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날 사랑하기는 한 거야?”라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 ‘현민’(엄태구)을 붙잡고 우는 젊은 여성이 있다. 흰 원피스에 긴 머리를 풀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한밤중 버스정거장에 앉아 연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지영’, 배우 김설현이다. 강풀 작가가 각본을 쓰고 배우 김희원의 연출 데뷔작인 디즈니+ 시리즈 <조명가게>를 통해, 아이돌 출신 ‘스타’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배우’로서 대중에게 각인한 모양새다. 처음 도전하는 공포 장르에서 김희원 감독의 ‘연기는 가치관’이라는 철학이 깃든 섬세한 디렉팅 덕분에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것 같다는 김설현을 만났다. ‘설현 언제 나와? 나오는 것 맞아?’ 라는 시청자의 댓글을 보고 기분 좋았다며 활짝 웃는다.
어떻게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됐는지. 김희원 감독은 시골 처녀 같은 느낌이 들어 캐스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감독님께서 그간의 내 대중적인 이미지가 ‘스타’ 같았다면 이번 <조명가게>를 통해서 배우로 각인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누구보다 내가 잘하기를 또 잘되기를 바라고 응원하신 걸 알기 때문에 그 마음에 너무 감사하다. 이 작품 전에 감독님과 우연히 만남의 기회가 있었다. 원래 초면에 말을 잘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날은 유독 연기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런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며칠 후에 대본을 보내 주셨다. 호러로 시작해서 휴먼으로 풀어나간 시나리오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캐릭터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 점이 좋았다. 원작 웹툰도 워낙 재미있게 봤던 터라 ‘지영’ 역할을 내가 잘 살리기만 한다면 흥미로운 캐릭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영’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해 나갔는지.
지영이 <조명가게>의 문을 여는 만큼, 그 비주얼과 정서가 시리즈의 분위기를 좌우할 거로 생각했고 이에 따른 부담감이 있었다. 지영이라는 캐릭터가 여러 층위를 지닌 인물이라, 5화에 가서야 그 정체가 밝혀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거의 1인 2역을 하는 것처럼 접근했었다. 전반부는 비주얼이나 분위기 조성에 힘을 실었다면 후반부로 가면서는 감정에 포커싱해 나갔었다.
목소리 톤은 어떻게 잡아나갔나.
말씀했듯이 지영이 드라마를 여는 입장이라, 지영의 톤이 곧 드라마의 톤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이 더욱더 컸던 부분이다. 감독님과 직접 대본을 읽어보면서 결정해 나갔다. 좀 더 낮게 혹은 높게, 좀 더 느리게 혹은 빠르게 등. 청각 장애를 지녔던 지영이 사후세계에서는 다시 귀가 들리고 말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 이 부분 역시 어려웠었다. 달리 참고할 예시가 없어서 철저하게 상상력만으로 구현해야 했다. 최대한 대본을 길잡이 삼아 지영의 심리에 집중했었다.
영화 <안시성>(2018) 이후 ‘현민’ 역의 엄태구 배우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선배님이 현민을 연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아예 친분이 없는 상태로 연인 관계를 연기하는 것보다 이미 <안시성>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으니 좀 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또 선배님이 얼마나 연기에 진심이고 나이스한 좋은 분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현장에서 얼마나 즐거울지 기대감이 커졌었다. 다행히 선배님도 나와 같이 호흡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엄태구 배우가 낯가리고 부끄럼쟁이로 유명한데… 현장에서는 어떠신가.(웃음)
촬영 전에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주변 분위기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연기에 임하는 분이 있는데 나나 태구 선배님이나 전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억지로 분위기를 풀고자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었던 것 같다. 대화가 꼭 많아야 편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누군가는 우리가 불편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웃음)
이번 ‘지영’ 연기에 칭찬이 많다. 아이돌 티를 벗었다는 시선이다.
‘보이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 좀 더 연구했던 것 같다. 얼마나 진심으로 연기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여질지,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나를 좀 더 살피게 되었다. 감독님이 배우이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일지와 연기 디자인을 많이 고민해 주셨다. 덕분에 더 많은 부분을 표현한 것도 같다. 동시에 그간 해보지 않은 캐릭터라 달리 보이는 효과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모르던 내 얼굴을 발견한 것 같고 또 연기 평가가 이렇게 호평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다.
김희원 감독의 디렉팅이나 조언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다면.
‘연기는 가치관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같은 사물을 봐도 다르게 느끼듯이 연기 또한 그렇다는 말씀이셨다. 또 어떤 씬은 3초 있다가 걷고, 고개를 15도 돌리고 등과 같이 시각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디렉팅을 구체적으로 주셨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배역을 본인이 다 해보면서 함께 고민해 주셨다. 현장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개선하려고 힘쓰셨고, 프리프로덕션을 워낙 꼼꼼하게 준비하고 배려한 덕분에 한 횟차도 늘지 않고 계획대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오히려 차수가 줄었다고 들었다.
지영은 흰 원피스를 입은 채 한밤중 버스 정거장, 골목길 등 어두운 공간에 있는 장면이 많다. 비도 많이 맞고… 촬영하면서 고생했겠다 싶었다.
현장에 있을 때는 동료 배우들과 스탭들, 감독님 덕분에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지영으로 연기에 임할 때는 몰입이 되면서 어둡고 외롭고 공허하고 쓸쓸하고 답답한 마음이 컸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많이 추웠던 기억이 난다. 영하 10도 정도의 날씨에 하얀 원피스에 실크 스카프 한 장 두르고 비를 계속 맞아야 하는 씬이 많아서. (웃음) 비를 뿌리자마자 다 얼어 빙판길이 되어 그다음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얼음을 계속 제거해야 했었다.
지영의 비주얼적인 면에서 신경 쓴 부분은.
의상이나 헤어에 있어서 웹툰의 인물과 비슷하게 보이게끔 최대한 노력했다. 여타 공포 영화는 깜짝 놀라는 데서 오는 공포가 큰데, 나는 그보다는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시청자가 ‘저 여자 이상하다’, ‘저 여자한테 걸리면 안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끔 표현하려고 했었다.
제일 어려웠던 장면을 꼽는다면.
버스에서 현민에게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냐, 나를 사랑하기는 했느냐, 빨리 정신 차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씬이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것과 별개로 버스에서 찍다 보니까 흔들려서… (웃음) 대사도 여러 번 바뀌었고 지영이 주저앉는 타이밍 때문에 여러 테이크를 가면서 촬영했었다. 잘 풀리지 않았던 씬이다.
현민이는 왜 지영을 기억하지 못할까. 다른 인물들은 서로를 기억하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지영과 현민의 사랑이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지영도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현민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지막에 현민을 향한 원망의 감정도 있겠지만, 원망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는데 막상 그를 보내고 나니 허탈감과 허망함이 크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현민을 따라간 것 역시 그를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명가게>를 아직 보지 못한 시청자를 위해 관람팁을 준다면.
시청자가 보시기에 초반에는 굉장히 궁금한 부분이 많을 거다. 나도 주변에서 어떻게 되는 이야기냐고 질문 많이 받았었다. (웃음) 이때 등장인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후반부에 그들의 사연이 풀리면서 좀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024년을 돌아본다면.
올해 서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한 해가 너무 빨리 간 것 같다. 눈 깜짝 해보니 연말이 되어 있더라. 건강을 목표로 했는데 이 목표는 잘 지킨 것 같다. 또 <조명가게>라는 좋은 인연을 만났고 연기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한 해였지 싶다.
내년 계획은 어떤가. 또 소통을 원하는 팬들이 많은데 계획은 없는지.
다음 작품을 만나게 되면 또 그 작품을 잘 소화해 내고 싶은 바람이다. 팬분들과 작품으로만 만나니까, 좀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만날 기회가 적어서 죄송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팬 미팅은 기회만 된다면 정말 하고 싶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2025년 1월 7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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