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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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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9 오후 1:2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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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 (1)
인류역사상 최대 격추기록 보유자
절대 깨지지 않을 불후의 기록... 공중전 상황인식의 천재 23살의 영웅 에리피 알프레드 하르트만 에리히 알프레드 하르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공군이 낳은 최고의 에이스로, 그의 352기라는 초인적인 격추기록은 항공전 사상 최고의 것이며, 앞으로도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린아이같은 그의 외모와는 달리 그는 전투기 파일럿으로서 놀라운 집중력과 정확한 판단력을 자랑했고, 무엇보다도 정신력이 강한 파일럿이었다.
그는 1922년 4월19일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작은 마을 바이자하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대 중반, 중국에서 영사로 근무하던 숙부의 권유로 하르트만의 아버지가 중국의 '장사' 지방으로 이주하여 의사생활을 했던 관계로 하르트만의 가족들도 잠시 중국에서 살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서 터진 중국의 국공 내전 때문에 그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독일로 돌아와야 했다.
14세가 된 하르트만 소년은 독일의 다른 청소년들처럼 스포츠 비행클럽에서 글라이더 조종에 열을 올리게 된다. 당시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던 독일은 전시에 필요한 조종사를 단기간에 양성해 낼 목적으로 이런 스포츠 클럽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르트만은 훗날 그의 어린 시절에 글라이더로 익힌 비행 감각이 실전에서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구해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르트만의 아버지는 그도 장차 의사가 되어주길 원했지만, 당시 연전연승하던 독일 공군에 매료된 하르트만 소년은 1940년 3월 15일 동프로이센주 노이쿠른의 공군 제 10훈련 비행단에 입대하고 만다.
이곳에서 하르트만은 장차 수퍼 에이스로 성장할 자질을 과시하게 된다. 지상훈련과 무려 17종의 비행기를 타야 하는 훈련비행등 2년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1942년 3월 31일자로 소위로 임관한 하르트만은 1942년 6월 30일의 비행사격 훈련에서 장차 수퍼 에이스가 될 자질을 과시하게 된다. Bf 109에 탑승하여 표적에 50발을 발사, 그 중 24발을 명중시키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훈련과정을 모두 마친 하르트만은 동부전선으로 배속된다. 그가 속한 부대는 동부전선 최고의 엘리트 부대인 제52전투항공단(JG52)의 제7중대였다. 당시 하르트만은 JG52의 최연소 파일럿이었고, 동료들은 동안의 하르트만에게 "부비"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르트만과 로테를 이루게 된 '에드문트 로즈만' 상사는 훗날 총 격추기수 93기를 기록한 수퍼에이스였다. 또한 로즈만은 부하들에 대한 지도력에서도 정평이 있는 사람이어서, 하르트만이 이러한 상관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적기를 격추시키고 싶은 마음이 불타오르던 신참시절, 하르트만은 로즈만 상사덕에 참으로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부대로 배속되고 나서 세번째의 출격에서 소련의 Yak-9 전투기 2기를 만나게 된다. 하르트만은 자신이 반드시 1기를 격추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적기를 향해 돌입했다. 그러나 편대전술을 무시하고 앞서 나간 하르트만의 기체에서 발사된 기관총탄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당황한 하르트만은 자신과 동료들의 위치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이 때 로즈만은 위기에 처한 하르트만을 무선으로 유도, 하르트만은 사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 출격에서 갈팡질팡했던 하르트만은 귀환중 연료마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동체착륙을 감행, 기체도 대파되고 만다. 참담한 결과였다. 이 실수로 하르트만은 비행대장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고, 로즈만은 하르트만에게 로테전법의 기초를 다시 가르쳤다. 결국 이 실수로 하르트만은 3일간의 비행정지 조치라는 징계를 당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너무나도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1942년 9월 5일,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날 출격에서 하르트만의 슈밤은 소련의 LaGG-3과 Il-2'슈토르모빅' 전투기 28기의 대편대와 전투를 벌였다. 하르트만은 가장 왼쪽의 슈토르모빅을 향해 급강하, 20mm 기관포를 발사했다. 이 사격은 멋지게 명중했지만, 중장갑의 슈토르모빅은 격추되지 않고 반격을 가해 왔다. 하르트만은 그 기체에 다시 공격을 가했고, 소련기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르트만이 다시 추격해갔으나 갑자기 슈토르모빅은 공중폭발, 하르트만의 기체도 큰 손상을 입고 만다.
하르트만은 대파된 기체를 몰고 기지까지 무사히 귀환, 동체 착륙함으로써 동료들이 그의 탁월한 조종술에 놀라긴 했지만, 이번에도 애기를 잃은 하르트만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을 계기를 갖게 된다.
어느정도 공중전에 눈을 뜬 하르트만은 1943년 4월 말까지 11기의 소련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하르트만이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 적기에게 보다 적극적이고 기술적으로 달려들 수 있게 된 것은 대략 이때부터였다. 이때부터 그의 스코어는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7일에는 단 하룻동안 11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9월 말에는 90기, 10월 말에는 150기를 돌파하는 고밀도 격추행진을 벌였다. 이제 하르트만의 이름은 동부전선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1944년 8월 20일에는 하르트만의 냉정한 일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드니에프르 방면에서의 소련군 공세를 막기 위해 출격하여 벌어진 이날 공중전에서 하르트만은 2기의 Il-2 슈토르모빅을 격추시켰다. 언제나처럼 하르트만은 적기에 바짝 따라붙어 총탄을 퍼부었는데, 갑자기 그의 기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하르트만은 공중에서 기체가 폭발하는것을 막기 위해 연료코크와 점화 스위치를 모두 잠그고 우군 점령지역으로 향했다. 소련군 지대를 벗어났다고 생각되자 하르트만은 동체착륙을 감행, 기체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독일제 트럭이 다가왔다. 하르트만은 당연히 아군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럭에서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소련군이었다. 하르트만은 순간적으로 부상을 당한 척 했고, 소련군은 하르트만을 끌어내어 야전병원으로 데려갔다. 여기서도 하르트만은 정신분열증세를 가장, 의사를 멋지게 속였다. 이 장면에서는 하르트만이 의사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원에서 약 2시간 동안 '연기'를 마친 하르트만은 이번에는 다시 트럭에 태워져 동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하르트만은, 하늘에서 들리는 Ju87의 폭음때문에 소련병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순식간에 옆의 감시병을 때려눕히고 도망쳤다. 그리고는 거의 이틀동안 소련군의 눈을 피해가며 하르트만은 귀환했던 것이다. 소련군에 대해 하르트만은 악마 바로 그것이었다. 소련군은 그에게 '우크라이나의 검은 악마'라는 별명을 붙였고, 그는 항상 적군의 경계대상 제1호였다.
항상 명랑하며, 어린아이같이 앳띤 얼굴로 인해 동료들이 붙여준 '부비' 하르트만이라는 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가공할 전과의 비결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항상 적기에게 가장 가끼이 접근해서 사격하는 데에 충실했다. 이것은 1차 대전의 영웅 리히트호펜의 공중전 전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태양을 등지고 적기의 후미를 친다는 공중전의 상식에도 아주 충실했다.
'확실한 사격기회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서 고도차를 이용, 단숨에 적기가 시야에 꽉 찰 때까지 접근한다. 이 때 도망칠 수 있는 적기는 없다. 이 상태에서 적기에게 총탄의 비를 퍼붓는 것이다. 적기의 회피동작은 전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런 근거리에서는 탄환의 파괴력도 가장 크다. 그리고 탄환도 절약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말은 어쩌면 전투기 비행사라면 모두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상식과 그대로 실행하는 두둑한 뱃심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1944년 3월 2일, 하르트만의 격추기록은 202기를 기록, 200기를 돌파했다. 6월 24일에는 266기를 기록하여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했으며, 8월 24일에는 하루에 10기를 격추시켜 전인미답의 301기까지 스코어를 올리게 된다. 이 공로로 하르트만은 대망의 다이아몬드검 백엽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게 된다.
1945년 3월에는 약 4주간 Me-262 제트전투기를 타기도 했지만, 곧 다시 JG52 제1비행대장이 되어 동부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리고나서는 10:1의 열세속에서도 다시 격추행진을 재개, 4월17일에는 350기를 돌파했으며,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에 Yak-11을 1기 격추시킴으로써 총 352기로 그의 격추행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총 출격횟수는 1400회, 공중전 횟수는 약 800회였다.이러한 초에이스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그의 인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많다.
당시 독일군 최고 훈장인 '다이아몬드검 백엽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기 위해 베를린의 총통 대본영에 출두했을 때 총통 경호실의 친위대원이 그에게 권총을 풀어 보관시킬 것을 명했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경호원에게 말했다. "만일 각하가 나를 전혀 신뢰하지 않으신다면 다이아몬드검 기사철십자장은 그 분의 모자에나 꽂아야 할 것이요." 훈장수여식이 끝나고 히틀러와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잠시 권총을 풀기도 했지만, 식사가 끝나고 히틀러와 동행할 때에는 다시 허리에 권총을 찼다. 아마도 자신의 영웅적 전공에 합당한 신뢰를 총통에게 요구한 무언의 시위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정쟁이 끝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할 때에 그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고, 다른 포로들에 대해서도 모범이 되는 것이었다.베를린이 소련군에 함락되던 1945년 4월 352기의 적기를 때려 부순 우크라이나의 검은 악마는 당시 JG52의 사령관이던 헤르만 그라프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서 미군 제90보병사단에 투항한다. 그러나 미군은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대하다가, 소련군과의 밀약에 의해 하르트만을 비롯한 JG52전체를 소련군에게 인도하게 된다.
소련군이 이 악마를 얼마나 증오했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그는 유년기에 중국에서 독일로 돌아오면서 지나갔던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뒷날 그가 '지옥같은 나날' 이었다고 술회한 이 유배기간 내내 그에게는 '소련 양민을 폭살한 죄'를 인정하라는 갖은 협박과 회유가 가해졌지만 그는 끝내 서명을 거부한다. 덕분에 10년 반으로 늘어난 형기를 마치고 1955년 10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종전 때 23세의 청년이 34세가 되어 있었지만, 이 철인의 하늘을 향한 비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거의 숙적이었던 미군에 의해 재건된 서독 공군에 하르트만은 다시 지원했고, 1970년 10월에 대령으로 퇴역하게 된다. 최근에 들려온 미확인 보도에 따르면 하르트만은 조용한 노후를 보내다가 199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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