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로맨틱코미디' 라는 장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크림빵 위에 또 버터를 발라 먹는 부담스러운 느끼함 처럼, 많은 연인들이 달디 단 그들 관계 사이에 뭔가 더 달콤한 것을 집어 넣기 위해 찾는 인스턴트용 영화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연인 '섬머'에 대한 톰의 500일 동안의 이야기, [500일의 섬머]는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 불편한 영화이다. 시간은 늘 순서대로 흐르지만 추억은 누구에게나 늘 뒤죽박죽 이듯, 톰의 기억 속 그녀는 불친절하게 등장한다. 사장의 비서로 소개받은 섬머를 처음 본 순간, 그녀의 푸른 눈빛과 빛나는 얼굴이 한꺼번에 가슴에 다가오는 것을 느낀 톰은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금새 무너질 것이 뻔한 부실한 마음의 벽을 쌓는다.
하지만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들 처럼 톰과 섬머는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어렸을적 부모의 이혼으로 부정적인 결혼관을 확고히 갖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녀를 운명의 반쪽으로 생각하는 톰과 달리, 섬머는 그 선한 푸른 눈빛과 사랑스러운 몸짓 속에서도 끝없이 그들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설레면서 불안하고, 달콤하면서 쓰디 쓰다.
호흡이 짧은 CF 감독 출신들이 여지껏 첫 장편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마크웹 감독은 95분 짜리 긴 호흡 을 짧게 끊어 나누어 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였다. 정성을 다한 조각들일지라도 그것들이 모이면 어정쩡한 모양새를 가질 수도 있을 법한데, 어느새 모이고 채워져 가는 500일은 생각지 못한 근사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 간다.
건축가를 꿈꾸지만 글에 소질이 있다는 이유로 카피라이터 생활을 하고 있는 톰의 눈빛은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빛이 그러하듯 왠지 쓸쓸하다.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고 시작한 섬머와의 사랑 조차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던 섬머는 진정한 반쪽을 찾았다며 톰을 떠난다.
너무나 깊은 슬픔과 그리움에 아직도 몸을 추스리지 못한 톰에게 '나는 너의 반쪽이 아니야' 라며 너무나 다정하게 말하는 장면은 지금껏 보아온 수없이 많은 이별 장면중에 백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그리고 사랑은 함께 했으나 이별은 혼자서 짊어지게 된 톰을 바라보면 그 이별의 잔인함에 눈물이 새어나올 정도다.
두 눈과 마음을 홀딱 반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추억들이 (특히 톰이 운전하면서 '우린 지금 어딜가고 있는거지' 라고 묻는 장면이나 벤치에서 섬머의 팔에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등은 너무나 멋지다) 아직도 마음을 맴돌고 있기에 그 이별은 관객인 나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비록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피 문구처럼 섬머와 결혼하여 그녀로 하여금 '나를 집으로 가게 만드는 등대' 로 만들고 싶었던 꿈은 산산조각 났지만 톰에게 작은 희망을 안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첫키스만 50번째'를 보고 모두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때 유독 혼자 눈물을 훔쳤던 필자에게 '500일의 섬머'는 두번째로 눈물을 흘린 로맨틱 코메디 장르 영화이다. 두 영화의 두가지 공통점은 배경음악이 정말이지 환상적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사랑 속에는 먀냥 웃을수만은 없는 아픔이 배어 있어서 즐겁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잔인해서, 보고 나오면서 마음이 조금은 쓸쓸해지는 로맨틱 코메디 영화이지만 음악영화 못지 않게 섬세한 곡 선정과 LA의 클래식한 장소들을 함께 돌아다니다 보면 봄 바람이 얼굴을 스치듯 그렇게 그립고 아쉬운 마음이 알알이 들어와, 추위에 주눅든 마음들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줄 것이라 믿는다.
사랑은 언제나 쉽게 다가오고 뜨겁게 타오르지만 그 사람이 하늘이 정해준 반쪽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까운 주변의 사람과 사랑하면서 운명이라고 편하게 믿고 살 것인가,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운명적인 사랑을 우연히 만날때 까지 기다리다 목이 빠질 것인가.
정답은 없다.
Filmania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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