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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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1인 2역은 물론 시각 장애 연기까지 완벽히 소화하며 관객을 사로잡았던 박정민이다. 라이브 온 스테이지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무대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가 하면, 화제를 모은 가수 화사의 뮤직비디오까지 출연하며, 그 누구보다 2025년을 가열차게 보낸 배우 박정민. 그가 이번 설날 명절, 영화 <휴민트>로 다시 관객을 찾는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인 <휴민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남북한 비밀 요원들이 격돌하는 클래식한 첩보 액션 영화. 박정민은 극 중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 ‘박건’ 역을 맡아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냈다. 그간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온 박정민이지만, 이번에는 밀도 높은 액션 이면에 깊은 멜로적 감수성을 담아내며 그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궤적을 남겼다. "내 안의 순애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박정민을 만났다.
아직 개봉 전이나 영화에 대한 평가도 좋고, 특히 당신의 연기에 호평이 많다.
영화라는 게 사실 뚜껑을 까봐야 (웃음) 아는 것이라, 고마운 평에 감사하면서도 떨리는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저 열심히 연기했을 뿐인데, 좋게 봐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노개런티로 출연한 연상호 감독의 <얼굴>이 작년 9월에 개봉,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하며 저예산 영화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 <휴민트> 같은 대작의 경우 부담감 면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배우로서 촬영에 임하는 자세는 정확하게 똑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다만, ‘잘됐다’의 기준이 관객 수라면 <얼굴> 같이 규모가 작은 영화인 경우 상대적으로 흥행에 대한 부담은 적은 편이다. 결과가 조금 아쉽더라도 우리끼리 좋은 시도였다고 위로하며 금방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휴민트> 같은 대작은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자본이 투입된 만큼 그 부담을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관객이 더 예쁘게 봐주셨으면 하고, 그 마음이 좀 더 간절해진다는 차이점은 있는 것 같다.
류승완 감독과는 영화 <밀수>(2023)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다. 이 영화의 어느 지점에 끌렸나. 또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이야기의 흐름이 굉장히 직진인 영화인데, 이런 서사를 류승완 감독님이 어떻게 만드실지 궁금했다. 그냥 평범하게 만드실 분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이 긴박한 이야기를 어떤 톤앤 매너로 가져갈지 기대가 되더라. 특히 ‘박건’ 이라는 역할을 제안하셔서 너무 놀랐다. ‘나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런 좋은 캐릭터를 주셨지?’ 싶더라. (웃음) 개인적으로 박건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전복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맡겨 주셔서 감사했다. 감독님은 <휴민트>를 하면서 기존의 자기 영화와 다른 색깔로 좀 더 클래식한 첩보 영화를 추구하셨다. 촬영, 조명 등에 많이 신경 쓰셨고 그만큼 잘 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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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부터 <밀수>의 '장만수' 일명 장도리와는 극과 극의 캐릭터인데, 류 감독은 이렇게 좋은 캐릭터를 왜 당신에게 맡겼을까. (웃음)
감독님이 캐스팅한 구체적인 이유는 말씀 안 하셨는데, 처음 제안은 <밀수> 무대인사 때였다. ‘액션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셔서 ‘좋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휴민트> 할 건데 생각 있냐’고 그래서 바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남자답고 액션도 많으니 준비해 둬야 한다고 하셔서 당시 체육관에 열심히 다니기도. (웃음) 본격적으로 메이드되고 나서는 ‘박건’은 멋있고, 목적이 분명하며, 야생의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런 인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는 다 어느 정도 자아도취 되게 마련이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내가 캐릭터와 붙어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게 된다. 촬영이 벌써 1년 전이라, 지금 보면 내가 캐릭터와 너무 동떨어져 보이면 어떡하나 무서웠는데 다행히 괜찮게 나온 것 같다.
류승완 감독이 ‘콜’하면 항상 오케인 걸까. (웃음)
음, 무조건 달려가는 건 아니고 (웃음) 안 한 것도 있고, 못 한 것도 있다! 그런데 좋아하는 감독님과 제작사(외유내강)라 마음이 열려 있는 건 사실이다. 지금보다 경험이 없을 때 나를 믿어준 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류 감독님과는 합이 잘 맞아서 뭘 해도 잘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고, 또 외유내강과 함께해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온 적도 없었다.
전사도 그렇고 대사의 양이나 정보도 그렇고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많지 않다. 박건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나. 고독해 보이는 인물인데 참고한 자료가 있다면.
원리원칙주의자에 국가에 충성하는 이념적인 인물이다. 이런 철두철미한 인물이 사랑을 잃은 후의 변화, 그리고 그 상대를 다시 만나면서 신념이 무너져 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게 익숙한 캐릭터라, 오히려 침묵하고 거리를 두는 식으로 접근했다. 박건의 고독은 신념이 흔들리면서 그 갈등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꽤 많은 영화를 보라고 권하셨다. USB에 담아 주기도 하고 DVD를 주시기도 했는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부터 프렌치 액션, 그리고 <첩혈쌍웅>이나 <영웅본색> 같은 옛 홍콩 영화까지 정말 다양했다. 특히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거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중 주윤발을 보면서 ‘내 얼굴로 연기하면 이상할 텐데’ 하며 혼란스럽기도! 여튼 꾸준히 참고해 보면서 취할 부분은 취하며 (캐릭터를) 완성해 갔다.
이번 같이 본격적이고 딥한 멜로는 처음인 것 같다. 보통 멜로나 로맨스로 출발해 연차가 차면서 장르물로 확장해 나가는 경우는 많아도 그 반대는 드문데, 평소 멜로에 갈증이 있었던 걸까.
내가 막 찾아다닐 정도의 갈증은 없었고, 멜로라서 <휴민트>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선물처럼 찾아오는 거라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 <휴민트>를 멜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구출하는 액션 영화로 생각했는데, 신세경 배우가 캐스팅되고 촬영하다 보니, 박건-채선화 간의 감정이 더 깊어진다고 느꼈다. 박건이 창가에서 예전에 선화가 불렀던 노래인 ‘이별’을 다시 듣는 장면에서 '이건 멜로겠구나' 싶더라.
이번 ‘박건’을 보며, 영화 <헤어질 결심>의 ‘홍산오’(박정민)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더라. 멜로 본능이 있는 것 같기도. (웃음)
개인적으로 연기할 때, 자기 안에 없는 모습이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캐릭터화하는 건 내 안에 있는 모습을 차분이 들여다보고 찾는 과정인 것 같다. 그렇게 박건의 순애보적인 면을 찾으려 노력했다. 총을 쏘고 거칠게 싸우는 등 거침없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표현은 서툰 그런 면을 내게서 찾으려 했다. 이게 처음부터 찾아지는 건 아니고, (웃음) 한 10회차 정도 촬영이 진행되니 자연스럽게 꺼내 지더라. 그 이후는 쭉 밀고 가는 거지.
박건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고,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바 있다.
박건이라면 목숨까지 걸 수 있겠지만, 박정민은 어려울 것 같다. (웃음) 박건처럼 사랑하는 이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은 처음이다. 다행히 내 눈엔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데, 관객도 예쁘게 봐주시면 좋겠다.
“예쁘게 봐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거듭하는데 (웃음) 무언가 멜로 연기에 대한 쑥스러움이 있는 건가.
그게 쑥스럽다기보다, 내가 하는 멜로는 보는 사람들이 알레르기를 느낄까 봐 그런 것 같다. (웃음) 이제는 ‘박정민의 멜로’를 보고 싶은 분이 생긴 것도 같지만, 그전에는 ‘내 멜로를 누가 궁금해할까’ 이런 생각이 있었거든. 평가가 괜찮고 또 앞으로 시켜주면 멜로에 가까워질 용기가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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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연기뿐만이 아니라, 외적으로 또 체력적으로 준비할 부분도 많았겠다.
주로 러닝 위주로 했다. 이미 감량은 했기 때문에 ‘여백을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부기 관리를 했었다. 촬영 전 러닝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붓는 정도가 크게 차이가 났거든. 촬영 들어가기에 앞서, 촬영 감독님과 조명 감독님이 나를 제작사 사무실로 따로 부르셨더라. 그 자리에서 얼굴을 360도로 다 찍어서, 조명과 각도에 따라 어떤 얼굴이 남자답고 예쁘게 잡히는지 연구하시는데 참 고생하셨다. 쿠팡플레이 시리즈 <뉴토피아>(2025) 때 함께한 조명 감독님인데, 멋있는 모습을 잡아 주기 위해 정말 노력하셨다. 액션의 겨우 위험한 장면은 대역이, 얼굴이 잡히거나 육탄전 같은 경우는 거의 직접 소화했다.
후반부 총격 액션이 길게 이어진다. ‘조 과장’ 역의 조인성, ‘황치성’ 역의 박해준과의 호흡은 어땠나.
개인적으로 액션 씬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다치는 게 싫고 또 상대가 아파하면 너무 미안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인성 형이랑 할 때는 이런 부분이 전혀 없었다. 상대도 안 아프고 나도 아프지 않은, 한마디로 깔끔한 액션 장인이셨다. 상대방을 너무 편하게 해주는 데다 배려심도 뛰어나서, 후배가 뭘 한다고 하면 다 받아주는 분이다. 해준 선배는, 처음 현장에서 ‘황치성’을 딱 꺼내 놓는데 우리 모두 큰일 났다 싶었다. (웃음) 감독님마저 놀라셨을 정도였다. 그 이상한 에너지를 따라가려면 대충하면 안 되겠더라. 황치성이 등장만 해도 현장이 휘몰아쳤었다.
기억에 남는 액션 씬을 꼽는다면.
박건이 처음 등장하는 다트 씬의 경우, 동작과 표정을 현장에서 만들어 간 부분이 컸다. 이때 박건이 날아오는 술병을 잡아서 다시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당연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할 줄 알았는데, 직접 해야 해서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두세 번 만에 기적적으로 해내서 다들 기뻐하며 즐겁게 찍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씬은 폐쇄 공항 지하에서 러시아 마피아 보스를 상대로 조 과장과 함께 2대 1로 싸우는 장면이었다. 영화 <하얼빈>을 찍은 장소라, 이미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멘탈이 나갔던 것 같다. 두 시간 정도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데, 근래 들어 스스로에 가장 실망한 순간이었다. 그날 너무 창피해서 촬영 끝난 후 인사도 하지 않고 혼자 숙소로 돌아가 쳐 박혔었다.
그런 경우 어떻게 다시 스스로를 세우는지.
혼자 다시 일어선다기보다 누군가 내가 무너진 걸 인지해 줘야 일어설 수 있는 것 같다. 안 그러면 계속 고꾸라진다. 이번에는 감독님이 내가 평소답지 않다는 걸 빨리 캐치해 머리끄댕이 잡고 일으켜 주신 느낌이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경우 재촬영을 먼저 요구하는 편인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좀 많이 요구하는 편은 맞는 것 같다. 다만 스탭들도 한 번 더 가는 걸 원하는지 아니면 힘들어하는지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는 게 우선이다. 작은 실수에 집착하기도 해서 항상 눈치를 살피며 (웃음) 괜찮을 것 같으면 부탁드린다.
상대역인 신세경과의 호흡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웃음)
신세경 배우는 감히 평가할 수 없지만, 마법 같은 힘이 있는 배우다. 군대 시절 내무반 청소하면서 선임들이 보던 <지붕뚫고 하이킥>(2009)에서 처음 보고, 매력적이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심지어 배우 지망생도 아니었고, 감독을 꿈꾸던 시기였다. 세경 씨는 카메라 밖에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를 바라보는데, 박건의 "왜 그렇게 가혹하게 사라졌어"라는 대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더라. 아름다우면서도 강단 있는 동료로 많이 의지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며 선화의 ‘이별’ 노래를 다시 들으니 너무 가슴 아픈 거다. 촬영하면서는, ‘노래를 왜 이렇게 잘해?’ 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말이다. 노래의 진가를 촬영할 때 알았다면 더 애절한 연기가 나왔을 것 같기도. (웃음)
사진제공. 샘컴퍼니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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