낭만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는게 스파이 게임입니다. 어떤 특수부대라도 단 30분 만에 남의나라 교도소에 쳐들어가서 죄수를 구출해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국경은 공으로 만들었나요? 그건 지금은 물론이고 10년 전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그런 Mission Impossible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레드포드 아저씨의 통박과 그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 말고는 없습니다. 이건 양손에 총 한자루씩 들고가서 악당들 일개 부대를 격파하는 액션영화보다 어찌 보면 더 심합니다. 작전이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쉽게 끝난다는 점에서는 더.
물론 이런 유형의 만화가 스파이 게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로버트 레드포드, 그러니까 뮈어는 끝까지 뮈어라는 겁니다. 70여명의 민간인을 죽게 한 기독교 민병대의 폭탄 테러는 그의 경력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을 것이고, 브래드 피트 - 비숍과의 그런 작별도 씁쓸한 것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뮈어를 바꿔놓진 못합니다. 82년 그날 이후로도 뮈어는 비숍에게 말했던 것처럼 여전히 철저하게 자신을 챙길 줄 아는(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돈을) 프로페셔널 스파이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 정보원에게는 동정을 베풀지 않는다는 원칙도 들어가 있겠죠.
그래서 뮈어의 동료들(혹은 정보원들)은 뮈어가 사재를 털어가면서 비숍을 도우려고 하자 의아해하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봐도 좀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비숍을 살리려고 하는지에 대한 레드포드의 동기가 부족하니까요. 레드포드가 자주 하는 말처럼 우리 편을 왜 버리려고 하느냐? 그걸로는 좀 부족합니다. 그 단서는 우리는 원래 좋은 일을 하려던 것 아니었느냐는 레드포드의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나 뮈어는 원래 냉정한 스파이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었다는 내면의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바리 코트 깃을 펄럭거리면서 나는 말이야,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으스대는 레드포드 아저씨의 말이 들리는 듯 합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레드포드 아저씨의 선글라스는 거부하기 힘들고, 특히 치밀한 이중 삼중의 머리싸움은 정말 볼만합니다. 자기 패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남이 가진 패를 알아내는게 도박꾼의 필수적인 덕목인 것을 생각하면 뮈어는 정말 훌륭한 타짜입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들던데요. 후반부에는 좀 김이 빠지지만 토니 스코트의 박진감 넘치는 화면도 그렇구요. 악역은... 좀 모자랍니다. 뮈어의 계획을 방해하는 하커는 상부의 명령에 충실한 좀팽이 이상으로 봐주기 힘듭니다. 별다른 카리스마도 없구요.
미션 임파서블류의(영화가 아닌 TV 시리즈) 첩보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만족스러울 겁니다. 재미도 있고, 주인공들도 멋있고. 단 너무 큰 것을 기대하지는 마시고, 그냥 부담없이 즐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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