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와 같은 대개의 시리즈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이 전개 된다. 하지만 <스타 워즈. Star Wars> 시리즈가 4-5-6부 이후 7부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역행한 시리즈 1-2-3부를 내놓았던 것처럼 <007> 시리즈의 흐름은 06년의 21부작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을 필두로 20부 이후의 시간대를 계승하지 않는다. MI6 요원 승인을 처음 받는, 007 제임스 본드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작과 비교할 때 이번 신작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액션 시퀀스는 보다 강화되었지만 - 참고로 이번 신작의 액션은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 - 애석하게도 드라마적 요소는 약화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본 글에서는 신작 시퀀스의 인용보다도 전작 시퀀스의 인용이 많아졌음을, 또한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신작 인용을 줄였음을 독자 분들이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이전 007 시리즈들은 전작의 흐름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해당 에피소드 안에서 본드의 활약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하나 이번 신작은 전작의 흐름을 바로 이어받기에 전작을 감상하지 못했거나 사전적 이해가 없다면 맨 처음에 납치된 미스터 화이트(제스퍼 크리스텐슨)가 누구인지, 그리고 본드가 무슨 이유로 과거에 얽매이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하기 쉽다: 화이트는 전작에서 테러자금을 불려주는 피눈물 흘리던 수학천재 르쉬프(매드 미켈슨)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고, 영국 MI6로 이체되어야 할 본드의 판돈을 조직 퀀텀으로 이체시킨 가방을 들고 베니스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퀀텀을 위해 일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신작에서 본드가 전작의 이탈리아 MI6 요원 매티스와 비행기로 볼리비아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비행기 안에서 본드는 하루에 2시간 밖에 잠을 청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가 불면의 나날을 지내게 만드는 원인이 바로 연인 베스퍼의 죽음 때문이라는 건 전작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쉽게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전작의 흐름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본드가 겪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먼저 본드의 연인이었던 베스퍼의 죽음에 대해 환기해 보자. 전작 <카지노 로얄>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 나온다. 영화 후반부 베스퍼가 본드와 베니스에서 배로 유람 중 선글라스를 낀 퀀텀 소속 사람을 보고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언뜻 끼는 장면이다. 눈치 빠른 관객이었다면 베스퍼의 앞길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암시하던 불운이 현실화되어 베스퍼는 익사하고, 본드는 상관 M과 요트 위에서 통화하던 중 상스러운 대사 하나를 중간에 내뱉는다. 06년 개봉 당시 한국어 자막은 의역되었기에 원문 대사로 싣겠다: “..The Bitch`s Dead.." 이 말은 갓 죽은 애인에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본드 자신을 이용했다는 증오심이 연인을 떠나보냈음에 대한 슬픔보다 앞섰기에 이런 격앙된 표현을 쓴 것이다. 하나 베스퍼를 향한 증오의 감정은 M의 설명, 그러니까 베스퍼는 본드를 살리기 위해 퀀텀과 타협한 것이었노라는 설명을 들은 후 누그러지고 베스퍼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베스퍼에 대한 마음 속 증오가 차지했던 자리엔 잃어버린 애인에 대한 연민과 퀀텀이라는 의문의 조직에 대한 불같은 복수가 대신 차지함으로 본드의 트라우마가 싹트기 시작한다.
이후 본드는 옛 애인을 죽음으로 이끈 조직 퀀텀의 뒤를 추적해가면서 목적을 이루는 방법론이 점점 과격해진다. ‘복스는 나의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명제를 이어받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애인의 죽음 이전부터 그가 용의자를 대하는 모습은 가혹했었다. 전작에서 르쉬프의 수족 알렉스 디미트리오스와 미 공항 테러미수 용의자를 체포나 연행 이전에 숨통을 끊는 것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 신작에선 과격함의 행보가 파격에 가까워져서 퀀텀에 몸담고 있는 용의자를 황천길로 보내는 횟수가 빈번해질 뿐만 아니라-무고한 볼리비아 경찰 2명을 순식간에 저세상 사람으로 만듦으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오죽하면 본드의 신변을 최대한 옹호해주던 M이 이런 쓴 소리까지 할까.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적과 동지를 구분 못하면 은퇴할 때란 뜻이지.”
그간의 시리즈 20부작에서 나타난 세련되고 유려한, 버터 내음 폴폴 풍기던 이미지의 본드는 바로 전작 21부부터는 온데간데없다. 본드의 시발점을 알리는 21부부터 신작 22부까지 최근 두 편에서 묘사된 본드는, 시간적 흐름으로 본드의 초반부는 MI6나 M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통제 불능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거머쥔 살인기계다. 이런 무자비한 살인기계가 되기까지의 내적 동기는 바로 죽은 애인의 복수라는, 내면의 상처가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괴롭힌다. 그와 더불어 앞에서 잠시 살펴본, 본드의 잠 못 이루는 밤들의 계기가 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신작에서 본드는 애인의 죽음이라는 비극과는 별개로 필즈 요원(젬마 아터튼)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새로운 본드걸 카밀(올가 쿠릴렌코)과 키스도 나눈다. 문제는, 이런 일시적이자 일회적 애정행각으로는 궁극적으로 본드의 심적 아픔을 매만져 줄 수 있는 치유기제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본드와는 별개로 이번 신작에선 상처 입은 영혼이 또 한 명 있다. 복수의 상대는 다르지만 카밀 또한 메드라노(호아킨 코시오) 장군에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영화 속 화려한 액션의 향연과는 별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시의적절한 조언을 한다. 이 두 사람의 마음 속 상처에 대한 가장 적확(的確)한 지적은 영화 후반부 대사 가운데 나타난다. 먼저 본드가 개인적 복수를 위해 심기일전하는 카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일면식 없는 자를 죽이는 것보다 개인적 복수가 어렵다”고. 복수 이전에, 아주 잠깐이나마 흔들리기 쉬운 카밀에게 냉철한 조언을 제시한다.
주거니 받거니,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한 후 영화의 종영 즈음 카밀은 본드에게 또한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당신의 상처는 당신 자신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카밀은 메드라노라는 구체적 복수의 대상이 있었다. 하지만 본드의 경우는 카밀의 경우와는 좀 다른 케이스다. 첨언하면, 복수의 대상은 알지만 구체적인 수원수구(誰怨誰咎)의 실체가 애매모호한 (개인이 아닌 퀀텀이라는 조직이기에) 본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급 위로의 말이다. 쿨가이 본드답지 않게 과거(애인 베스퍼의 죽음)에 얽매여 있었음을 카밀이 간파한 것이다.
기존의 미려하고 세련되게 디자인된 007 포스터와는 다르게 본드와 카밀 두 사람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사막에 서 있는 이번 포스터는 볼리비아 국민이 지도자의 눈먼 이익에 의해 퀀텀에게 잠식당하기 일보직전이라는 위기감을 시각적으로 반영함과 동시에 각기 상대는 틀리지만 복수라는 심적 동인으로 결속된 본드와 본드걸 카밀 두 사람의 내면을 투영하기도 한다.
낮에는 물불 안 가리는 열혈남이자 적에게 있어서는 저승사자와 동급인 두려운 존재 제임스 본드. 하지만 죽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불면에 시달리는 순정남 본드의 가슴 시린 응어리는 과연 언제쯤 풀어질 수 있을는지. 필자가 보기에는 다소 요원해 보인다. 왜냐하면 시간상으로 21-22부는 본드의 초반부 행적이고 예전 본드들(숀 코넬리, 로저 무어 등)이 활약했던 작품들은 그들의 중반부 이후의 활약상을 그렸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 추론으로 보노라면 본드는 초반부의 행적 중 비극적인 사건인 베스퍼의 죽음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트라우마를 간직할 충격적 사건을 중간에 또 한 번 겪는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에 제작된 007 시리즈에서 나타난다.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