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참 할 얘기가 많은 곳이다. 가족끼리는 뭐든 다 털어놓을 것만 같고, 아무 가감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서로 드러내는, 더 이상 숨길 게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가족이기에 더 숨겨야 할 게 많을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알지 못했던 속내가 가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드러날 때, 왜 나에겐 얘기하지 않았나 하는 서운함과 배신감이 다른 관계에서보다 유독 더 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핏줄로 이어지긴 했지만 가족도 결국에는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지라, 그 어떤 이야기도 다 들어줄 것 같으면서도 막상 맞닥뜨리면 마냥 그렇게만은 되지 않는 곳이 가족이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복잡한 곳이다.
그래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여전히 계속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녀간의 사랑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얘기가 가득한 곳이니까. 나의 경우만 해도 가족에 관한 영화(그것도 상영중인)를 근래 들어서 꽤 여러 편 봤으니 말이다. 국경을 넘나든 끝에 이번에 등장한 헐리웃의 가족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도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일단 시작부터 꺼내드는 소재가 꽤나 대담한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냉정하고 사회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우려는 접어도 좋다. 헐리웃의 상업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이 영화도 아직은 그 소재에 끝까지 힘을 주고 이끌어갈 자신은 없어보이지만, 그렇다고 안일한 오글오글 가족드라마에 안착한 것도 아니라 다행이다.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도 결국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성격'에 관한 것이다.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난데없이 변호사(알렉 볼드윈)를 찾아가 부모님을 고소하겠다며 고소장을 제출한다. 그 이유인 즉슨, 자신의 몸의 권리를 되찾고 싶다는 것. 안나(애비게일 브레슬린)는 사실 우연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에 의해 태어난 맞춤 아이다. 안나의 언니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가 어려서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자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케이트에게 맞는 골수, 백혈구, 줄기세포 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합한 유전자로만 만들어진 아기를 가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안나가 태어났고, 물론 안나는 가족의 일원으로 잘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언니의 건강 상태에 따라 어린 나이에 수차례 수술실을 들락날락하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백혈구, 골수, 줄기세포 등을 기증해야 했다. 이제 신장까지 기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나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케이트를 돌보기 위해 변호사 직장까지 포기했던 엄마는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서로 묵인하고만 있었던 가족의 상처들이 조금씩 그 흉터를 드러낸다. 케이트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의 모든 가능성이 빼앗겼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장남 제시(에반 엘링슨)는 적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었음에도 상대적으로 소외받는다. 결국, 안에서 꿈틀거렸던 혼란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 영화의 소재는 어떻게 보면 매우 자극적이다. 백혈병이라는 소재는 눈물을 끌어내기에 매우 자극적이고, 유전자 맞춤 아기나 자식이 부모를 고소한다는 소재는 윤리적으로 매우 자극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러한 소재에 걸맞게 감정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세게 나가는 길을 의외로 지양한다. 대신에 영화는 보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가족 드라마로의 길을 택한다. 어쩌면 전작들로 미뤄봤을 때 감독이 사회적 논쟁거리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보다는 개인적 내면을 섬세하고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이 <노트북>에서도 보여줬듯(<노트북>이 인상적이었던 젊은 시절의 절절한 사랑보다 노년기의 깊은 사랑으로 맺는 결말이었다), 영화는 안일한 눈물 유도용 멜로드라마로 나가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듯 보인다. 한편으론 가족의 무조건적인 화합이나 극적인 눈물만 유도하지 않고 최대한 가족들의 상처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려 했던 이 영화의 시도는 독립영화도 아니고 헐리웃 상업영화로서는 꽤 드문 시도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도발적 소재를 통해 사회적, 윤리적 문제보다는 가족이라는 집단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의외로 감정을 절제한 감독의 연출력 덕분인지 배우들의 연기 또한 세련되다. 카메론 디아즈는 사실 10대 자녀 셋을 둔 엄마 역을 연기할 날이 벌써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 고충을 꽤 잘 표현해냈다. 엄마로서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남들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는 자식을 향한 끝없는 애정, 자식의 병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설 준비를 하는 모습은 카메론 디아즈 특유의 능동적 캐릭터와 어우러져 잘 형상화되었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는 마냥 통통한 여자아이처럼 보였는데 갈수록 고와지는 애비게일 브레슬린은 딜레마적 위치에 놓인 안나의 모습을 너무 어른스럽지 않으면서도 의젓하게 잘 표현했다. 언니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에서 괴로워 하는 아이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가 또 있는데, 우리에겐 익숙치 않겠지만 바로 케이트 역의 소피아 바실리바다. 오랜 병세로 인해 심신이 지쳐가는 백혈병 환자의 모습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정서에 와 닿게 잘 묘사했다. 때론 삶을 향한 의욕에 힘이 솟다가도, 자신을 떠나지 않는 고통에 그만 주저앉고 마는 대조적 모습을 겉으로 폭발하는 연기 없이도 뭉클하게 와 닿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표현할 줄 아는 배우였다. 더불어 수임료만 보고 일하는 것 같지만 그것만은 아닌 변호사 캠벨 알렉산더 역의 알렉 볼드윈과 개인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판사 역의 조앤 쿠삭 등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짧지만 강하다.
이 영화가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작품의 화자를 한 사람으로 국한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꾸준히 화자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안나는 물론이고 케이트, 아빠 브라이언, 아들 제시 등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이 화자 역할을 맡으면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케이트가 화자일 때에는 아련했던 사랑의 기억이 펼쳐지고, 아빠가 화자일 때에는 안나가 태어나기도 전 케이트의 병세가 확인되는 순간이 펼쳐지는 식이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수직적으로 좁게 파고 들어가는 것 대신, 수평적으로 넓게 둘러볼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효과를 준다. 케이트의 병과 안나의 고소만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배경으로 가족들이 겪고 있는 각자의 상처가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우 도발적인 소재를 보고 처음엔 이 영화가 어떤 결과를 보여줄 것인가 기대가 되었지만, 의외로 결과는 우리가 기대하는 노선을 살짝 벗어난다.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는 결정을 살짝 옆으로 미뤄두는 느낌도 준다. 원작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결속력과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사이에서 겪는 갈등에 대해 집중했다면, 영화는 인간의 존엄성 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듯 하다. 대신 이 사건을 통해 균열을 드러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성격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얘기한다. 너무 헐리웃 영화다운 안전한 선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용감하되 자신은 없는 분야에 괜히 손대는 것보다는 자신있는 분야에서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독립영화나 다른 나라의 영화들처럼 대담하게 접근하진 않지만,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묻고자 하는 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이 영화가 성인용이 아닌 가족용에 가깝기 때문에 그 논제에 대해 극단적인 예를 제시하진 않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고민을 통해 이 질문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나는 '앞으로의 내 삶도 있는데 그건 생각해 주지 않느냐'고 물으면 엄마는 '케이트는 네 언니인데, 네 언니를 살리는 건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케이트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걸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가족들이 실망할까봐 차마 자신을 놓아달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제시는 다른 가정같았으면 1차적 문제가 됐을 난독증이라는 고민은 안고 있음에도 케이트의 병세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겉돌기를 반복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강요하고 또 감수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마련이다. 여느 헐리웃 가족영화들은 '그래도 세상에서 가족이 제일 중요하니까 어떤 것이라도 희생해야지'라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이 영화는 꽤 기특하게도 거기에 물음표를 던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얻는 상처에 카메라를 비추는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안나의 고소가 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맞춤 아기는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와 같은 사회적 질문은 별 필요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위와 같은 소재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빛과 그림자를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영화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과 평온했던 과거의 모습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케이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가족들은 더 많은 걸 감내해야 하고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그만큼의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다행인데, 불행히도 그렇지도 못하고 상처만 깊어간다. 영화는 어떤 것도 강요받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던, 그래서 눈물날 만큼 행복하던 지난 순간을 펼쳐놓는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때론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억지로 밀어내려 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족이 만들어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 수 있음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천국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는 극중 삽입곡의 가사처럼 말이다.
영원히 변치 않고 연결되어져 있을 것만 같은 가족 안에서도 헤어짐의 순간이 존재하고, 새로이 받아들여야 할 순간도 존재한다. 이별의 순간을 가능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미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때로 현실은 그렇게 하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한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뭔가 필사적이어야 할 것 같은 소재를 가지고 의외로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논리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는 충분히 될 수 있지만, 서로를 옭아매는 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때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이별과 변화의 순간이 언젠가는 내가 과거에 지켜줬던 만큼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으로 돌아올 것이라 이야기한다. 결국 가족이란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가 아니라 어느 한 쪽에 문이 달려 있는, 받아들임과 내보냄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공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작의 공력이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헐리웃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이렇게 가족에 대한 나름 심도 있는 시선을 견지했다는 것 만으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꽤 기억할 만한 가족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