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낯선 돌쇠형 제임스 본드... ★★★
영화 보는 도중에 ‘아차!’했다. 누군가 <카지노 로얄>을 다시 보고 <퀀텀 오브 솔러스> 보라고 해서 그냥 흘려들었는데, 처음부터 조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퀀텀 오브 솔러스>의 이야기는 전편인 <카지노 로얄>이 끝나고 1시간 후라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특히 이 영화는 전편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조그만 배려심도 없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다음에는 굳이 <카지노 로얄>을 다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왜? 기본적으로 <퀀텀 오브 솔러스>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해 두 가지 - 첫째, 스케일을 키우고 스토리를 죽였다, 둘째,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연상된다고 얘기하는 건 너무 뻔해서 무안할 정도지만, 그렇다고 얘기 안 할 수도 없다. 그거 빼면 이 영화는 시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무한 액션을 달려 나간다. 엄청난 고가의 차들이 박살나고 위기를 벗어났다 싶으면 느닷없이 배신자가 튀어나와 한 바탕 액션의 향연이 펼쳐지는 등 숨 돌릴 틈 없이 관객을 몰아간다. 게다가 액션 장면은 너무 잘게 나눠져 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헷갈린다. ‘저게 007인가?’ 싶으면 반대쪽에 서 있기도 하고. 촬영 장소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건 영화를 구경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왜 그렇게까지 세계를 돌아다니며 액션을 펼쳐야 하는 것인지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그냥 눈요깃거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액션 장면들에서 <본 얼티메이텀>, 특히 몇몇 장면은 정확하게 탕헤르에서의 액션신(건너편 건물에서 반대편 건물의 베란다로 점프하는 장면 같은 경우)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액션 영화를 처음 연출하는 마크 포스터 감독이 영입한 액션 담당자가 바로 <본 얼티메이텀>의 액션을 디자인한 댄 브래들리라니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과거 <007 시리즈>의 열혈 팬도 아니고, 남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즐긴 터라, 오락 액션 영화가 재밌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도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가 돌쇠 스타일로 바뀐 건 좀 아쉽다. <007 시리즈>의 재미 중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제임스 본드의 여유와 느끼함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을 바꿔보려 해도 피어스 브로스넌이 탱크를 몰고 다니면서도 넥타이를 고쳐 매는(<007 언리미티드>에서 였나?) 그런 느낌이 바로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에 적합한 것 같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으면서 007의 액션은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런 액션을 보려고 굳이 007을 봐야 할까? 거기에 007을 특별하게 채색해 주었던 온갖 첨단무기도 사라져 버려 007만의 느낌은 많이 퇴색하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가 007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통의 맥을 잇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몇 몇 장면의 오마주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필즈 요원(젬마 아터튼)이 검은 석유를 뒤집어쓰고 죽은 장면일 것이다. (1964년 작인 <007 골드 핑거>에서 본드 걸 셜리 이튼은 온몸이 황금으로 칠해진 채 살해당한다)
대부분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조직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라면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죽은 애인 베스퍼(에바 그린)의 개인적 복수를 위해 움직인다는 점도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 짙은 장면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액션에 가려 잘 표현되지는 않는다. 고작 술을 마시며 불면증을 토로하는 정도?? 본드 걸의 섹시함이 거의 보이질 않는 것도 남성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 부분이다. 특히 <007 네버 다이>의 양자경 이후 확실히 본드 걸들은 섹시함보다는 터프함으로 승부를 거는 것 같다. 이것을 여권 신장에 맞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007만의 특징이 사라져 가는 징후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히트맨>에서의 올가 쿠릴렌코는 나름 섹시하더니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는 복수에 눈이 먼 여전사일 뿐이다. 오히려 내 눈길을 끈 건 필즈 요원을 맡은 젬마 아터튼이었다. 얼굴이나 상반신만 클로즈업해서 잡을 때는 특별한 미모도 아니고 인상적인 외모도 아닌데, 조금 멀리서 전신이 나오도록 잡으면 마치 마네킹을 세워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9등신? 10등신? 저렇게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무튼 <퀀텀 오브 솔러스>가 <카지노 노얄>에 비해 부실하다고 느꼈다면 그건 이 영화가 Trilogy - 삼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삼부작에서 두 번째 작품은 대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중간에 낀 애매함 때문인가? 그렇다면 마지막 영화가 나와서 삼부작이 갖춰지면 높은 완성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마무리된 삼부작으로 인해 내 생각이 바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돌쇠형 제임스 본드가 어색한 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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