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어머니, 그러나 당신 역시 사랑받기를 원하는 한 명의 여자였다!
뉴 저먼 시네마 최고 여성감독, 헬마 잔더스-브람스 감독의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나치독일 흥망의 틈새에서 처절하게 한 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여느 여자들처럼 연애, 결혼, 아이라는 평범한 꿈을 가졌던 리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남편이 떠난 후, 리네는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전쟁보다 참혹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방랑하는 그녀는 딸이 보는 앞에서 취한 미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어 빵 한 조각으로 며칠을 버티는가 하면, 품에 꼭꼭 숨겨놓은 은수저를 암시장에 내다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을 견뎌낸다. 전쟁만 끝나면 남편이 돌아오고 일상의 행복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으로 힘겨울 수록 딸과 함께 노래부르고 춤추는 리네...
정작 전쟁이 끝나고 남편이 돌아오면서 모녀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돌아온 남편은 나치보다 더한 폭군이 되어 그녀와 딸을 괴롭히고 달라진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리네를 남편은 부정한 여자로 몰아붙인다. 전후 그녀의 삶은 사랑도 희망도 없는 가정에서 비극적 절망으로 치닫고 전쟁 중에는 한번도 울지 않았던 리네는 이제 비참하게 울부짖는다. “내가 원한 것은 사랑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파괴했어요.” 온갖 역경을 겪어낸 강한 어머니였지만 그녀 역시 사랑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여자였던 리네.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삶을 이겨낸 위대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가슴 아픈 인생, 그 삶의 비극을 제대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어머니’ ‘여자’라는 이름으로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공감대 장기상영은 물론 영화보기운동까지 별였던 세계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한 어머니 리네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특정 시대 특별한 한 개인의 이야기로 느껴지기 보다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한 호소력도 만만치 않은 작품. 리네는 화려한 연애나 모험의 주인공도 아니고 정치적인 소신으로 권력에 저항한 것도 아니며, 전쟁 뒤에 남겨진 평범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던 그녀의 소박한 바램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 달라져버린 남편은 전쟁만 끝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거라고 믿어온 그녀의 기대를 짓밟는다.
가슴 저미는 아픔이 전해지는 영화 <독일 창백한 어머니>를 먼 나라의 옛이야기로 여기지 않는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은 이미 이 영화가 공개된 전 세계에서 확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년 반에 걸친 장기상영이 이루어졌으며 일본 개봉당시에는 <독일 창백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관람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고!
리네의 삶을 통해 우리는 6.25라는 근대사의 비극을 경험한 우리 어머니들의 상처를 상기하는 한편, 강하고 위대한 어머니라는 수사 속에 가려졌던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를 주목하게 된다. 사랑 없는 가정 속에서 비참하게 절규하는 리네의 비극은 전쟁 없는 땅에 사는 지금의 우리들도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삶의 고통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미 이 영화를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for my mother, for thousands of women)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기록영화 필름과 당시 라디오 사운드의 사용 ‘낯설게 하기’로 비극성을 환기시키는 효과
감독 헬마 잔더스-브람스는 <독일 창백한 어머니>가 개인적인 체험을 다룬 영화이지만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로 흐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처럼 다양한 영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리네의 비극적인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관객들도 이를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폭탄이 투하되는 도시의 전경을 찍은 필름과 폐허가 된 베를린을 긴 트랙킹 숏으로 찍은 기록영화 등은 영화가 진행되는 틈틈이 자연스럽게 삽입된다. 리네가 온 몸으로 출산의 고통을 겪는 장면은 세상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무너져내리는 모습과 교차 편집되고, 그녀가 길을 물었을 때 기록영화 속의 꼬마가 답을 해주는 식이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운드 쪽에서도 같은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히틀러의 죽음, 종전을 알리는 뉴스는 실제 당시 라디오 뉴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브레히트의 시, 그림형제의 동화 등을 활용 다양한 상징과 알레고리로 풍부해지는 해석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시 낭송으로 시작된다. 이 시는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 ‘독일’로 그의 딸 한나 히옵이 직접 낭송했다. 독일을 어머니로 의인화하면서 전쟁의 광기에 휘말린 조국의 비극을 말하는 브레히트의 시처럼 감독은 어머니와 그녀의 수난을 통해 전후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인상적인 영화의 제목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바로 이 시에서 가져온 것이며 리네가 딸에게 들려주는 그림형제의 동화 ‘도둑신랑’과 함께 이 영화의 전체적인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착한 신랑이 알고 봤더니 인육을 먹는 도둑의 일당이었다는 동화 ‘도둑신랑’은 종전 후 리네가 깨닫게 되는 비극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알레고리를 전달하는 동시에 당시 독일사회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순박한 방앗간 집 딸을 데려다 결혼하고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도둑 신랑을 독일을 한순간에 파괴와 죽음의 나라로 만들어버렸던 히틀러에 대한 우의적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가슴 아픈 결말을 암시하는 다양한 상징적인 표현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가 된다. 일례로 리네와 한스가 만나는 댄스파티에서 사람들은 모두 빠른 템포로 춤을 출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음악은 느리고 암울하기만 하다. 화면과 사운드의 이러한 부조화는 가장 행복한 구애의 순간에 불안한 미래의 전조가 된다. 신혼생활의 첫날 리네가 새 커튼을 만지다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는 장면 역시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전후세대의 심리적 갈등의 산물 ‘아버지의 영화’를 버리면서 시작한 ‘뉴 저먼 시네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영화계는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문화적 혼란을 겪으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에 1962년 젊은 감독 26인이 오버하우젠에 모여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하며 독일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뉴 저먼 시네마는 프랑스의 누벨바그와 함께 뉴웨이브 운동의 세계화를 이끈 대표적인 영화운동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전쟁에 대한 암울한 기억이 어느 나라보다 더욱 강했던 독일에서 뉴웨이브의 도발적인 캐치 프레이즈, ‘기존 세대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좀더 복합적인 정치적 상황을 내포한 것. 즉 이들에게 뉴웨이브란 전쟁의 책임에 대해 일종의 분리를 통해 면책사유를 발급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반성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오가는 복잡미묘한 심리적 갈등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의 딜레마
오버하우젠 선언을 시작으로 폴커 슐뢴도르프,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알렉산더 클루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같은 젊은 감독들은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각자 다양한 주제를 통해서 전후 독일 사회의 정체성 문제와 현대화 과정에서의 물질만능주의, 비인간화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지만 그들에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외상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전쟁의 참혹한 기억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파스빈더는 한 여성을 통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폴커 슐렌도르프는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눈을 빌어 <양철북>에서 전쟁과 파시즘의 비극을 보여주었다. 이들에게 전쟁의 기억은 사회적 약자, 여성과 어린아이의 기억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이었던 것이다.
실화에서 나온 진실의 힘으로 역사적 외상을 정면으로 다룬 <독일, 창백한 어머니>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감독 자신과 어머니의 경험에 근거, 전쟁의 참담한 기억을 대면하면서 뉴 저먼 시네마의 정점에 선 작품. 많은 감독들이 우회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던 아픔을, 심지어 뉴 저먼 시네마의 심장으로 불리는 파스빈더마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상의 한 여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상처를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바로 감독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잔더스-브람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광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갔는지를 보여준다. 어머니 세대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전후 독일 사회에 깊게 드리워진 파시즘의 문제, 바로 그녀 세대의 문제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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